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베테랑>에서 황정민이 내뱉은 저 대사는 부산국제영화제 강수연 공동집행위원장이 실제로 했던 말이다. 오래전, 류승완 감독이 한 영화인 모임에 참석했다가 강수연이 한 말이 재미있어 대사로 활용한 것이다. 저 대사만큼 강수연 위원장이 올해 영화제에 임하는 각오를 잘 표현해주는 말이 있을까 싶다. 지난해 <다이빙벨> 상영 때문에 부산시와 갈등을 겪어오다가, 지난 7월6일 열린 부산영화제 조직위원회 임시총회에서 공동집행위원장으로 위촉된 그녀다. 강수연은 영화제 초창기인 1998년부터 지금까지 영화제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며, 국내외 영화인과 영화제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부산으로 내려가기 일주일 앞둔 지난 9월14일, 부산국제영화제 서울사무실에서 강수연 공동집행위원장을 만났다. 영화제를 코앞에 둔 까닭에 강수연은 “무척 떨린다”고 말했다.
-오전에 서울극장 고은아 사장(서울극장 고 곽정환 회장의 아내)이 부산국제영화제에 1억원을 기부했다. 알고 있었나.
=얘기는 미리 들었다. 감동적이었다. 고은아 대표님뿐만 아니라 국내외 많은 영화인들이 자발적으로 도와주셨다.
-고은아 대표와는 평소 가까운 사이였나 보다.
=어릴 때부터 연기를 했는데 <비둘기의 합창>(1978), <어딘가에 엄마가>(1978) 등 여러 영화에 모녀로 함께 출연했다. 그래서 고은아 선배님을 “엄마, 엄마” 하고 부르며 따라다녔던 기억이 난다.
-고은아 대표를 포함한 많은 영화인들이 자발적으로 부산국제영화제에 힘을 보태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아마도 그건 그동안 부산국제영화제가 한국 영화산업에 기여해온 것들을 인정하고, 앞으로 계속 존재해야 하는 필요성을 공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곧 영화제 개막이다. 실감이 나나.
=매일 정신없다. (웃음) 일주일 일과가 어떻게 되냐고? 업무를 파악하는 데 정신이 없어서 아직 일과라고 할 만한 게 없다. 곧 부산에 내려가 영화제가 끝날 때까지 있어야 하고.
-연기가 아닌 일을 하는 건 이번이 처음 아닌가.
=언제나 배우였으니까. 영화제 일은 뜻도 없었고, 맡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직 영화제가 시작되기 전이지만 영화제 조직에 합류해보니 어떤가.
=영화 현장하고 비슷하게 돌아가는 것 같다. 업무량이 방대해 일과가 규칙적이지 않은 것도, 일 중심으로 일과가 돌아가는 것도, 출퇴근 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다. 아니, 퇴근은 아예 못하고. (웃음)
-그래서 금방 적응했겠다.
=뭐, 아직 적응이라고는 할 수가 없는 게 그동안 해왔던 일과 많이 달라서 생소한 일이 많다. 많이 낯설다.
-부산국제영화제로부터 처음 공동집행위원장직을 제안받았을 때 어땠나.
=공동집행위원장이라는 자리가 필요가 없을 정도로 지금까지 너무나 잘해오지 않았나. 처음에는 당연히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를 거쳐 지금까지 어려움을 겪는 과정에서 영화제에 합류하는 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맡는 게 순리라고 생각했다.
-구원투수로서 합류하는 게 부담스럽진 않았나.
=지난 20년 동안 영화제 운영이 문제가 많거나 형편 없었더라면 합류할 이유가 없었겠지. 하지만 지금 영화제가 어려움을 겪는 건 그것 때문인 게 아니잖나. 그동안 평탄하게, 성공적으로 잘 성장해왔으니까 합류 자체에 큰 부담은 없었다. 하지만 연기가 아닌 일은 전혀 익숙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 20주년을 잘 치러야 하고, 여러 어려운 상황들도 돌파해야 하는 현재, 이같은 중책을 맡은 건 너무나 부담스럽다. 안 해봤던 일을 해야 되고, 책임을 감당해야 하니까.
