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델라인: 멈춰진 시간>(2015) <새비지: 디 인테러게이션스>(2012) <파괴자들>(2012) <런어웨이 걸>(2011) <그린 랜턴: 반지의 선택>(2011) <타운>(2010) <피파 리의 특별한 로맨스>(2009) <청바지 돌려입기2>(2008) <뉴욕 아이 러브 유>(2008) <엘비스와 아나벨레>(2007) <사이몬 세이즈>(2006) <억셉티드>(2006) <청바지 돌려입기>(2005)
TV시리즈 <가십걸 시즌6>(2012) <가십걸 시즌5>(2011) <가십걸 시즌4>(2010) <가십걸 시즌3>(2009) <가십걸 시즌2>(2008) <가십걸 시즌1>(2007)
댄과 사귀었다가 네이트와 사귀었다가 다시 또 댄과 사귀었다가…. 등장하는 인물 모두와 사랑에 빠지는 이상한 여자 세레나 반 더 우드슨. 블레이크 라이블리 하면 드라마 <가십걸>의 그 황당한 캐릭터로 기억하는 사람이 아마 대부분일 거다. 혹은 라이언 레이놀즈와 결혼한 여배우로 기억하는 사람도 몇 있겠고. 막장 드라마 같은 <가십걸>의 이야기 전개에 블레이크 라이블리도 지긋지긋했던 것 같다. 그녀는 지난 5월, 한 인터뷰에서 모든 사람이 듣고 싶어 했던 얘기를 드디어 털어놓고야 말았다. “다른 사람에게 코카인을 줘서 과다 복용하게 하고 친구의 남자친구와 자는 사람을 좋아하긴 힘들죠. 사람들은 그 드라마를 무척 좋아했지만 전 좀 낯부끄러웠어요. 좀더 메시지가 있었으면 했거든요.”
그러니까 금발에 늘씬한 몸매를 지녔다고 해서 그녀가 멍텅구리는 아니라는 거다. 사실 지금까지 그녀를 향한 언론과 대중의 시선은 매우 가혹했다. 코미디언 에이미 슈머는 지난 5월 가짜 토크쇼 코미디 프로그램에 ‘에이미 레이크 블라이블리’라는 이름으로 출연해 “전 진짜 톰보이예요, 평소엔 스웨트팬츠를 주로 입거든요”, “집에서 친한 여자친구들을 위해 빵을 굽고 만화책을 읽을 때가 제일 좋아요”라고 말하며 블레이크 라이블리의 이름으로 대표되는 할리우드 여배우의 클리셰를 조롱했다. 사람들은 가정을 인생에서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녀를 두고 ‘마사 스튜어트 워너비’라고 비아냥댔다. 그녀가 1년 전 패션 및 라이프 스타일 사이트 ‘프리저브’를 런칭했을 때 대중의 반응은 “금발 여배우가 왜 이런 사이트를 운영하는 거지?”였다. 호사가들은 그 사이트가 망하기만을 바랐다. 결국 블레이크 라이블리는 지난 9월 말, ‘프리저브’를 잠시 문닫는다고 발표했다. 그녀의 연관 검색어는 샤넬 드레스, 구찌 드레스, 심지어 임신복 패션 등이었다.
영화쪽으로 눈을 돌린다 해도 그녀를 둘러싼 상황이 더 낫다고 할 순 없을 것 같다. <가십걸> 이후 그녀는 영화배우로서 새롭게 자리매김하기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솔직히 출연작들은 그냥 그랬다. 옴니버스 멜로영화 <뉴욕 아이 러브 유>에서는 안톤 옐친의 여자친구로 잠깐 등장하는 게 전부였고 <타운>에서는 기존의 뉴욕 상류층 파티걸 이미지를 바꿔보려고 가슴을 강조한 옷도 입고 촌스러운 화장도 해봤지만 그녀의 부모님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 큰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다. 게다가 그녀는 하필이면 영화 역사상 최악의 슈퍼히어로물 <그린 랜턴: 반지의 선택>에 출연했다. 이 영화에 대해서는 지금의 배우자 라이언 레이놀즈와 만난 계기가 됐다는 것 말고는 특별히 언급할 게 없다. 솔직히 말하면 그녀의 연기가 너무 별로여서 “F-35를 추락시킨 건 그렇다 치고 교전수칙 어기고 날 미끼로 썼잖아”라는 대사마저도 불안해하며 봐야 했다.
이게 끝이 아니다. 더 끔찍한 영화가 남아 있다. 그녀는 올리버 스톤의 졸작 <파괴자들>에서 두명의 젊은 악당들, 테일러 키치와 아론 존슨이 사랑하는 매력적인 여자 O(오필리아의 줄임말)로 등장했다. 여기까지 들으면 대단한 역할인 것 같지만 남성 중심적인 사고 위에서 탄생한 얄팍한 여자 캐릭터의 전형일 뿐이었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그린 랜턴: 반지의 선택> 출연 당시의 머리색에 대해 묻고 <청바지 돌려입기>의 시사회에서 입은 드레스에 대해서만 물었다. 그녀도 말했다. “누구도 나에게 와서 무엇이 잘됐고 잘못됐는지, 왜 그런지 의견을 묻진 않아요.” 그녀는 항상 예뻤고, 그게 문제였다. 남자주인공의 (별 생각 없는) 여자로만 등장했으니까.
