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사의 아수라장]
[곡사의 아수라장] 대지에서 하늘로 내리는 비
2015-10-09
글 : 김곡 (영화감독)
추석, 배추전을 먹으며 본 성장영화의 속성을 파헤치다
<스탠 바이 미>

추석 때 가장 듣기 싫은 말 1위가 “너 요새 뭐하니?”였단다. 청춘이란 곧 청년실업(혹은 3포)이란 공식이 생리가 되어버린 작금이기 때문이겠지만, 사실 영화인들에게 저 생리란 경기를 타지 않는 생의 사실이다. 공상하고 궁상 떨고 꿈꾸는 게(때로는 악몽이지만) 직업인 영화인들은 몇번의 명절을 지나도 철들지 않는 철부지 어린이나 같기 때문이다. 철부지가 직업병이라. 그걸 다시 되새기고 싶었을까. 추석날 나만의 성장영화들을 다시 꺼내보며, 차례상 배추전을 팝콘 대용으로 처먹었던 나는 여전히 철부지인가?

가출하고, 장례 지내고, 귀가하기

먼저 성장영화는 가족영화가 아니다. 성장영화에서 가족은 언제나 분열적으로만 등장하며, 성장을 임무로 하는 어린이 주인공에 대해 으레 적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스탠 바이 미>에서 아버지는 주인공에게 “형 대신 네가 죽었어야 했어”라고 말한다. <굿 윌 헌팅>에서 주인공에게도 적이란 자신을 학대하던 아버지였고, 나아가 자신을 멸시하던 세상 전체였다. 가장 극악무도한 적을 보여준 성장영화는 조도로프스키의 <성스러운 피>다. 주인공을 자신의 팔다리로 삼는 어머니가, 그의 성장을 발목잡고 있는 주적이다. 그는 자궁에 감금된 셈이다. 또한 성장영화는 아동영화가 아니다. 아동영화에 으레 있어야 할 꿈과 모험이 성장영화엔 없기 때문이다. 꿈이 있다면 악몽이 있고, 모험이 있다면 그것은 희망을 좇는 모험이 아니라 반대로 절망을 좇는 모험이다. 그것은 죽음이란 꿈이다. 만약 성장영화의 주인공들이 집을 떠난다면, 이는 죽음을 확인하러 가기 위해서이다. <스탠 바이 미>에서 어린이들은 시체 구경을 하러 가출한다. 성장영화에서 어린이들의 길은, 생의 끝으로 향하는 장례 행렬인 셈이다. 한국의 몇 안 되는 소중한 성장영화 <달려라 하니>에선 이 사실을 아예 주제가로 만들어 불렀다(“엄마가 보고 싶음 달릴 거야. (죽은) 엄마 품으로. 달려라 하니~ 이 세상 끝까지~”). 하지만 여기서 죽음은 단지 육신만의 것은 아니다. 성장영화에서 어린이들이 종국에 깨달아야 할 것은 모든 존재는 죽는다는 것,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영원성의 실패를 확인하지 못한다면 첫사랑이 아닌 것처럼- 불멸성의 실패를 확인하지 못한다면 어찌 성장이랴. 이로부터 성장영화의 세 번째 룰이 나온다. 그래서 성장영화는 리얼리즘영화가 아니다. 성장영화는 현실주의가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현실을 받아들이는 영화다. 그것은 성장의 끝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현실이다. <시네마 천국>에서 알프레도는 토토에게 “다시는 이 마을로 돌아오지 말라”고 충고한다. 알프레도는 토토에게 바로 이 사실을 가르쳐주려고 했던 것이다. 모든 것엔 끝이 있다. 영원한 것은 없다. 사랑도, 사람도, 무엇이든.

<굿 윌 헌팅>

가출하고, 장례 지내고, 귀가하기. 무엇보다도 이 모든 것은 자아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예컨대 성장영화에서 자아가 집을 나가는 게 아니다. 자아가 곧 그 자신의 집이기 때문이다. 성장영화에서 자아는 자아를 가출한다. 성장영화에서 자주(아니 반드시) 등장하는 이인증은, 자신에게 뿌리내리지 못한 채 방황하는 자아를 보여준다. 단박에 먼저 생각나는 이인증은, 어른 행세를 하는 어린이일 것이다. 아직도 자아를 찾지 못해서- 같은 말이지만- 아직도 자신에게 뿌리내리지 못해서 성장하지 못한 것을 숨기려고 하는 어린이의 경우다. 예컨대 <굿 윌 헌팅>의 주인공의 자기방어 메커니즘이 바로 그렇다. 그러나 이인증의 끝판왕은 역시나 카를로스 사우라의 <까마귀 기르기>일 것이다. 소녀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자신의 도플갱어를 발견하는 장면은 여전히 악몽 같은 충격으로 남아 있다. 밤마다 어머니 유령과 벌이는 유체이탈극은 또 어떠한가. 사우라의 이 작품은 성장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이인증의 가장 심오한 넘사벽 정점으로 남아 있다. 소녀가 어머니의 대역이 되기 위해 할머니를 독살하려고 하고, 또 소녀 자신의 대역이 되고자 어머니의 대역들을 총살하려고 하는 와중에, 모든 것은 소녀의 1인2역 자작극이다(헉, 뭔 말이여. 백문불여일견, 영화로 확인해보자- 배추전 필참). 다른 한편 자아가 다시 집에 돌아왔을 때, 현실적으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거나, 아니면 매우 사소한 것만이 변해 있다. 가장 크게 변한 것은 자아 자신이다.

