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기적인 그녀>(2001)는 14년 전 작품이다. 하지만 여전히 아시아 시장에서 통용되는 멜로의 전설이다. 중국에 진출하는 한국 감독들은 지금도 중국 투자사에서 <엽기적인 그녀> 같은 로맨틱 코미디를 만들어 달라는 요구를 받는다. 오래전 ‘한류의 원조’쯤 된다고나 할까. 그 중심에 있었던 곽재용 감독은 누구보다 빨리 일본과 중국으로 진출, 해외 합작영화와 해외 프로젝트에 참여해왔다. 그 시간 동안 한국과 중국, 일본의 제작환경을 습득하는 시행착오의 시간도 거쳤다. 최근 IPTV로 개봉한 <미스 히스테리>는 그가 중국에서 만든 첫 번째 작품이다. 최근 일본에서 <바람의 색>을, 한국에서 임수정, 조정석, 이진욱 주연의 <시간이탈자>(가제)를 찍었고 현재 후반작업 중이다. 다음 주부터는 일본영화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2004)를 리메이크한 중국 작품의 촬영을 앞두고 있다. <시간이탈자> 후반작업차 잠깐 한국에 들어온 곽재용 감독을 만났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는 한국에서도 <파랑주의보>(감독 전윤수, 2005)로 리메이크된 적 있다. 어떻게 다시 영화화하게 됐나.
=소설로 먼저 접했는데 나와 통하는 게 있더라. 철없는 고등학생 시절, 고립된 섬 같은 요소들을 보면서 <클래식>(2003)에서와 비슷한 감성을 전달받았다. 원작의 죽음이 주는 비극보다는 어린 남녀가 처음 사랑하는 이야기를 살리고 싶었고, 그런 정서를 다시 만들어보고 싶었다. 여주인공의 죽음이 주는 드라마틱함이야말로 그 또래 어린 소년들이 가질 법한 판타지가 아닐까 싶다. 원래는 가타야마 교이치의 소설 판권만 사려고 했는데 영화 판권까지 엮여 있어서 그렇게는 안 되더라. 판권 문제를 푸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일본 원작, 한국 감독, 중국 리메이크 작품이다. ‘곽재용’ 만의 해석은 무엇인가.
=중국은 지금 80년대생이 주소비층이다. 영화, TV, 패션, 문화 콘텐츠가 80년대생을 위해 생산된다. 현재의 시점에서 80년대생들이 그들의 고등학생 시절을 회상한다는 점이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일본 원작의 경우 소녀의 죽음에 대해 감정이 억제되어 있는데, 나는 첫사랑의 기쁨뿐만 아니라 죽음의 순간까지 이르는 감정을 내 스타일대로 더 드러내고 싶다.
-한국에서 최근 <미스 히스테리>(중국 개봉 제목 <내 여자 친구는 조기갱년기>(我的早更女友))가 IPTV로 공개되기도 했다(8월13일). 오랜만의 연출작인데 극장 개봉 없이 바로 부가판권 시장으로 갔다. 앞서 안병기 감독이 중국에서 연출한 <분신사바2>(2013) 같은 작품이 국내 개봉 시 수익이 저조했던 게 영향을 준 게 아닌가.
=그보다 한국 수입과정에서 불협화음이 있었다. 정식으로 배급 회사에서 수입하지 않고 소규모 수입회사가 하다보니 환수를 빨리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내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아쉬움이 있다. 흥행 성적을 떠나 개봉을 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상당히 차이가 나지 않나. 잠시라도 극장 개봉하고 가는 게 순서인 것 같은데 그 부분은 많이 아쉽다.
-중국에서는 지난겨울 개봉해 흥행에 성공했다.
