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온도>(2012)보다 이 작품이 더 노덕 감독님 스타일에 가까운 것 같아요.” <특종: 량첸살인기>(이하 <특종>)의 주연을 맡은 배우 조정석의 말이다. 이에 대한 노덕 감독의 보충 설명을 들으니 홍보성 멘트만은 아닌 것 같다. “내가 꿍한 성격이 못 된다. (웃음) <연애의 온도>는 미묘하고 작은 것들에 티격태격하는 두 남녀를 그린 작품이었는데, 내가 그런 성격이 아니다보니 촬영하면서도 불안한 마음이 컸다. 이번 영화는 사건이 주가 되는 영화라 좀더 즐기면서 촬영했는데 정석씨에게도 그런 내 모습이 보였나보다.” 한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걷잡을 수 없이 큰 사건에 휘말리게 된 한 남자의 뒤를 쫓는 <특종>은 ‘스토리텔러’ 노덕 감독의 재능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데뷔작으로 너무도 현실적인 로맨스영화(<연애의 온도>)를 만들다보니 극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혔다는 노덕 감독은 시원시원하고 거침없는 그녀의 성격을 똑 닮은, 두 번째 장편영화를 내놓았다.
-기자가 주인공인 영화의 개봉을 앞두고 수많은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는 기분이 묘할 것 같다.
=나보다 기자분들이 좀 남다른 기분으로 인터뷰 장소에 와주시는 것 같다. 영화에 우리가 알고 있는 실제 매체들이 등장하고, 또 기자의 직업 윤리에 대한 묘사도 있다보니 한편으로는 일반 관객보다 더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부분이 있는 것 같더라. 일반 관객을 대상으로 블라인드 시사를 진행한 적 있는데, 관객은 기자라는 직업보다는 허무혁(조정석)이라는 한 남자의 드라마를 따라가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 기자분들이 느끼는 뾰족한 부분들이 아마 관객에겐 더 깎여서 전달 되지 않을까 한다.
-<특종>은 <연애의 온도>보다 먼저 준비하던 프로젝트였다고 들었다. 다시 영화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어떤 것들이 바뀌었나.
=중간에 다양한 버전이 있었지만 결국은 처음 쓰던 시나리오와 거의 비슷한 내용으로 가게 됐다. <특종>의 시나리오를 굉장히 오래 썼다. 무혁이 진짜 살인범과 만나게 되는 장면을 쓰기까지 3개월이 걸렸는데, 그 장면부터 엔딩까지 고작 20, 30장밖에 되지 않는 장면을 놓고 몇년 동안 고민을 한 거다. <특종>은 누구라도 살아가며 당면할 수 있는 진실과 거짓말의 경계에서 한 남자가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다. 과연 이 이야기가 어디까지 나아가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진실이란 무엇인가, 진실이라서 우리가 믿는 걸까, 아니면 우리가 진짜라고 믿는 것들이 진실로 명명되는 것일까. 결국 진실에 대한 약간의 힌트를 주는 선에서 이 영화는 마무리된 것 같다.
-이야기를 구상하게 된 최초의 출발 지점이 궁금하다.
=가장 처음에는 이야기의 원형이 있었다. ‘양치기 소년’ 이야기가 <특종>의 원형이다. 사실 <연애의 온도>를 만들면서 감정적으로 소모가 컸다. 현실적인 멜로를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인물에 푹 빠져 시나리오를 쓰다보니 그 현실적인 감정에 내가 소모되는 듯한 느낌이 든 거다. 그래서 현실과 다소 거리가 있는, 극적인 영화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고 ‘양치기 소년’ 아이템을 좀더 극적으로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했다. 재기발랄하고 영화적인 이야기를 하며 지쳐 있던 나를 치유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실제로 만들고 나니 어떤가. 치유가 된 느낌인가.
=확실히 인물에 너무 몰입해 있던 나를 꺼내오는 계기는 됐다. 그리고 영화를 접근하는 방식도 많이 달라졌다. <연애의 온도>는 인물에 집중했다면, <특종>은 상황이 중요한 영화다. 그래서 전작보다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면서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에 정서적인 면에서는 도움이 많이 된 것 같다.
-<특종>은 연쇄살인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범인이 살인을 저지르는 장면은 단 한번, 오프닝 신에서만 보인다.
