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룸13>(2014) <위험한 패밀리>(2013) <그루지 매치>(2013) <레드라이트>(2012) <실버라이닝 플레이북>(2012) <리미트리스>(2011) <미트 페어런츠3>(2010) <스톤>(2010) <할리우드 폭로전>(2008) <살인의 함정>(2008) <갓센드>(2004) <미트 페어런츠2>(2004) <맨 오브 오너>(2000) <미트 페어런츠>(2000) <에널라이즈 디스>(1999) <로닌>(1998) <히트>(1995) <프랑켄슈타인>(1994) <사랑의 기적>(1990) <좋은 친구들>(1990) <브롱스 이야기>(1993) <미드나이트 런>(1988) <엔젤 하트>(1987) <미션>(1986) <폴링 인 러브>(1984)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1984) <코미디의 왕>(1983) <분노의 주먹>(1980) <디어 헌터>(1978) <뉴욕, 뉴욕>(1977) <택시 드라이버>(1976) <대부2>(1974) <비열한 거리>(1973) <대야망>(1973) <기관총 엄마>(1970) <안녕 엄마>(1970)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에서, 퇴직가장 패트리치오(로버트 드니로)의 노후설계는 치즈스테이크 레스토랑을 개업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자금 마련. 관중석에서 난동 부리다 출입금지 처분을 받을 정도로 광팬인 미식축구팀 ‘필라델피아 이글스’에 돈을 걸어 한몫 잡겠다는 황당한 마음뿐이다. 게다가 징크스에도 유달리 집착하는 바, 아들과 함께 경기를 봐야 팀이 이긴다는 그의 고집 어린 미신은, 가뜩이나 이혼 트라우마로 정신 못 차리는 둘째아들 패트릭(브래들리 쿠퍼)과 사사건건 충돌하는 빌미가 된다.
“로버트 드니로 하면 모두들 터프가이를 생각한다. 코미디영화에서도 다소 무서워 보이는 역할을 자주 맡곤 했는데, <인턴>에서는 그런 익숙한 이미지를 전혀 찾을 수 없지 않나?”라는 낸시 마이어스 감독의 말처럼, 과거 코미디 출연작 중 로버트 드니로의 캐릭터나 연기에는 어떤 전형이 존재했다. 가령 우리는 로빈 윌리엄스가 즐겨 맡았던 휴먼 코미디 캐릭터를 드니로가 연기하는 모습은 좀처럼 상상하기 힘들다. 물론 이건 그의 역량과는 하등 상관없는 이야기다. <미트 페어런츠> 시리즈를 제외하면 드니로의 캐릭터는 대개 패밀리맨이 아니었고, <애널라이즈 디스>를 비롯해 많은 경우 까탈스럽거나 심지어 폭력적인 성격인 데다 과거사에 집착하고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한데 <인턴>의 벤 휘태커는 모든 면에서 반대다. 30대 여성 CEO 줄스(앤 해서웨이)를 일말의 편견 없이 대하는 모습에서 추정하건대 그는 관용적인 아버지였을 것이고, 타인을 예의로 대하는 사람인 한편, 사별한 아내를 그리워하는 정년퇴직자이면서도 새로운 일과 사랑으로 발 내딛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나마 기존의 배역들과 닮은 모습이라면 첨단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지 않다는 것 정도다. 인터넷 쇼핑몰의 시니어 인턴으로 출근한 첫날, 1973년식 가죽 서류가방에서 다이어리, 필기구, 폴더폰에 속칭 ‘쌀집계산기’까지 꺼내 책상에 가지런히 정돈하고, 노트북이 코앞에 있는데도 굳이 신문을 펼쳐 읽는 벤의 모습은, <그루지 매치>에서 ‘바이럴 동영상’이라는 용어를 모른다고 놀리는 프로모터에게 짜증내던 왕년의 복서, 빌리 더 키드 캐릭터에 자연스레 겹친다. 팝가수 제이지를 이야기하는 젊은 회사 동료들 앞에서 “유명한 사람인가?”라고 묻는 모습은 또 어떤가? 재미있게도 제이지는 얼리샤 키스와 함께 부른 <Empire of State> 가사에서 드니로를 언급한 적이 있다.
영국 잡지 <엠파이어>가 현재 생존해 있는 최고의 배우 1위로 로버트 드니로를 꼽았을 때, 기사의 부제는 ‘우리 곁의 신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종류의 절찬은 주로 1970~80년대, 배역 그 자체가 되기 위해 외모를 변화시키는 메소드 연기술 ‘드니로 어프로치’가 주요한 근거이자 바탕이었다. 코미디 출연작에서의 연기는 대개 평가 영역 바깥에 있거나 괄호로 쳐져 있기 일쑤였다. 드니로 자신도 말한다. “내가 연기했던 마피아 캐릭터들은 사실적이다. 사실적인 만큼 다른 배역에 비해 더욱 성심껏 준비하고 잘 다뤄야 할 필요가 있다. 다른 캐릭터들은 글쎄, 스테레오타입이랄까? 드라마를 찍을 때는 하루 종일 누군가를 죽을 때까지 두들겨 패거나 그의 얼굴을 물어뜯거나 해야 한다. 반대로 코미디를 할 때는 빌리 크리스털의 얼굴에 대고 한 시간 동안 고함을 지른 다음 그냥 집에 가면 된다.” 하지만 드니로 필모그래피에서 무시 못할 점유율을 구축하고 있는 코미디영화 속 연기와 캐릭터 또한 사실 스테레오타입 이상의 복잡하고도 다채로운 변천을 거쳐온 바 있다.