=주연배우인 저우쉰이나 통따웨이 같은 톱배우 주연의 작품이니 대중적으로 관심이 컸다. 중국에서 1억7천만위안의 수익을 올렸는데 그 정도면 대박은 아니고 중박 정도라고 보면 된다. 우리나라 흥행 비율로 보면 400만~500만 정도 관객이 든 거다. 각본을 쓴 조금령 작가는 원래 경찰공무원을 하다가 <청춘호르몬>이라는 인터넷영화를 쓴 작가다. 이 작품이 잘되면서 작가 개런티가 10배로 올랐다고 하더라.
-실연으로 히스테리를 부리는 여자, 그런 그녀를 한결같이 돌봐주는 순진한 남자라는 남녀 구도로 볼 때 <엽기적인 그녀>를 연상시키는 측면이 크다.
=<엽기적인 그녀>처럼 만들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엽기적인 그녀>가 가진 상징성은 중국에서 엄청나다. 외딴 시골 마을에 가도 꼬마들부터 아주머니들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다. 허우샤오시엔 감독이 날 보고 “곽 감독 영화 1위안(180원)이면 볼 수 있다”고 할 정도였으니. (웃음) 그간 <엽기적인 그녀>를 생각나게 하는 작품을 만들어 달라는 요구도 많았는데 비슷한 작품을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중국은 영화제작 때 ‘감제’(監製)라는 영역(시나리오, 제작단계에서 감독을 지도하는 이른바 ‘총감독’이라는 의미)이 있는데 젊은 감독들이 감제를 부탁하는 경우도 많았다. <엽기적인 그녀>의 감독이 참여했다고 하면 캐스팅이나 마케팅에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까 내 이름을 쓰려고 하는 거다. 최근에는 권상우가 주연한 <적과의 허니문>(2015)의 감제를 맡기도 했는데, 마치 내가 감독한 것처럼 마케팅에 활용되는 걸 보고 놀랐다. <엽기적인 그녀>는 작품 자체로의 맛이 있는데, 내가 지금 다시 그 형식으로 만든다고 해도 그때의 그 매력을 충족시킬 수는 없을 것 같다.
-<엽기적인 그녀>의 실질적 후속편이라 할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2004)나 일본에서 만든 <싸이보그 그녀>(2008)는 흥행이 저조했다. 스스로 <엽기적인 그녀>라는 수식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 같다.
=최근 조근식 감독의 <엽기적인 두 번째 그녀>가 한•중 합작으로 촬영을 마쳤는데 그 작품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 때를 돌아보면 제작비가 부족해서 여러모로 상황이 좋질 않았다. 전지현 광고 효과를 기대한 기업들의 PPL로 제작비를 만회했는데 당시에는 PPL을 많이 받았다고 비판이 많았다. 매니지먼트사가 처음으로 제작하는 영화라는 데에 대해서도 시선이 좋지 않았다. 배우 캐스팅이 어려운 상황에서 매니지먼트사가 배우들을 독점하고 영화제작까지 좌지우지할까 우려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흥행까지 안 되면서 차기작으로 함께 하기로 한 <싸이보그 그녀>를 전지현과 같이 못하게 되고 어려움이 겹친 거다.
-그래서인지 중국 진출작은 로맨틱 코미디의 이미지를 벗어줄 사극 <양귀비>(2015) 프로젝트였다. 촬영까지 진행하다 불발되면서 주연배우인 판빙빙과의 불화설로 구설에 오르기도 했는데, 왜 연출직을 사임한 것인가.
=2009년 <양귀비> 연출 제의를 받고 촬영까지 들어갔다. 나로서는 중국에서는 보지 못한 새로운 사극을 한번 만들어보자는 원대한 꿈이 있었다. 일본 배우 오구리 슌이 캐스팅돼 일본 투자도 들어오고, 배우 이경영이 영화계에 본격적으로 복귀하기 전이었는데 함께하기로 했다. 그런데 검열 우려 때문에 시나리오가 1년 넘게 수정됐다. 실제 역사에 기록된 사실 이외에 그 어떤 상상력도 영화적으로 허용이 안 되더라. 거기다 배우 파워가 워낙 막강해 주연배우가 시나리오에 깊게 관여하는 것도 걸림돌이었다. 연출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허용치를 넘어섰고 도저히 작업을 할 수가 없게 됐다. 결국 내가 하차했다. 장이머우, 티엔주앙주앙 감독이 공동 연출로 참여해 올해 중국에서 개봉했는데, 제작과정에서의 잡음 때문이었는지 결국 평가나 흥행은 좋지 않았다.