-공동집행위원장을 수락했을 때 가족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나.
=처음에는 만류했다. 가족들은 ‘영화제가 좋을 때 하면 좋을 수 있지만, 힘든 시기에 맡게 되면 안 좋을 수도 있지 않겠냐’며 걱정했다. 반대로 영화인들은 ‘부산영화제가 힘드니까 네가 해라’ 그러고. (웃음) 임권택 감독님께서는 ‘영화제가 이렇게 힘드니 널 필요로 한다면 맡는 게 좋지 않겠냐’라고 직접적으로 조언해주셨고.
-공동집행위원장이 되고 난 뒤 조직과 업무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을 것 같다. 지난 20년 동안 집행위원으로서 영화제에 참석한 것과 공동집행위원장으로서 조직을 바라보는 것과는 시각이 다를 것 같다.
=그동안 언제나 손님이었다. 영화제가 어떻게 운영되고, 어떤 작품들이 상영되는지 다 알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손님을 맞아야 한다. 영화제의 기본적인 일을 포함한 모든 것을 파악해야 업무를 볼 수 있다. 그게 가장 큰 차이인 것 같다.
-첫 출근 날은 기억나나. 어떤 생각을 했나.
=기억나는데, 아무 생각이 없었다. (웃음) 물론 영화제 식구들을 오랫동안 봐왔기 때문에 어색한 건 없었다.
-이용관 집행위원장과 역할 분담은 어떻게 하기로 했나.
=그전에도 여러 자리에서 말씀드렸는데 공동집행위원장이라는 자리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예전에 김동호 명예집행위원장님과 이용관 집행위원장님께서 함께 공동 체제를 꾸리기도 하셨다. 두분께서 그랬듯이 이번에도 이용관 집행위원장님과 함께 여러 일들을 해나갈 생각이다. 혼자서 절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강수연을 잘 아는 해외 영화인들의 반응은 어떤가.
=많은 분들이 반가워해주셔서 감사하긴 하다. 그게 단순히 좋아할 만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당장 올해 영화제를 잘 꾸려야 한다. 지금으로선 첫째도, 둘째도 그 생각뿐이다. 사실 매년 영화제에 크고 작은 말들이 많았다. 이번 일을 계기로 5년 이상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 어떤 외부의 압력에도 흔들리지 않는, 내실을 강화할 수 있는 방법을 심도 깊게 논의하고 고민했으면 좋겠다.
-얼마 전 열렸던 기자회견에서 “앞으로도 어떠한 정치적 검열과 외압, 각 자국 법적 조치에 상관없이 영화의 예술적 완성도만으로 상영 여부를 판단할 것”이라고 말했다.
=당연한 얘기가 아닌가. 부산국제영화제가 20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이렇게 큰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건 어떤 상황이 닥쳐도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영화적 완성도와 예술성만으로 판단해 상영했던 덕분이다. 재능 있는 신예를 발굴하고, 영화제를 내실 있게 운영하지 않는다면 누가 부산을 찾겠나. <다이빙벨> 상영으로 인한 정치적 외압이 왜 올해 일어났는지, 그게 왜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다. 그전에는 훨씬 더 복잡하고 어려운 일들이 많았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소재를 다룬 영화를 부산에서 공개했다는 이유로 자국에서 상영 금지된 적도 많았고. 세월호 참사는 전 국민을 슬프게 한 사건이지 않았나. 그토록 큰 슬픔을 다룬 영화가 안 나오겠나. 그런 영화가 없는 게 이상한 사회가 아닌가. 아직도 임진왜란을 다룬 영화가 나오고 있는데 말이다.
-제2, 3의 <다이빙벨> 사태가 벌어져도 부산은 지난해와 같은 선택을 할 것인가.
=영화가 어떤 작품인가가 중요하지, 영화가 다루는 소재는 아무런 문제가 될 게 없다. 부산국제영화제는 영화의 예술성을 함께 감상하고 얘기를 나누는 영화제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제는 소신을 가지고 일을 해야 된다.
