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션> 그리고 <팀 버튼의 화성침공>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스파이 브릿지>는 뉴욕의 어느 방에서 거울을 보며 자화상을 그리는 남자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이내 우리는 루돌프 아벨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아마추어 화가(마크 라일런스)가 간첩 혐의로 미국 정보국에 쫓기고 있음을 알게 된다. 스필버그 감독이 선택한 첫 숏은, 그가 작품을 다수 소장하고 있는 미국 일러스트레이터 노먼 록웰의 <삼중 자화상>을 즉각 연상시킨다. 그림에 포착된 찰나의 앞뒤까지 상상하게 만드는 스토리텔링 능력과 완벽한 구도로 유명했던 노먼 록웰과 감독 스필버그 사이의 유사성을 찾아내긴 어렵지 않다. 영화 내내 구체적 정보가 주어지지 않는, 미스터리에 가까운 인물이 그리는 본인의 초상으로 이야기를 연다는 착상도 적절하다.
10/12
뒷줄에 앉은 덕택에 극장 안 관객의 흔쾌한 몰입을 체감했다. <마션>은 바로 앞 <카운슬러>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과 견주어보면 리들리 스콧 감독의 극적인 선회다. 곰곰이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랜 세월 스타일리스트로 불렸지만, 리들리 스콧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수작과 태작을 가르는 변수는 결국 시나리오의 좋고 나쁨인 걸까? (인터넷 무비 데이터베이스에 의하면 리들리 스콧 감독이 각본을 쓴 영화는 초기 단편 한편뿐이다.) 그보다 <마션>이 일깨운 부차적인 궁금증은, 우리가 감독의 비전이라고 여겨온 세계관이나 정서도 어쩌면 각본에 충실한 결과가 컸던 게 아니었나 하는 질문이다. 그의 <에이리언>은 우주를 탁한 심연으로 인식하게 만든 염세적 SF였고 프리퀄에 해당하는 <프로메테우스> 역시 결국 인류를 기다리는 것은 무(無)일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징그러움으로 질척하고 컴컴했다. 두 영화는 태양계 저쪽에, 인간의 뿌리에, 심지어 우리 뱃속에 무엇이 웅크리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괴담이었다. <마션>은 거의 모든 면에서 정반대인 우주영화다. 3D 상영에서 효과 만점인 자갈 폭풍 장면을 제외하면 근작 <프로메테우스>와도 공통점이 거의 없다. 화성에 사는 ‘에일리언’이 카메오 출연하는 일도 물론 없다. 유머를 그닥 챙기지 않던 리들리 스콧 감독치고는 놀랍게도, <마션>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와 더불어 21세기 들어 가장 유쾌한 할리우드발 SF영화래도 과언이 아니다. 워낙 앤디 위어의 원작 소설이 명랑하기도 하지만, 각본가를 따라가면 납득할 만한 ‘족보’가 짚인다. 각색자 드루 고다드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고문 격으로 활약한 조스 웨던과 영화 <캐빈 인 더 우즈>와 미국 드라마 <버피 더 뱀파이어 슬레이어>에서 함께 작업한 바 있다.
