<괴물>(2006)에게 납치되고, <설국열차>(2013)에서 탈출했던 소녀가 <오피스>(2014)의 인턴으로 돌아왔다. 살아남은 소녀는 회사에 입사하며 현실에 발을 붙였다. 그런데 발 디딜 틈이 없다. SF보다 더한 현실은 호러 장르로 이행되고, 그녀는 다시 한번 생존을 위한 투쟁을 시작한다. 돌이켜보면 고아성은 계급에 대한 화두를 던지는 인물들을 자주 맡아왔다. 자기보다 어린 아이를 지켜낸 영화 <괴물>의 현서부터 기득권에 포섭되지 않는 TV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2015) 서봄까지, 인간적인 가치들을 지켜나가는 당찬 역할을 해왔던 그녀다. 그런데 이번엔, 회사라는 조직사회 안으로 진입하려 안간힘 쓰는 약자를 맡았다. "여태까지와 다르게 접근한 역할이라 더 흥미로웠다"는 고아성. 또래 여배우의 선택지에서 늘 조금씩 비껴가는 답을 내놓는 그녀는 어떤 사람일까. 여전히 사춘기 소녀 같으면서도 벌써 다 자란 성숙한 어른 같기도 한 배우 고아성을 만났다.
-92년생, 24살. <오피스>로 첫 성인 연기에 도전했다. 나이에 딱 맞는 인턴 역이다.
=<오피스>를 찍을 무렵 대학 동기들이 인턴을 시작했다. 인턴 이미례도 동갑이라 시나리오를 읽을 때 더 와닿았다. 나이에 맞는 역할을 해보고 싶기도 했고. 하지만 성인 연기를 해야겠다는 강박이 있었던 건 아니다. 주변에서도 이젠 성인 역을 연기해야 하지 않냐고 많이들 말했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음에 들어온 역할이 고등학생이라도 시나리오만 좋다면 할 거다. 고아성이란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영화를 찍는 게 아니라 좋은 영화가 만들어지는 게 최우선이니까. 그런데 이제는 학생 역은 안 들어오긴 하더라. (웃음)
-캐스팅 1순위였다고 들었다. <오피스>의 각본을 쓴 영화사 꽃 최윤진 대표는 “다른 배우가 연기하는 이미례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생각했던 캐릭터의 모습과 일치했다”고 하더라.
=캐릭터에 대해 많이 고민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이미례를 연구하는 일은 유난히 흥미로웠다. 이미례는 미숙하고 나약한 사람이다. 자존감은 낮은데 자의식은 높아서, 강해 보이고 싶어 노력하는데 실제론 어려운 거다. 나에게도 미숙한 면이 있어 이해가 쉬웠다. 친구의 회사에 가서 복사 등 기본 업무를 배워보기도 했는데 사실 그건 자기만족이었던 것 같다. 회사원이 하는 일을 흉내내기보다는 이미례의 본질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등감과 자격지심, 불안감으로 가득 찬 그녀의 내면 말이다.
-캐릭터 표현에 대해 아이디어를 많이 냈다던데.
=그렇다. 정장을 갖춰 입고 출근하는 사람이 의외로 없다더라. 언니가 첫 출근날엔 완벽하게 갖춰 입고 출근했다가 창피했다는 일화를 들려줬다. (웃음) 그런데 이미례는 커리어우먼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지 않나. 일부러 정장을 갖춰 입으려 했다. 물론 그녀가 입을 수 있는 저가 브랜드로. 회의를 준비하는 신에서는 서류 몇장만 주기에 더 많이 주시라 했다. 짐을 무겁게 진 상황에서 위태롭게 회의실 문을 열게끔 말이다. 또, 정규직 전환이 안 될까봐 불안해진 이미례가 인사과장을 찾아가는 신이 있다. 내가 홍원찬 감독에게 먼저 제안한 신이다. 이미례는 현명하지 못한 사람이다. 경쟁자가 있고 위기의식을 느끼면 경쟁에서 더 잘해서 이기는 방향을 생각해야 하는데, 인사과장을 찾아간 건 무모하고 현실적으로 도움도 안 되는 행동이지 않나. 회사원 친구에게 물어보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더라. 그렇다면 이미례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그 정도로 위태로운 상황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자긴 너무 열심히 해. 그게 문제야. (…) 좀 없어 보인달까”라는 염화영 대리(이채은)의 말에 모욕감을 느끼고, “넌 나랑 비슷해”라는 김병국 과장(배성우)의 말을 부정하는 모습은 이미례라는 캐릭터의 본질과 가까워 보인다. 이미례는 자신에 대한 타인의 판단을 거부하려 하지만, 결국 그들은 그런 식으로 그녀를 규정한다.