-중국에서 배우가 가지는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가.
=배우가 정말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 매니지먼트에서 계약조건이 상당히 세세하다. 내 계약서 조항에는 ‘감독이 배우에게 욕하면 벌금’이라는 것도 있을 정도다. 배우 개런티도 높다. 제작비와 개런티가 일대일인 경우도 많고, 개런티가 개런티를 뺀 전체 제작비를 웃도는 경우도 없지 않다. 배우가 부족해서다. 특히 20대 초반의 여배우는 거의 없다. 장이머우 감독이나 주성치 감독 정도가 신인배우를 발굴하지 그외에는 톱배우와의 작업만 이루어진다. 흥행을 위해서 검증된 배우만 캐스팅하는 분위기가 팽배하다보니 톱배우들의 몸값이 점점 높아지는 거다.
-<미스 히스테리>는 그런 풍파의 과정이 모두 지나고 나서 만든 작품이다.
=<양귀비> 이후에 중국에서 준비하던 작품도 안 됐다. 두 작품이 연달아 불발된 거였다. 오기환 감독이 중국에 와서 <이별계약>(2013)을 바로 만들어서 흥행하는데 좀 밉더라. (웃음) <양귀비>가 그렇게 되고 나서 나에 대한 근거 없는 부정적인 시각도 중국에 퍼져 있는 상태여서 만회가 필요했다. 다시 영화를 만들려면 대작을 하는 것보다 중국영화계의 룰에 맞출 수 있는 작품을 하자고 판단했다. 39일 만에 39회차로 완성하는 걸 목표로 중국 시스템에 동화해서 만들려고 했다. <미스 히스테리>는 중국이라는 영화 환경에 맞추려는 목표와 노력으로 만든 작품이고, 그런 경험을 했다는 데서 나름 만족한다.
-후반작업 중인 일본영화 <바람의 색>은 <싸이보그 그녀> 이후 일본에서 만든 신작이다.
=도플갱어를 소재로 한 멜로영화다. 2007년부터 준비했으니 꽤 오래 걸렸는데, 오래 준비하면서 내가 왜 이 소재에 매달렸는지,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해답을 찾은 기분이다. 웹툰이 원작인데 원안을 직접 썼다. 웹툰을 먼저 발표한 건 일본 시장 분위기에 맞춰 일종의 편법을 쓴 거다. 현재 일본 영화계가 워낙 침체되어 있고, 오리지널 시나리오도 없다. 책이 많이 팔리면 그것으로 영화를 만드니 지금은 오히려 영화가 하나의 부가시장처럼 돼버렸다. 그래도 <바람의 색>은 일본영화 환경에서 볼 때 자유롭게 만든 편이다. 메이저사에서 진행하는 큰 작품이 아니라서 가능했는데, 신인배우를 캐스팅하는 것도 허용됐고 제작비가 약간 초과된 것도 용인됐다. 여러 면에서 이번 작품은 스스로 자신 있는 작품이다.
-<시간이탈자>가 내년 초 한국 개봉을 앞두고 있다. <싸이보그 그녀> 이후 한국에서는 8년 만의 개봉이다.