태평양 어디쯤의 무인도도 아니고 4년 후에야 다음 우주선이 도착할까 말까 한 화성에 낙오된 암담한 이야기를 밝게 둔갑시키는 특수효과는 주인공의 이례적 성격이다. 식물학자 겸 엔지니어로 화성 탐사에 참여한 마크 와트니(맷 데이먼)는 말도 안 되게 낙천적이다. 그의 성격과 행동이 광원이 되어 미 항공우주국의 인물들을 움직이고 나중에는 스크린 밖 관객을 포함한 ‘위 아 더 월드’의 물결을 스리슬쩍 이뤄낸다. 만약 나였다면? 도모할 만한 가장 진취적인 일이라곤 문법에 맞는 유서를 쓰고 최소량의 고통으로 생을 마감할 계획을 짜는 것이 고작이었을 거다. 소설로는 다소 비현실적으로 읽히는 마크의 꺾이지 않는 긍정성은, 평범하면서도 내구력이 강하고 지적이면서도 실없는 구석이 있는 배우 맷 데이먼의 페르소나와 만나 영화에서는 훨씬 그럴싸해 보인다. 맷 데이먼의 마크 와트니가 보유 식량으로 연명 가능한 시간을 계산하면서 간식을 우적우적 먹어치우는 장면은 백 마디 말보다 캐릭터를 잘 요약한다. 이 남자는 걸어다니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이다. 말로만 듣던 “사막에 데려다놔도 전갈과 사귀며 살아남을” 인간이다. 생존은 물론 당면한 고역 속에서 즐길 거리를 기어이 찾아낸다는 의미다. 여기서 원인과 결과는 자리를 바꿔도 된다. 사막에서도 오아시스를 찾을 합리적 계획표를 짜고 전갈에게 말을 걸기에 생존 확률이 높아진다. 그가 가장 자주 투덜거리는 불편함은 겨우, 대장 멜리사 루이스(제시카 채스테인)가 남기고 간 디스코 음악인데 실상 이건 진짜 문제들을 가볍게 여기려는 필사의 제스처일 수도 있다(<팀 버튼의 화성침공>의 화성인들이 요들송을 듣고 자멸한 사태를 돌아보면 화성의 대기에는 음악에 과민해지는 성분이 포함돼 있는지도?). 그러나 더 눈길을 끄는 것은 마크 와트니가 디스코송을 줄곧 디스하면서도 정작 어떤 음악을 듣고 싶은지는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좀 비약하면 <마션>은 마크가 누구인지 어떤 개인인지 설명하지 않는다. 취향, 연애, 가족관계는 생략됐고, 동료 대원을 포함한 여타 인물이 마크의 성격을 관객에게 브리핑하는 대사도 없다. 궤도에 진입하기 위해 뚜껑까지 떼버렸던 화성 상승선(MAV)처럼 <마션>은 생환 계획 이외의 드라마 중량을 최소화한 이야기다. 악역도 없거니와 “지구에서 죽어가는 무고한 인명도 널렸는데 한 사람의 목숨 값으로 이 막대한 자금을 써야 하나?”라고 반문하는 현실적으로 있을 법한 반대자도 등장하지 않는다. 갑자기 망나니 해커가 끼어들어 일을 꼬이게 하는 서브플롯도 없다. 해결할 문제의 질량은 보존되면서 어떻게 그것을 줄여가는지 문제 해결 과정만 단선적으로 전개된다.
<마션>이 고집하는 군더더기들도 있다. 감독과 작가는 대중성을 위한 관습적 안전장치들은 덜어내지 않는다. 가령 비행 전체를 책임져야 할 헤르메스호 대장이 “내가 마크를 버리고 왔으니 내가 구해야 해”라며 직접 선체 밖으로 구조 작업에 나서는 비현실적 클라이맥스, 말단 천체 물리학자가 직속 상사를 거치지 않고 나사 국장 앞에서 지구 중력장으로 헤르메스호를 가속시킬 아이디어를 프레젠테이션하는 장면이 그렇다. 한편 중국 항천국이 미공개된 로켓을 구조작전에 제공하는 막판 에피소드는 마치 중국권 시장을 고려한 서비스처럼 보인다. “중국 비행사를 차기 미국 화성 탐사선에 탑승시킨다”는 원작의 중국-미국간 물밑 거래 조건을 영화가 무신경하게 생략해버린 탓이다. 마크 와트니와 우주 탐험 동료들의 후일담을 그린 에필로그 역시 미 항공우주국의 제작 협조와 맞교환된 시퀀스가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이 구색들을 갖추는 대신 <마션>의 마지막 장에서 희생된 것은, 문제 해결 프로세스를 한발 한발 따라가는 과정의 영화로서 그때까지 <마션>이 줄곧 견지한 리듬이다. 구조 작전이 임박해올수록 마크 와트니의 시간은 점프한다. 특히 식사량을 제한함에 따라 말라빠진 체격을 보여주기 위해 (아마도) 대역배우가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등장하는 숏은 대놓고 값싼 눈속임으로 보인다(게다가 이어진 장면에서 우주복을 입은 맷 데이먼의 몸집은 전과 별다를 게 없다). <마션>의 러닝타임은 142분인데 주인공이 화성에서 견디는 시간의 연속성을 보존할 수 있었다면 30분쯤 늘어났더라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을 터다. 혹시 다른 편집본이 있을까?