시작은 마피아 전문배우의 이미지를 탈피하려는 반작용이었다. <대부2>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로 해당 분야의 정점에 오른 후, <언터처블>(1987)에서 또 한번 알 카포네의 현신이 되어 갱스터 연기의 일가를 이룬 로버트 드니로는, 차기작으로 두편의 코미디영화 <미드나이트 런>과 <천사탈주>(1989)를 선택했다. 각각 현상금 사냥꾼과 신부로 위장한 탈옥죄수로, 캐릭터는 마피아에서 제법 떨어져 있으나 배역에 접근하는 방법론은 전과 다름이 없었다. <미드나이트 런>에서의 연기를 위해서는 실제 잠복형사와 동행하면서 수사기법을 몸에 익혔으며, <천사탈주>에서는 때로 과장돼 보일 만큼 제스처가 큰 무성영화풍 마임 연기를 일관되게 선보였다.
80년대 출연작이 기묘한 상황에 휘말려 좌충우돌하는 식의 시추에이션 코미디에 가까웠다면 90년대 작품들에서는 캐릭터 코미디의 성격이 두드러지기 시작한다. 블랙코미디 <형사 매드독>(1993)에서의 배역은 ‘미친 개’라는 별명과 달리 겁 많고 소심한 감식반 형사. 뜻밖에 예술사진을 찍는 포토그래퍼가 꿈이지만 스스로도 언감생심이라 여기는 인물이다. <애널라이즈 디스>와 <미트 페어런츠>에서는 본격적으로 과거 출연작의 이미지를 가져와 터프가이임을 숨기지 않는 드니로 특유의 코미디 캐릭터를 완성한다. 배역에 접근하는 방식도 달라졌다. “로저 코먼의 <기관총 엄마>에 출연할 때는 점심을 무덤가에서 먹기도 했다. 젊을 때는 평소에도 캐릭터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이가 들수록 배역에 대한 확신은 강해지고 집착은 덜해진다. 여유를 가지면 더 나은 성취를 할 수도 있다. 긴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게 핵심이다. 이완을 유지하되 확신을 가지는 것.”
이완과 여유는 모험으로 이어졌다. 2000년대 이후의 코미디 초이스는 파격의 연속이었던 까닭이다. 매튜 본의 <스타더스트>(2007)에서는 부하들 몰래 여장을 즐기는 하늘의 해적선장 캡틴 셰익스피어로 분했고, 로버트 로드리게즈의 고어 액션 <마셰티>(2010)에서는 그야말로 고전적이고 전형적인 악역을 연기했는가 하면, <그루지 매치>에서는 과거 <분노의 주먹>의 캐릭터 이미지를 슬그머니 빌려와 80년대 당시 안티테제였던 록키와 맞붙는다는, 사뭇 장난기 어린 기획에 선뜻 동참하기도 했다. 따라서 드니로가 <인턴>에서 선보인 변신의 의외성에는 이처럼 코미디 전작들의 이미지가 연상되는 모종의 서스펜스마저 계산에 있었던 데다 또한 주효한 것으로 보인다. 애초 낸시 마이어스의 캐스팅 1순위가 잭 니콜슨이었다는 사실은, 성실하고 온화한 이미지의 배우를 쓸 생각이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니 말이다.
“무정부주의와 엄격한 규율이 뒤섞여 있는 것, 그것이 내 작업이다”라는 드니로의 말대로 정극과 희극을 불문하고 과거의 그는 극단을 오가거나 모호한 성격의 인물을 선호했다. 이제 로빈 윌리엄스를 떠올릴 정도로 낙천적인 품성을 지닌 <인턴>의 벤 역할을 통해 그 모호함은 바야흐로 필모그래피 전체로 확장되었다(아이러니하게도 말년의 로빈 윌리엄스가 <앵그리스트맨>을 비롯해 어쩐지 드니로스럽게 신경증적인 캐릭터에 도착한 것처럼 서로는 대조적인 행보를 걸어왔다). 어느덧 그의 코미디 캐릭터를 한마디로 규정하기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요컨대 “뮤지션에게 은퇴란 없대요. 음악이 사라지면 멈출 뿐이죠. 제 안엔 아직 음악이 남아 있어요”라는 극중 벤의 자기소개서 문구에 빗대자면 <인턴>은, 더욱 노련하고 완숙해진 기교가 기대되는 로버트 드니로의 코미디 연대기, 그 새로운 악장의 첫 소절인 셈이다.
일찌감치 빛났던 코미디 본능
일찍이 로버트 드니로는 “나는 항상 코미디를 해왔다. <비열한 거리>나 <택시 드라이버>에도 코믹한 요소들이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처럼 ‘코믹한 요소’로서의 아이러니가 극대화된 정극 작품이 마틴 스코시즈의 1983년작 <코미디의 왕>이다.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 대성하겠다는 주인공의 야심적 몽상은 머지않아 망상으로 밝혀지는 데다 그런 그를 둘러싼 현실이 그 자체로 씁쓸한 코미디가 되는 반면 마침내 TV무대에 선 주인공의 모습은 서글프고 남루한 비극이 되는 아이러니. 따라서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주인공 루퍼트 펍킨 역을 맡은 로버트 드니로에게는 어떤 면에서 또 하나의 코미디 연기 도전이기도 했다. 심지어 코미디 천재라 불리는 상대역 제리 루이스마저 그의 재간에 녹다운될 정도였다고 밝힌 바 있으니. “그가 연기를 시작하면 나는 카메라가 있다는 사실도 종종 잊어버렸다. 바비(드니로의 애칭)의 목구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