그것은 세상의 변화가 아닌,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관점의 변화다. 예컨대 <플립>의 마지막 장면, 주인공들은 작은 나무 하나를 심는다. 나무는 비록 아직 작지만, 그것을 심는 그들의 시선은 이미 높다(감독이 무려 <스탠 바이 미>의 로브 라이너, 숨은 개명작으로 성장영화 마니아 사이에선 이미 유명한 작품이니 꼭 확인하시길- 배추전 필참). <죽은 시인의 사회>의 마지막 장면도 빼놓을 수 없다. 학생들은 책상 위에 올라섬으로써 키팅 선생을 배웅한다. 스승을 내려다봄으로써만이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완성해내는 것이다. 키팅 선생이 떠난 뒤에도 보수적인 학교 정책엔 아무런 변화가 없겠지만, 그 올라섬 하나로 학생들은 이미 학교를 졸업한 거나 마찬가지다.

그러고 보니 성장영화는 이 모든 성장을 자연의 생장에서 빌려오는 것 같다. 마치 결국은 겉과 속, 안과 밖, 환경과 생명체가 구분되지 않는 대지-나무-하늘의 관계처럼. 첫째, 뿌리 내리지 못한 자아는 대지에 정박하지 못하고, 대기 중으로 증발된다. 성장영화의 주인공들은 으레 유령 같은 존재들이며, 가족이나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투명인간들로 시작한다. 가출은 곧 증발인 셈이다. 아마도 <까마귀 기르기>의 소녀는 밤마다 1인2역극을 벌이면서, 이미 가출하고 증발했을 것이다. 아마도 <굿 윌 헌팅>의 소년은 해박한 지식으로 자신의 죄책감과 증오심을 감추기 시작하면서, 이미 가출하고 증발했을 것이다. 증발의 가장 노골적인 예는 <그래비티>다. 탯줄과도 같은 연결선에 매달린 채 무한한 우주공간을 방황하는 우주인도 증발했고, 가출했고, 또 대지(중력)에 귀환(귀가)하기를 기다린다. 둘째, 그렇게 증발된 자아는 스스로 먹구름이 된다. 이것은 마치 자아가 떠난 자리에 남은 구멍이, 자아를 집어삼키는 블랙홀이 되는 것과 같다. 대부분의 성장영화에서 그 먹구름이란 바로 죄책감이다. 나 대신 형이 죽은 죄, 나를 낳다가 엄마가 죽은 죄, 내가 태어난 죄, 나아가 내가 존재한 죄…. 생의 트랙 끝에서 자아가 확인해야 할 죽음이란, 바로 내가 존재한 바로 지은 죽을죄의 죽음이다. 그것은 내가 되갚아야 하는 죽음인 셈이다. 이 먹구름의 가장 정치적인 버전들을 찾아낸 이는 오시마 나기사와 스필버그다: 먹구름은 일장기의 검은 태양이고(<소년>), 그로부터 내리는 폭우란 폭격이다(<태양의 제국>). 셋째, 그러나 위기는 곧 기회다. 먹구름은 곧 빗방울로 재응결되어 대지로 떨어지리라. 자신의 무게에 못 이긴 수증기가 비가 되어 내리는 것이다. 빗방울이란 죽을죄란 애초부터 없었음을 긍정하는 눈물일 수도 있고(<굿 윌 헌팅>), 죽을죄를 비로소 대속하는 핏방울일 수도 있다(<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개의 열쇠>). 어쨌든 비는 대지로 귀가하고 거기서 바로 다시 나무는 자라난다. 마치 자아가 뿌리 뽑히고 증발된 것이 하나의 연극(통과제의)이었음을 밝혀내기라도 하려는 듯, 물방울은 어느새 다시 대지에 머금어져 있다. 그래서 성장영화에서 비는 단지 하늘에서 내리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성장영화에서 비는 대지에서 하늘로, ‘거꾸로’ 내린다. 나는 이러한 역설이 <시네마 천국>의 마지막 장면이 갖는 오묘함의 정체라고 믿는다. 단지 환영에 불과한 필름(키스 장면)은 마치 영원을 약속하는 것처럼 거기에 있다. 그리고 또한 나는 믿는다. 그러한 역설이야말로 이명세의 성장영화들이 보여주는 몽유병자들의 도약과 거꾸로 내리는 비(<개그맨> <첫사랑> <나의 사랑 나의 신부>), 그리고 미야자키 하야오가 보여주는 비행 뿌리(<천공의 섬 라퓨타>)가 진정 의미하는 바라고. 결국 나무는 하늘에 뿌리내리는 것이다.

철부지 궁상에서 어른 행세로

앗.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내용이다. 심연을 들이마셔서 그 깊이를 자신의 높이로 빨아올리는 태양. 더 높이 자라기 위해서 더 깊이 뿌리 내리는 나무. 자작극으로서의 심연과 하늘보다 높은 대지. 오랜만에 읽어볼까.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토토의 필름 상영은 끝났고, 키팅 선생은 학교를 떠났다. 배추전은 다 먹었고, 추석 연휴는 다 끝나간다. 삼촌/고모의 “너 요즘 뭐하니?” 어택을 피해서 철부지 궁상으로 도망쳤던 나도, 내일은 사무실로 귀환해서 다시 어른 행세를 해야 한다. 하지만 배추전은 알고 있다. 세상은 내일도 그대로겠지만, 난 이미 성장했음을. 추석은 배추가 배추전으로 성장하기 위해 벌인 자작극인 것처럼, “요즘 뭐하니” 어택은 내 도플갱어가 나 스스로에게 먹구름을 부여하기 위해 벌인 자작극이었음을. 성장은 내 영혼의 무게로 나 자신을 다시 굴려보는 행위임을. 내일도 모두 성장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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