리 톨랜드 크리거 감독의 <아델라인: 멈춰진 시간>은 박제된 것처럼 보이는 그녀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영화에서 그녀가 연기한 아델라인 보우먼은 100살이 되도록 늙지 않고 젊은 모습을 유지한다. 우리 같으면 신날 텐데 그녀는 삶의 유한함이 비켜간 자신의 운명으로 인해 괴로워한다. 조금 거창하게 말하면, 영화는 블레이크 라이블리의 변치 않는 아름다움을 통해 시간과 영원의 개념을 탐구하고, 죽음과 비극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쉽게 말하면, 예쁜 것도 무한한 삶 앞에서는 다 소용없다는 것. 블레이크 라이블리의 천진성은 이 영화를 지나치게 심각하게 만들지 않는다. 옆에 앉은 남자친구가 불안에 떨건 말건 간에 과속운전을 즐기는 모습이나, 할머니가 된 딸에게 제발 짜게 먹지 말라고 잔소리를 하는 모습은 블레이크 라이블리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보인다. 무엇보다 그녀는 무척 사랑스럽다. 그간 스스로를 파격으로 몰아넣으면서 연기자임을 증명하려 했던 블레이크 라이블리는 모든 배우가 스스로를 망가뜨리면서 엄청난 연기파 배우가 되지 않아도 된다는 교훈을 이제야 깨달은 것 같다.
졸작들 속에서 블레이크 라이블리가 그나마 매력적이었던 순간은 그녀의 그런 천진성이 드러날 때였다. <파괴자들>에서 그녀는 무시무시한 마약 조직에 납치돼 있는 심각한 상황에서도 겁 없이 이렇게 말한다. “제발 피자 말고 샐러드도 좀 주면 안 돼요? 장소도 좀 깨끗한 곳으로 바꿔주고요.” <그린 랜턴: 반지의 선택>에서 초록색 그린 랜턴이 자신이 알던 할 조던이란 걸 알자 호들갑을 떨며 “그깟 마스크 쓰면 몰라볼까봐? 왜 몸이 녹색이야?”라고 말할 때도 마찬가지다. 비로소 그녀가 (그린 랜턴 의상에 대해 뒷담화를 함께 나눠도 될 것 같은) ‘사람처럼’ 보였다. 레베카 밀러 감독의 <피파 리의 특별한 로맨스>에서 피파의 어린 시절을 연기한 그녀는 두려움 없는 순수한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재현한다. 영화 속 허브(앨런 아킨)가 “아름답지만 그걸 괘념치 않아 하는 모습이 좋다”고 말한 것처럼 자신이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생각하는 무지의 상태가 그녀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한다.
할리우드 여배우의 스테레오타입을 거침없이 깨가는 또래 여배우 크리스틴 스튜어트나 제니퍼 로렌스에 비해 그녀의 행보는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컵케이크 만드는 것과 예쁜 옷을 좋아하는 그녀는 “일과 사랑에 빠져서 내 삶을 만들어나갈 수 있는 멋진 기회를 갖게 돼 행운이라고 생각해요”라고 말하는 타입이다. “<아델라인: 멈춰진 시간>을 보면, 혼자서 영원을 누리는 것보다 소중한 사람들과 사랑하며 유한한 삶을 누리는 것이 진정한 삶이라는 걸 느낄 수 있을 거예요.” 그녀의 이 오글거리는 멘트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건, 클럽 앞에서 정신 나간 모습으로 사진 찍히는 여배우가 아니라 스물다섯살에 결혼해 아이를 낳은 블레이크 라이블리가 한 말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차기작은 우디 앨런의 신작이다. 그녀의 계산되지 않은 순수성이 어떻게 표현될지 자못 기대가 된다. 참, 마지막으로 에이미 슈머에게 할 말이 있다. 블레이크 라이블리는 하루를 코코아로 시작하고 다크 초콜릿으로 마무리할 정도로 먹는 걸 좋아하지만 스웨트팬츠 입는 건 죽기보다 싫어한다는 것. 가능하면 동네 식료품점에 갈 때도 최대한 꾸며 입고 싶다나 뭐라나.
충동적이며 신비로운 피파
만약 블레이크 라이블리가 지금껏 출연한 작품 중 꼭 DVD를 사야 한다면 유일하게 구매할 만한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순진하고 충동적이며 신비로운 피파를 연기한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피파가 엄마(마리아 벨로)와 충돌하는 모습이다. 각성제에 중독된 엄마에게 자신이 그녀를 이해한다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피파는 각성제를 입안 가득 털어넣고 엄마에게 사랑해달라고 애원한다. 이때 둘 사이에 흐르는 사랑과 증오의 불편한 기류들은 블레이크 라이블리가 한심한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나왔다는 사실도 잊게 만든다. 물론 그녀는 피파에 대해 다소 상투적으로 이렇게 말했지만 말이다. “저는 비극적인 인물들에 매료돼요. 공감이 가기 때문이에요. 그런 성장 배경에도 올바른 결정을 내리려고 애쓰지만 완전히 잘못된 일을 저지르는 사람,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는 사람의 심리를 이해하고 싶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