10/13
<마션>의 첫 주말 관객 반응이 매우 호의적이다. 오늘날 배급 구조에서 어떤 개봉작의 첫 주말 박스오피스 성적이 높다는 통계는 반드시 관객이 그 영화에 만족했다는 사실을 가리키지 않는다. 100만명이 보고 80만명이 실망하는 영화가 허다하다. 대중은 <마션>의 어디에 반한 것일까? <마션>의 비교 상대는 <그래비티>나 <인터스텔라>가 아니라 재난블록버스터들이라고 생각한다. 세 영화는 외양상 모두 우주를 배경으로 표류하는 한 인간을 중심에 두고 있고 유사한 맥락으로 시장에서 홍보됐지만 내적인 목표가 판이하기 때문이다. <그래비티>는 시네마틱한 경험의 지평을 확장하는 기획이고 <인터스텔라>는 우주와 시간의 본성을 이야기하는 영화였다. <마션>은 재난 극복의 드라마로서 범상한 할리우드 재난영화들이 패착을 범하는 지점을 딱딱 보수하고 있다. 재해와 외계인 침공을 다룬 영화들은 흔히 인물들로 하여금 바보스런 판단을 내리게 해서 자잘한 위기들을 연쇄시킨다. 그리고 캐릭터가 과학자건 농부건 재앙만 닥치면 액션 능력이 앞서는 히어로로 변신한다. 설정상 지식이나 특기가 도움이 된다고 해도 요식적 묘사에 그쳤다. 이 경향은 CG 스펙터클이 전면에 나선 90년대 할리우드 재난영화들에서 승해졌다. <에어포트>나 <포세이돈 어드벤처> 시대 재난영화들 속 실무 능력과 판단력을 갖춘 영웅들은 사라져갔다. 반면 <마션>에서는 똑똑한 인물들이 똑똑한 결정을 내린다. 시행착오가 있지만 덜 스마트한 판단이 더 스마트한 판단과 섞여 조금씩 전진하고, 긍지와 실력을 갖춘 전문가들이 협업해서 특정 악역이 없는 재난과 맞선다.
달리 말하면 <마션>은 동경을 부르는 극소수 엘리트들의 이야기다. 직업적 성취도뿐이 아니다. 마크 와트니는 우수한 학자 겸 엔지니어인 동시에 보통 사람으로서는 부러운 의연함과 성숙함을 갖춘 개인으로 그려진다. 죽을지 살지 알 수 없는 최후의 시도를 앞두고 이 과학자가 루이스 대장에게 남기는 메시지는 예술가의 유언처럼 들린다. “대장에게 무리한 부탁이라는 것은 알지만, 부모님께 저는 제 일을 사랑했고 자신보다 아름답고 위대한 것을 위해 죽는다고 전해주세요(I’m dying for something beautiful greater than I).” 또한 마크는 이륙을 앞두고 그동안 화성에서 이동할 때 썼던 로버에 메모를 남긴다. “누구든 이 로버를 발견하면 잘 돌봐주세요. 지금까지 나를 훌륭히 보호해준 기계입니다.” 마크 와트니는 당장 쓸모를 알 수 없는 탐구에 헌신하고 영원히 아무도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는 메시지를 남기는, 자기 내부에 삶의 동력을 가진 인물이다. <마션>의 소구력은, 유능한 전문가들이 유능하게 일하면서도 관객을 소외시키지 않는 데에 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과학은 토니 스타크나 스티븐 호킹보다 맥가이버의 그것에 가깝다. 패스파인더를 재활용하자는 아이디어, 물을 합성하는 과정, 아스키 코드를 이용한 지구와의 교신 등의 플롯을 관객은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해도 얼추 끄덕이며 따라갈 수 있다. 요컨대 <마션>은 몇달 전 브래드 버드 감독의 기대작이었던 <투모로우랜드>가 시도했으나 실패한 목표를 성취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두 영화의 전제는 유사하다. <마션>과 <투모로우랜드>에는 다음과 같은 명제가 깔려 있다. 지구 종말론은 필연이 아니라 우리의 패배주의를 정당화하는 가설일 뿐이다. 인류가 지금 보유한 지식과 리소스를 공공의 선을 위해 규합하고 투명하게 추진한다면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다만 <투모로우랜드>는 주제를 슬로건으로 만들어 반복해서 설교했고 <마션>은 행위와 사건으로 구체화해서 보여줬다.
털어놓자면 나는 <마션>을 보는 동안 여론과 예산, 정치적 압력을 의식하면서도 공적 기구가 시민 한명을 구하기 위해 결국은 합리적으로 작동하는 광경에 매료됐다. 물론 편리하게 이상화된 부분이 있지만 <마션>은 리얼리티를 아예 무시하지 않음으로써 관객을 더 솔깃하게 한다. 한명을 구하려다가 다섯명이 죽을 높은 확률과 한 사람이 죽을 100% 확률을 어떻게 저울질하겠냐는 난해한 질문을 던지고, 항공우주국과 우주 탐사의 명운에 미칠 영향에 대한 우려에도 무게를 실어준다. 영화에서 기자와 더불어 단골 밉상으로만 재현되던 PR 담당자(크리스틴 위그)의 업무를 구조 프로젝트의 엄연한 일부로 보여준 것도 어른스러워 보였다. 극중 항공우주국은 헤르메스호 대원들이 마크를 구조하기 위해 유턴하는 항로를 승인하지 않지만 실제로 폭동에 준하는 결단이 대원들에 의해 이뤄지자 항공우주국의 공식 결정인 양 발표하고 지원한다. 요컨대 영화는 세금을 쓰는 기관 종사자로서의 명분과 과학자로서의 의무를 조율하는 능력을 가진 책임자들의 능력을 보여준다. 관료와 전문가 집단의 무능, 직업윤리, 책임감의 집단적 마비로 비극을 겪고 깊은 좌절을 겪어온 한국 관객의 무의식에 <마션>은 유난히 슬픈 판타지다. 주인공의 비범한 능력과 의지가 열쇠 아니겠냐고 혹자는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개인이 희망을 잃지 않고 계속 노력할 수 있는 상태는, 당사자의 의지와 태도만으로 확보되지 않는다. 사회에 대한 기본적 신뢰가 희망과 의욕의 토양이다.