-김지석 수석프로그래머가 “가오 있게 준비했다”고 얘기한 만큼 올해 영화제 라인업과 게스트는 그 어느 때보다 탄탄하고 화려하다.
=다른 분들 생각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20’이라는 숫자에 큰 의미를 부여하진 않는다. 18회도, 19회도, 앞으로 100회도 모두 중요하니까. 하지만 올해는 여러모로 힘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스탭들이 일심단결해서 영화제를 치열하게 준비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굉장한 것 같다. 그런 절실함이 올해 영화제를 잘 치러내기 위한 큰 힘이 되고 있는 것 같다. 올해 프로그램을 둘러보니 정말 열심히, 잘 준비한 것 같지 않나. (웃음)
-올해 부산을 찾는 게스트 중 특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나.
=한두명이 아니다. 영화제가 힘들다는 소식을 들은 많은 해외 영화인들이 앞다퉈 부산에 오겠다고 자청해준 건 정말 감동적이었다.
-강수연 하면 술자리를 빼놓을 수 없다. 김동호 명예집행위원장님께서 해외 게스트와 함께 포장마차에서 매년 술을 마시듯이 올해는 공동집행위원장으로서 그런 역할을 하게 될 것 같다.
=좋은 친구와 편안한 자리에서 술을 마시면 맛있지만, 호스트가 되어 손님들을 모시는 자리에서 먹는 술은…. (일동 폭소) 술맛 나는, 좋은 만남이 많길 기대하고 있다.
-체력 관리를 잘해야겠다.
=게스트로 부산을 찾았을 때는 밤늦게까지 술자리를 지키는 게 가능했지만 올해는 아침부터 업무가 있기 때문에 밤늦게까지 술자리를 지킬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지난 20년 동안 집행위원으로서 영화제에 참석하면서 많은 추억이 쌓였을 것 같다. 어떤 추억이 기억에 가장 남나.
=부산영화제가 관객에게도 좋은 추억이 있는 영화제지만, 영화인들에게도 많은 의미가 있다. 국내외 많은 영화인들이 한자리에 모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1회 때는 그게 가능할까 싶었는데 잘 치르고 나니 오랫동안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우 강수연에게 건네는 질문도 하고 싶다. 김동호 위원장이 연출했던 단편영화 <주리>(2013) 이후 출연작이 뜸하다. 어떤 작품에 출연할지 기다리고 있다.
=나만큼 기다리겠나. (웃음) 영화를 아역 때부터 했잖아. 아역 시절에서 청소년 시절로 넘어가는 시기에 많이 힘들었다. 작품도 많이 안 들어왔고, 자아가 생성되던 시기였는데 나름 잘 넘어간 것 같다. 청소년 시기에서 성인 연기자로 넘어가는 시기도 아주 혹독하게 겪었다. 지금은 중년에서 노년으로 넘어가는 것을 해야 하는데, 이런 전환기를 처음 겪는 배우라면 힘들어했겠지만, 과거 여러 차례 비슷한 경험을 해보니 지금은 덜 힘든 것 같다. 나이를 더 먹었을 때 관객에게 편안한 배우로 다가갔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바람을 가지고 있다.
-그런 변화를 서두를 필요는 없으니까.
=그럼. 서두른다고 좋은 역할이 오는 것도, 안 서두른다고 안 오는 것도 아니니까. 지금 변화를 자연스럽게 몸으로 익히고,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할머니 강수연’, ‘아줌마 강수연’도 매력적일 것 같다.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안 들어오지. (웃음) 멋진 아줌마가 되어야 할 텐데. 하하하. 할머니까지 연기해야지.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라는 <베테랑>의 대사가 강수연이 한 말로 많이 회자되고 있다. 알고 있나.
=그 말 한 지 꽤 오래됐다. 영화인들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재미있으라고 한 얘기인데 류승완 감독이 정말 재미있게 들었나보다. 아이고, 부끄러워라. (웃음) 어쨌거나 당장은 개막 전까지 잘 준비해서 영화제를 잘 치러내는 일 말고는 떨리는 게 없다. 발전된 모습을 보여야 하니 벌써부터 걱정이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