=이 영화는 연쇄살인범을 다루는 스릴러도, 기자라는 직업을 다루는 작품도 아니다. 허무혁이라는 진실과 거짓말의 기로에 서 있는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그래서 연쇄살인이라는 코드를 관객이 놓치지 않을 만큼만 배경으로 깔아주자는 생각이었다. 또 살인 장면을 오프닝 신에 넣은 건 다른 의미도 있었다. <특종>의 형식을 통해 의외성을 시도해보고 싶었다. 관객의 예상을 어느 지점으로 몰아간 뒤 그 지점을 빗나가고, 또 그 지점을 빗나가는 전개. 이 의외성이 <특종>을 가장 재미있게 보는 방식이 아닐까 생각했다. 오프닝신은 이 의외성을 위한 장치였다.
-시력이 좋지 않은 여자가 안경을 쓴 뒤 비로소 살인 장면을 보게 된다는 아이디어가 좋더라.
=시나리오를 쓰다보면 그런 순간이 있다. 생각하는 대로 쓰는 게 아니라 손이 가는 대로 쓰게 되는 순간 말이다. (웃음) 그렇게 쓰게 된 장면이다.
-무혁은 <량첸살인기>라는 한 중국 소설의 내용을 연쇄살인범이 쓴 일기로 오인한다. 그런데 왜 하필 중국 소설이었나.
=<량첸살인기>가 실존하지 않는 가상의 소설이지만 영화에서는 이미 존재하는 책으로 표현이 되잖나. 관객이 실제로 존재하는 책일까 헷갈릴 만큼의 현실성을 주고 싶었다. 솔직히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중국 소설은 아직 신비로운 영역이라서. (웃음) 처음에는 영미권 소설로도 해보려고 했는데, 관객이 영미권 소설은 잘 아니 너무 대충 만든 티가 날까봐 아직까지 신비로움을 간직하고 있는 중국 소설로 설정했다.
-무혁의 직업이 주가 되는 영화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기자라는 직업의 개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을 법하다.
=사실 무혁의 직업을 기자로 선택한 것은 진실과 거짓말의 기로에서 가장 갈등할 만한 인물이 누구일지 생각했을 때,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는 직업이 기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기자라는 직업군의 특별함을 내세우기보다는 묵묵하게 자기 할 일을 하는 보통의 현대인을 보여주자는 생각이 컸다. 무혁이 처한 상황이 너무 특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남들과는 다른, 독특하고 유별난 사람이 이상한 상황 속에 처하면 관객이 따라가기 어렵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있었다. 그보다는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사람이 특수한 상황에 놓였을 때, 그 상황이 사람을 어디로 이끌어가는지 보여주고 싶었기에 기자라는 직업의 특수성을 많이 배제하려고 노력했다. 가장 일반적인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다.
-<량첸살인기>를 모티브로 한 연극을 보며 복잡미묘한 표정을 짓는 장면에서 조정석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이제 한국에서 난처한 표정을 가장 잘 짓는 배우를 생각했을 때, 그의 이름을 떠올릴 법도 하다.
=정석씨가 어떤 캐릭터나 상황을 표현하기 위해 일부러 과장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그 점이 정말 좋았다. 자연스럽게 자신이 닥친 상황을 받아들이면서도 표현력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고 그래서 꼭 한번 같이 일해보고 싶었다. 무혁이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리는 장면을 롱테이크로 보여주자는 건 처음부터 계획하고 있었다. 더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나. 그가 당혹스러워하는 모습에만 집중하자는 마음으로 찍었는데 정석씨가 연기를 너무 잘해서 현장에서도 많이 웃었던 장면이다.
-이 영화에는 유독 군중숏이 많다.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다니거나 한 화면에서 정신없이 움직이는 장면이 많은데, 특별한 의도가 있나.
=영화 속 기자들의 역할이 일종의 군중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그들도 무혁처럼 어느 매체에 속해 소식을 전하는 입장이지만, 무혁에게서 정보를 듣고 여기저기서 소식을 들은 다음 그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판단하는, 여론이나 군중을 대변하는 사람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특종>에서 기자들은 어떻게 보면 이야기의 주체가 되는 한편 정보를 듣고 해석하는 군중의 입장도 있는 것 같다.
-<특종>을 보고 나면 한마디로 장르를 규정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스릴러, 드라마, 코미디가 뒤섞여 있다.
