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
[영화제] 애니를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쾌락
2015-10-21
글 : 송효정 (영화평론가)
제17회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10월23일부터 27일까지
제17회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보다 강력하게 진화했다. 17회를 맞은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BIAF)은 그동안 학생경쟁 영화제로 이어져오던 것을 올해부터 학생 포함 일반경쟁 영화제로 외연을 확장, 명실상부 아시아 최대의 애니메이션영화제로서의 입지를 단단히 하게 되었다. 2015년 BIAF에서는 총 35개국 160편의 작품이 경쟁부문 및 초청부문에서 상영될 예정이다. 영화제의 시작은 <에이프릴과 조작된 세계>가 화려하게 장식한다. 이 작품은 올해 안시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에서 최고장편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여류 우키요에 화가 호쿠사이를 조명한 <백일홍: 미스 호쿠사이>와 한국적 괴담을 코믹 호러물로 풀어낸 <솔로탈출귀>는 대표적 아시아 장편애니메이션이다. 폴란드 정치난민의 실화를 다양한 애니의 기법으로 시적으로 풀어낸 앙카 다미안의 <매직 마운틴>을 비롯해 현대 미국 문화를 극단적 부감숏의 미니멀리즘적 스타일로 보여주는 <에덴의 끝>은 동시대 애니메이션의 양상을 드러내는 작품들이다. 총 38편이 치열한 경쟁을 펼치는 단편부문의 진용도 화려하다. <우주를 향한 꿈>은 러시아의 우주개발국을 배경으로 두 남자의 우정을 다룬다. <발자국>은 미국 인디 애니의 거장 빌 플림턴의 강력한 개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마왕>은 예술로서의 애니메이션이 전달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경험을 선사할 필견의 작품이다. <헤어컷> <피그>는 세계의 잔혹성을 드러내는 섬뜩한 감성을 전달한다. 복고적 이미지를 활용하여 아련한 노스탤지어를 전달하는 중국 애니 <제비>나 세계의 비애와 모순을 품으면서도 따뜻한 인간애를 잃지 않는 <엘만도> <심야버스 2011>도 눈에 띈다. 온정적인 세계의 조화로움에서부터 폭력적이고 불가해한 세계의 비의를 드러내는 작품까지, 애니메이션을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쾌락을 맛보시라.

개막작

<에이프릴과 조작된 세계>

크리스티앙 데마르, 프랑크 에킨시 / 프랑스

지상에는 증기기관차, 하늘에는 비행선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두개의 에펠탑. <에이프릴과 조작된 세계>는 1931년의 프랑스를 산업혁명 시대로 재구성한 스팀펑크 SF다. 프랑스의 저명한 작가 자크 타르디의 그래픽노블을 원작으로 하였다. 불멸의 에너지를 개발하려는 과학자 부모가 납치되자 어린 딸 에이프릴은 고아가 된다. 그녀는 말하는 고양이 다윈과 함께 부모의 연구를 10년간 은밀히 이어가며, 과학자 납치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조작된 세계의 음모 속으로 뛰어든다. <페르세폴리스>(2007)의 제작사인 프랑스의 JSBC가 6년의 시간을 들여 공들인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산업화 시대의 도시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매혹적 이미지로 가득하다.

<백일홍: 미스 호쿠사이>

추천 장편

<솔로탈출귀>

전용석 / 한국

심령술 동아리 MT에 참석한 정훈은 후배 은지에게 고백하려던 참에 우연히 처녀귀신을 만나게 된다. 솔로 복학생과 처녀귀신의 생사를 초월한 요절복통 인연을 다룬 <솔로탈출귀>는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 전용석 감독의 신작 장편이다. 작품은 한국의 고전괴담과 도시기담을 한껏 활용하였다. 귀신을 만나면 가슴이 쿵쾅거리고 빙의가 되기 위해서는 귀신과 인간이 혼연일체가 되어야 한다. 이런 설정은 실상 우리가 첫사랑에 빠지게 되는 과정과 많이 다르지 않다. 호러, 판타지, 로맨스 장르가 뒤섞인 유쾌한 혼성장르 애니로 맘 편히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백일홍: 미스 호쿠사이>

하라 게이이치 / 일본

호쿠사이는 <가나가와의 거대한 파도>와 같은 그림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실존 우키요에 화가다. 스기우라 하나코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화가 호쿠사이의 딸에 초점을 맞춰 여성 예술가의 내밀한 삶과 에도의 풍요로운 일상사에 초점을 맞추었다. 풍속화, 불화, 에로틱한 춘화 등 다양한 일본화에서부터 19세기 초반의 에도의 거리 풍경까지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감독 하라 게이이치는 이 작품으로 올해 안시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수상하였다.