10/14
BBC 엔터테인먼트 채널의 <그레이엄 노튼 쇼>에 맷 데이먼이 마침 출연했다. 오스카 각본상을 받은 스물일곱의 어느 날에 대한 회상이 인상적이었다. 데이먼은 애인이 먼저 잠든 다음 여전히 멍한 상태로 거실에서 트로피를 바라보다 문득 생각했다고 한다. 이걸 위해 누구도 엿 먹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그리고 일찍 받아서 축복이라고. 평생 이 상을 꿈꾸다 노년에 이르러 받았다면, 그러고서야 오스카로도 채워지지 않는 큰 공동(空洞)이 있음을 뒤늦게 발견했다면 얼마나 허망했을까 상상하니 마음이 부서지는 듯했다고 말했다. 이 회고가 예고하듯 이후 맷 데이먼은 언제나 본인이 재미있다고 여기는 프로젝트를 여타 이유로 사양하지 않았다. <브레이브> <인터스텔라>처럼 동급 스타가 망설일 작은 배역을 받아들였고 TV쇼에서 면박당하며 웃음 주는 일을 즐겼다. 덕분에 맷 데이먼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나 호아킨 피닉스에 비해 오스카 연기상에 거론될 일이 적었고, <우리는 동물원을 샀다> <모뉴먼츠맨> 같은 영화에서 그의 슬럼프를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는 활동 노선이 확실하기에 ‘침체’라는 단어가 부적절해 보인다. 실제로도 그는 고무줄 같은 존재감의 보유자다. 런던에서 <본> 시리즈를 찍을 무렵 공원에 갔는데 한 커플이 사진 촬영을 요청해서 포즈를 취했더니 “우리 사진 찍어달라고요”라고 타박을 받았다는 일화도 있다. 마크 월버그와 자주 혼동되는 바람에 유사시에는 해명하지 않고 상대의 사인을 해주고 평판을 해칠 행동은 삼가자는 협정(?)을 맺었다는 이야기도 유명하다. 그러나 <마션>이 입증하듯 사람들과 술렁술렁 어울리다가 필요할 때 조용히 영웅적 행동을 하는 인물이 맷 데이먼보다 잘 어울리는 배우는 없다. 말하자면, 그는 <마션>에 나오는 덕트 테이프처럼 영웅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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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헤란의 영화상인
<택시 드라이버>의 연기를 실감나게 하려고 뉴욕 거리에서 택시를 몰았던 로버트 드니로는 행복한 영화인이다. 대통령 퇴진 시위를 촬영했다는 이유로 이란 정부로부터 영화 제작과 출국을 금지당한 자파르 파나히 감독은 자동차를 움직이는 세트이자 카메라 돌리(dolly)로 삼아 게릴라처럼 <택시>를 찍었다. 다양한 승객들은 이란 사회의 현실과 그들에게 영화가 갖는 의미를 단편적으로 드러낸다. 그중 해적판 DVD 방문판매상 오미드는 파나히 감독을 즉각 알아본다. 심지어 전작의 대사도 왼다. 유명 감독을 동행한 이점을 취해 매상을 올린 오미드는 졸지에 동업자로 소개된 감독이 쓴웃음을 짓자 시무룩해진다. 약삭빠르게 행동하긴 했지만 ‘문화 종사자’로서 그의 긍지도 진심이기 때문이다. “나 같은 사람 아니면 이란에서 어떻게 외국영화를 봐요? 내가 없으면 우디 앨런도 없어요.” 상심한 오미드는 택시에서 내렸다가 다시 차문을 붙들고 불순한 의도는 없었다고 구태여 다짐한다. 존경하는 예술가에게 장사치로만 기억되기 싫은 영화팬의 마음이 애틋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