=솔직히 장르에 대한 고민은 많이 안 했다. 그보다는 ‘톤’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시나리오를 먼저 읽은 분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더라. 이 작품을 스릴러로 본 분들이 가장 많았고 코미디로 읽은 분들은 소수였는데, 만든 사람 입장에서 장르를 규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영화를 다 만들고 나서 이 작품이 코미디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영화의 결론이 아이러니로 남는 게 이 작품에는 중요했고, 어떻게 보면 <특종>은 그 아이러니를 위해 달려가는 이야기니까. 아이러니한 하나의 해프닝, 하나의 소동극이 되려면 코미디가 가장 적절한 장르가 아닌가 생각한다.
-현장에서 별명이 ‘노 코엔’이었다고.
=클로즈업 안 찍고, 카메라 픽스에 무빙도 별로 없고, 풀숏으로 드라이하게 찍는다고. (웃음) 무슨 소리들인지. 클로즈업 안 찍으면 코엔이야? (좌중 폭소) 클로즈업을 거의 쓰지 않은 건 이 영화의 화법을 위한 용기이자 결단이었다. 인물에 주목하기보다는 조금 떨어져 그를 지켜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느낌을 주고 싶어서다. 그래서 촬영감독님이 정말 이 장면에서 클로즈업 안 찍어도 되냐고 물어보실 때마다 안 쓰겠다고 했다. 찍으면 나중에 편집 과정에서 쓰게 될까봐. 그랬더니 어느새 현장에서 ‘노 코엔’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웃음)
-<연애의 온도>와 제작자가 같다. 한재림 감독과 뱅가드 스튜디오의 김선용 대표. 이들과의 인연이 궁금하다.
=두분과의 역사가 길어서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우선 이 두분은 <연애의 온도>와 <특종>으로 함께 얽혀 있던 인연인데, 두편 모두 처음에는 차례로 엎어지는 경험을 했다. <연애의 온도>에 이어 <특종>까지 엎어지고 나서 김선용 대표님이 내가 심적으로 너무 지쳐 있으니, 다른 작품을 또 개발하기보다는 <연애의 온도>를 다시 준비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말씀해주셔서 그 영화가 나올 수 있게 된 거다. 한재림 감독님은 내가 <연애의 온도>를 준비할 때에는 <관상>(2013)을 찍고 계셨기에 실질적인 업무는 제작사 뱅가드스튜디오에 맡기고 이번 영화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도와주셨다. 감독들이 제작자에게 바라는 게 뭔지 정확히 알고 계시더라.
-그게 뭔가.
=감독이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들게 해주는 것. 간혹 가다가 기존의 입장과 태도를 바꾸거나,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감독을 케어해주지 못하는 제작자도 있잖나. 한 감독님은 내 선택을 지지해주고 감독으로서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많은 도움을 주셨다. 영화적 조언보다는 묵묵하게 지켜봐주시고 내가 하는 선택들에 지지와 응원을 해주셨다는 점에서 큰 힘이 되더라.
-단편 <마스크 속, 은밀한 자부심>부터 <연애의 온도> <특종>까지, 당신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그 선택에 따른 결과를 들여다보는 게 당신의 작품을 아우르는 관심사가 아닌가 싶다.
=나도 몰랐는데, 지금 얘기를 들어보니 그런 것 같다. 내가 선택의 기로에 놓인 어떤 한명을 쭉 따라가는 이야기를 좋아하나보다. 그런 걸 취향적으로 좋아하는 것 같다.
-더불어 당신의 영화에는 뭐랄까, 낯 간지러운 부분이 없다는 생각도 든다.
=앞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더라도 낯 간지러운 장면은 없을 거다. 내 성격이 그렇다. 평소의 인간관계에서도 간지러운 말이나 행동을 잘 못하는 편이다.
-<연애의 온도>와 <특종>은 상당히 오랜 시간 준비해온 프로젝트다. 이제 어떤 작품을 기대할 수 있을까.
=내게도 뭔가 새로운 장이 열린 기분이 든다. 개인적으로 <연애의 온도>와 <특종>은, 만들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생각을 했었다. <특종>을 찍고 나서야 완전히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염두에 두고 있는 아이템은 몇 가지 있는데, 전하는 감정이나 메시지는 다르지만 생각해보니 아이템마다 한 사람으로부터 출발하는 이야기다. 내 관심사가 그런 면에 있었구나 오늘 새삼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