<팬텀보이>

알랭 가뇰, 장 루프 펠리시오리 / 벨기에, 프랑스

11살의 소년 레오에게는 비밀이 있다. 그는 사실 은밀한 영웅 ‘팬텀보이’다. 병으로 고통받는 소년 레오는 육체에서 영혼을 이탈시켜 도시의 하늘을 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어느 날 흉포한 마스크 악당이 악성 바이러스를 유포해 도시를 혼란에 빠뜨린다. 레오는 악당에게 부상을 입은 불운한 경찰 알렉스를 병원에서 만나 그와 친구가 된다. 알렉스는 여기자 마리와 함께 레오의 도움으로 마스크 악당에 맞서 그의 음모를 무력화시킨다. 고통에 맞서는 병약한 아이의 소망이 동화적 상상력과 맞물린 감동적 애니메이션이다.

<마왕>

추천 단편

<마왕>

조지 슈비츠게벨 / 스위스

말 탄 아버지는 아이를 품에 안고 숲을 달린다. 사경을 헤매는 아이는 매혹이자 공포의 대상인 마왕의 환영을 본다. 정원과 놀이터, 화려한 의상으로 유혹하는 마왕에 현혹되어 다가가면 어느새 그는 죽음의 얼굴을 하고 있다. 마티스를 연상시키는 강렬한 색감의 원화, 역동적으로 이어지는 이미지, 분절되고 뒤바뀌는 시점, 이미지에 강하게 동기화된 음악, 삶과 죽음의 사투라는 근원적인 주제가 탄탄하게 엮인 수작이다.

<까마귀 이야기>

세리즈 로페즈, 아그네스 파트론 / 프랑스

실사와 애니를 조합해 만든 <까마귀 이야기>는 한편의 잔혹극이자 블랙코미디다. 상반신은 까마귀지만 하반신은 인간인 철연의 편력은 잔혹한 컬트적 여정으로 점철된다. 혹독한 추위로 얼어붙은 세계는 선량한 동물들의 세계가 아니다. 괴기스러운 거인, 사악한 피조물들, 숲의 원령들이 출몰하는 고요하고도 잔혹한 카니발리즘적 세계다. 주술과 마력으로 가득한 지옥을 경유하는 듯 작품이 주는 감성적 충격이 꽤나 강렬하다.

<줄줄이 꿴 호랑이>

브누아 슈 / 프랑스

게으르지만 똑똑한 꼬마 아들은 허구한 날 집에서 먹고 싸는 게 일이다. 엄마의 잔소리가 심해지자 아들은 깜찍한 꾀를 부려 사방천지의 호랑이들을 사냥하여 부자가 된다. 그리고 다시금 무위도식의 낙천적 나날이 이어진다. 권문희 작가의 한국 전래동화 그림책을 애니메이션으로 각색한 작품으로, 원작이 지닌 여백의 아름다움을 경쾌한 리듬감에 엮어냈다. 건강하고 낙천적인 웰메이드 애니메이션이다.

<낯선 오후의 정경>

레아 비다코비치 / 크로아티아

크로아티아에서 온 이 섬세하고 감성적인 스톱모션애니메이션은 대사없이 고적한 오후를 보내는 네 사람을 번갈아 보여준다. 마치 자연광인 양 섬세하게 조율된 빛의 세계는 살짝 내려앉는 먼지까지 감지될 정도로 민감하게 구성되었다. 사랑, 상실, 사색, 자멸에 대한 느리고 암시적인 이미지들로 가득한 매혹적인 작품으로, 손끝의 주름, 깨진 도자기 파편에 이르기까지 격조 높은 장인정신으로 완벽하게 통제되었다.

<리좀>

보리스 라베 / 프랑스

작품은 단조로운 반복에서 시작하여 예측할 수 없는 광대한 복잡성으로 변이해간다. 없음에서 있음으로, 질서에서 아나키로 끊임없이 증식해가는 모형들의 행진은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밋밋한 기하학적 도형인가하면 괴물 같은 유기체적 형상 같기도 하다. 이종 교배된 기괴한 이미지들이 만들어내는 만화경적 이미지는 자칫 무의미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거대한 행진은 생명의 진화 혹은 문명의 연대기를 보는 듯 엄청난 압도감을 선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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