=한국에서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은 늘 가지고 있었다. <시간이탈자>는 내 시나리오가 아니라 제안을 받은 작품인데, 타임슬립 소재에 관심이 가더라. 1983년과 2015년 현재를 오가는 내용으로, 두 남자가 죽은 여자를 살리기 위해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80년대 젊은 시절의 순수한 멜로드라마와 현재의 스릴러가 혼용돼 있다. 스릴러는 꼭 해보고 싶은 장르였는데, 그런 면에서 잘 맞았던 것 같다. 한국에서는 정말 오랜만의 촬영인데 그렇다고 특별히 부담은 없었다. 일본에서 작업하면 일본영화계에 적응해야 하고 중국에서 작업하면 중국영화계에 적응해야 한다. 늘 그렇게 지내왔다. 한국에서도 오랜만이니 또 한국영화계에도 적응해야 한다.
-최근 한국에서는 눈에 띄는 멜로 영화를 발견하기 힘들고, 흥행에서도 만족스럽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투자사 중심의 기획영화가 제작되는 상황에서 멜로 장르는 아예 설자리가 없다. 시나리오가 재밌어야 하는데, 멜로영화는 다른 장르에 비해 시나리오만으로 그 재미를 전달하기가 힘들다. 한국뿐만 아니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도 막상 중국 투자사들이 많이 망설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중국영화도 스타일이 바뀌고 있는데 대놓고 백혈병 같은 옛날 소재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걱정이 있었던 거다. 하지만 나는 10년 주기로 감정의 변화들이 온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복고적인 걸 찾기 시작했다. 이 영화의 강점은 그래서 오히려 백혈병에 있을 것 같다. 맘 놓고 슬픔을 표현할 수 있는 것, 울 수 있는 영화에 대한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거다.
-중견감독들이 제작일선에서 밀려나는 추세다.
=일본이나 중국에 가서 나 같은 중견감독이 활동할 수 있는 건 그곳 현장이 경로사상이 희박해서인 것 같다. 그들은 나이에 대한 예우가 별로 없다. 반면 우리나라는 나이가 들면 대우해주려고 하는 성향이 너무 강하다. 이게 실질적으로 현장에서 작업할 때 불편함을 초래한다. 젊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나이 든 감독과 ‘불편하게’ 일하느니 신인감독과 작업하는 게 편한 거다. 나이 든 감독들에게서는 노련함보다 올드함이 부각된다. 이번에 <시간이탈자>를 하면서도 투자사에서는 걱정이 많았을 것이다. 실제로 나도 올드하면 안 된다는 무언의 압박을 느꼈던 것 같다.
-신파의 정서를 배제할 수 없는 작품들을 만들다보니 그런 면에서 ‘올드함’이라는 우려는 항상 안고 갈 수밖에 없는 양날의 칼이다.
=올드함에서 벗어나려면 감정 절제를 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가, 그러다보면 곽재용이라는 스타일이 없어진다. 나는 이 양쪽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런 면에서 나는 내 또래 감독들이 실패하는 건 감정 조절을 해서라는 생각이 든다. 병으로 죽어가는 여자 이야기라면 감정 조절을 왜 하나. 난 오히려 절제를 하지 않는 게 답이라고 본다.
-돌이켜보면 <엽기적인 그녀>의 흥행이 <클래식>을 가능하게 했고 그전에 있었던 공백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일본과 중국으로 활동 무대를 넓혔다. 연출자로서 매번 중요한 전환의 시기를 스스로 마련했던 것 같다.
=감독은 영화를 할 때가 살아 있는 거다. 작품을 하지 않고 몇년 지나고 필모그래피가 빠져 있으면, 스스로 그 기간이 존재하지 않는 시간같이 느껴진다. 분명 시나리오 쓰고 준비를 했는데도 말이다. 그만큼 작품을 완성하는 게 중요하다. 나는 영화를 찍고 싶은 욕망이 강하고, 1년에 두편씩은 찍고 싶다. 그런 바람이 있기 때문에 쉬지 않고 시나리오를 쓴다. 현장에서와 달리 시나리오 쓰기는 혼자 하는 작업이다 보니 스스로를 이겨야 한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지만 그걸 해마다 끊임없이 하고 있다. 하지만 시나리오를 안 쓰면 감독의 창작욕이 사라진다고 본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굴하고 끊임없이 적응하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