=이미례는 당당해지고 싶은 사람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비슷한 사람들끼리는 서로 알아보지 않나. 이미례가 얼마나 약한지 김병국 과장은 알았고, 그녀도 그게 사실이라는 것을 아니까 격하게 거부 반응을 보인 거다. “열심히 하는 게 문제”라는 대사는 사실 슬픈 말이다. 요령껏 좋은 성과를 내는 게 ‘쿨’한 것으로 여겨지는 세태가 싫다. 열심히 안 했는데 잘한다는 말은 열심히 하는 사람들을 무력하게 한다. 맡은 사건에 최선을 다하는 형사 최종훈(박성웅)도 그런 부류다. 이 영화는 결국 열심히 하는 세 사람, 이미례와 김병국과 최종훈이 서로를 알아보는 이야기가 되는 건가. (웃음)
-학교에서든 회사에서든 어떤 조직이든 간에 ‘김병국’과 ‘이미례’ 같은 존재들은 있지 않나. 열심히 하는데 요령 없고 어리숙해서 소외당하는 사람들.
=촬영을 하면서 전작 <우아한 거짓말>(2014)이 생각났다. 그 작품도 집단 내에서 불가피하게 생긴 한명의 소외당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친목관계가 목적이 아닌 집단인 이상 항상 불편한 인간관계는 생긴다. 꼭 눈에 보이는 ‘왕따’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를 대하는 태도만 봐도 무시하고 있는지 어떤 편견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지 않나. 이런 것이 정서적 폭력이다. 평소에 그런 것들을 불편하게 여기기에 <오피스>라는 작품을 택하게 된 것도 있다. 조직 생활에서 이런 자잘해 보이는 폭력이 당사자에겐 얼마나 큰 고통인지 전하고 싶었다.
-사실 어릴 적부터 연기력을 인정받아온 배우 고아성은 이런 ‘을’의 감정과 친숙하지 않을 것도 같다.
=솔직히,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외롭다. 배우라는 직업에 대해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다. “탄탄대로로 살아왔는데 어떻게 이런 감정에 공감을 느끼냐”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어릴 적 “오디션 낙방의 기간 또한 길었다”라고 말하면 그제야 납득하는데, 그게 더 외로웠다. 내게도 실패의 경험이 있다고 토로를 해야만 나 또한 그런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해받을 수 있다는 뜻이니까.
-그렇다면 이미례와 본인이 어떤 점에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말해줄 수 있나.
=“너무 열심히 하는 게 문제”라는 대사가 슬펐다는 것은 나 역시 뜨끔했다는 거다. 그날 밤 연기를 열심히 하고 돌아왔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오늘 되게 열심히 했는데, 그다지 잘한 것 같지는 않네. 그럼 내가 잘하는 건 뭐가 있지. 그게 이미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거다. 내가 이미례에게 가졌던 애잔함이 자기연민이었던 건 아닐까. 자존감은 낮은데 자의식은 높은 점도 비슷하다. 스스로에 대해 관심은 많은데 욕심만큼 안 될 때 그런 상태가 된다. 나 역시 원하는 모습이 아니라는 걸 매 순간 깨닫는다. 결국 내가 바라는 나는 될 수 없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괴로울 때도 많다.
-기준이 너무 높은 것은 아닌가.
=어릴 땐 기준이 막연했는데, 스무살 넘고 나서는 옳고 그름이 명확해졌다. 올바른 마인드를 지닌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원하는 스스로의 모습은 명확해졌는데, 거기까지 따라가기가 어려운 거다.
-향상심이 대단하다. 어떤 사람이 되길 원하나.
=인간적인 존엄성이 있는 사람이다. 여태까지 연기해온 인물들한테서 많이 배웠다. <괴물>의 현서는 괴물 굴에 들어갔는데 자기보다 어린 아이를 보호하며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끝까지 지켰다. <풍문으로 들었소>의 서봄도 또 다른 괴물 굴에 들어가서도 신데렐라가 되길 거부하고 자신을 지켰다.
-그러고 보면 계급에 대한 화두를 던지는 인물을 빈번히 맡았다. <괴물>에서는 시스템의 희생양이었고, <설국열차>에서는 계급과 이념이라는 구조 밖으로 탈출한 생존자였다. <풍문으로 들었소>에서는 비리로 점철된 기득권에 맞서 자신만의 가치를 지켜내는 서봄 역이었고, <오피스>에서는 반대로 직장이라는 조직 안에 발을 붙이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이미례를 연기했다.
=의도적으로 택한 건 아닌데, 돌이켜보니 사회적 메시지가 있는 작품이 많더라. (웃음) 모두 의미 있었지만 가장 닮고 싶은 캐릭터는 <풍문으로 들었소>의 서봄이다. 나는 할 말을 잘 못하는 편이라 할 말을 참지 않고 할 줄 아는 그녀를 연기하며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비현실적일 정도로 똑똑하고 현명하다. 이런 캐릭터가 현대사회에 필요한 인물 같다. 새로운 환경이 주어졌을 때 자기가 그동안 고수해왔던 신념을 잃지 않는 인물 말이다. 계급적인 접근에서만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반면, 이미례는 가장 안타까운 인물이고.
-캐릭터 분석에서 나아가 인간 군상에 대한 관심이 많다는 인상이다. 평소 주변 사람들을 잘 살펴보나.
=인간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호기심이 있다. 그게 연기의 원동력이다. 이미례도 그동안 봐왔던 사람들일 수도 있다. 매력적이고 입체적인 사람을 만나면 언젠가 이런 캐릭터를 연기해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항상 애정과 호기심을 갖고 사람들을 관찰한다.
-김병국 과장이 건넨 칼처럼, 고아성에게도 ‘묵주’ 같은 존재가 있나.
=주변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이다. 밖에 나가서 힘든 상황을 겪고 상처를 받아도, 집에 보물을 숨겨놓은 것마냥 든든하게 버틸 힘을 준다. 쉽게 친해지는 편은 아닌데 한번 친해지면 애착관계가 돈독해지는 타입이다.
-<설국열차> 이후로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종횡무진으로 달려왔다. 어제 <오빠 생각>(감독 이한) 촬영장소인 경주에서 올라와 <오피스> 홍보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데 버겁진 않나.
=양쪽에서 배려해줘서 괜찮다. 다작을 하는 배우들이 멋있어 보였기 때문에 이 정도 속도가 마음에 든다. <오피스>를 촬영한 이후 <뷰티 인사이드>(2015),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2015), <풍문으로 들었소>까지 달려왔다. 지금 템포를 고수하고 싶다.
-홍상수 감독과의 만남은 의외라는 생각도 들었다. 곧 개봉하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는 어땠나.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다. 아침에 4장 정도 되는 대본을 받아 달달 외운다. 지문도 없고 대사만 있다. 여태까지 작업한 방식과 달라 낯설기도 했지만 재미있었다. 원래 홍상수 감독의 팬이다. 김의석 선배의 소개로 홍상수 감독을 처음 만났는데 본인 작품 중 어떤 것들을 봤냐고 물으시더라. 당시 개봉했던 <자유의 언덕> 빼고 다 봤다고 말씀드렸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내가 지닌 인간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이 느껴져서 좋다. 캐릭터의 배경이나 전사가 제시되는 것도 아닌데 어떤 사람인지 잘 알겠지 않나.
-‘인간에 대한 관심’이 고아성의 원동력은 확실한가 보다. 요즘에도 관심을 갖고 있고, 영감을 주는 사람이 있나.
=촬영 중인 <오빠 생각>에 출연하는 아역 30명이다. 열살 정도 되는 아이들인데, 정말 똑똑하고 말도 잘 통해서 친구가 된 느낌이다. 바라보고만 있어도 하루가 금방 간다. 에너지를 받으며 행복하게 촬영 중이다. <오빠 생각>에선 어린이합창단을 이끄는 피아노 선생 박주미 역을 맡았는데, 오랜만의 평범한 역할이라 오히려 새롭다.
-지난해 미국 언타이틀엔터테인먼트 에이전시와 계약을 맺었다. <오빠 생각> 이후 할리우드로 진출할 계획이라고 들었는데.
=준비하던 영화가 있었는데 엎어졌다. <오빠 생각> 이후 다시 제대로 미팅을 가질 예정이다. 할리우드에서 오디션 대본을 받아보면 정말 기발한 작품들이 많다. 캐릭터가 다양하고 새로워 연기적인 욕심이 많이 생긴다. 영어도 <설국열차> 때보다 늘었다. 나는 언제나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싶고, 할리우드 작품에 출연하는 것도 그 도전의 일부다. 매너리즘에 빠지면 끝이다. 흥미를 잃으면 모든 게 무용지물이 되니까.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는 들었으니, 어떤 배우가 되고 싶은지도 궁금하다.
=외롭지 않은 배우다. (웃음)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와 내가 생각하는 모습이 멀지 않은 사람. 내가 원하는 내 모습이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최근에 <오피스>의 이미례를 맡으며 대중의 시선과 실제의 내가 많이 다르다고 느꼈다. 그 거리를 좁혀나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