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자리 숫자의 부채가 기록된 학생회 장부를 물려받은 3월이었다. 등록금이 싸서 학자금 대출이 흔치 않았고 그나마 대출받은 학생들 70%(대학신문 추정 수치)가 먹튀해도 귀찮아서 추심에 들어가지 않던 시절, 난생처음 빚더미에 앉은 학생들은 시름에 잠겼다. 이것은 아마도 태곳적부터 쌓여왔을 빚, 1, 2년으로 달성하기는 불가능한 위업이 아닐까. 그렇잖아, 7천원짜리 찌개를 네명이 한개 시켜서 그걸로 밥도 먹고 술도 먹었는데, 소주 그거 기껏해야 한병에 2천원, 우리 과는 30명밖에 안 되는데 그걸 얼마나 많이 마시면 외상값이 이 정도 나올 수가… 있구나. 아, 그런 거였어.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빚을 짊어지고 우리는 이 부채를 후손에게만은 대물림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갚자, 먹는장사를 하는 거야, 먹는장사가 남는 장사라잖아, 잔디밭에 천막 치고 술을 팔자고. 이렇게 추운데? 그럼 정종을 데워 팔면 되지. 정종은 비싸서 결국 팔지 못했지만, 그처럼 무모하게도 산바람 몰아치는 3월 하순 중부 산간 지역 풀밭에 천막을 치고 나서야 우리는 소발에 쥐 밟기로 블루오션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경쟁자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망망한 푸른 바다, 아니 푸른 풀밭, 세상에 낮술을 향한 술꾼의 욕망을 막을 역경이란 없어, 풍문으로 들은 술꾼들이 캠퍼스 전역에서 몰려들었던 것이다.
마침내 태곳적부터 쌓여온 빚더미가 무너지려는 순간이었다. 해가 졌다. 손님들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아, 빛은 갔지만, 우리는 아직 빚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때 어디에선가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희는 내려가서 전구 두어개 사오고, 너희는 식당 옆 쓰레기통 뒤져서 대용량 케첩 깡통 같은 것 좀 주워와. 허리춤에서 칼 한 자루를 꺼내든 그 친구는 인문계 소속 범인(凡人)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무언가를 하더니 몇분 만에 깡통으로 등불을 만들었고, 전구가 도착하자 학교 건물에서 (불법으로) 전기선을 따다가 조명을 설치했다.
그날 그는 모든 여학생, 최후의 이상형으로 등극했다(절대 최초는 아님). 지구가 멸망해서 이 세상에 단 한명의 남자와 남아야 한다면, 부디 조가이버(성이 조씨)하고 남게 해주세요. 방사능 오염으로 죽을지언정 굶어 죽진 않을 것 같아.
그런데 천막 하나 치면서도 자리잡고 앉아 숱한 토론과 논의만 거듭하는 인문대 학생들 사이에 어쩌다가 저런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왔을까? 그는 대덕연구단지 연구원인 부친과 과학고에 다니는 동생을 둔 천재 집안 출신의 범재로서 어린 시절부터 바보라며 숱한 마음의 상처를 받다가 모가 아니면 도가 되겠다는 반항의 의미로 홀로 인문계를 선택한 집안의 탕아였다. 이과네 집에 살기만 해도 저렇게 똑똑해지는 거구나, 그러니까 우리는 이과 안 가기 잘했어(응?).
세월이 흘러 영화 <마션>을 보면서 이과의 혈통만 이어받았으나 우리에겐 피타고라스였던 조가이버군이 생각났다. 마크(맷 데이먼)가 식물학자가 아니라 언어학자였다고 생각해보자. 언어 쓰는 화성인 한명 없는 화성 땅에서 엄마가 먹고살려면 이과 가라고 할 때 말 들을걸 그랬지 탄식만 하면서 감자 아껴 먹다 굶어 죽었겠지.
하지만 나도 감자는 씨감자의 씨눈을 갈라 심어야 한다는 이론 정도는 알고 있다. 어린 시절 <초원의 집> 시리즈를 수십번이나 정독했기 때문이다(사탕단풍나무 시럽이나 히코리나무로 훈연한 베이컨처럼 맛있는 것이 많이 나오는 책이라서 그랬다). 아는 것과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지만(일단 씨눈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름) 아는 게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그 옛날 <15소년 표류기> <로빈슨 크루소> 등을 열심히 읽지 않은 어린이였다면 지금이라도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를 보면서 앞날을 준비하자.
<라이프 오브 파이>는 영화로 보는 ‘서바이벌 가이드’라고 할 만한데, 딱히 할 일이 없는 파이가 구명보트에 실린 <서바이벌 가이드>를 줄줄 읽어주기 때문이다. 그 책에는 심지어 쾌적한 난파 생활을 위해 파도의 방향에 따라 보트 방향을 바꿔 멀미를 줄이는 법까지 나와 있다. 물론 책이라고 전부 쓸모가 있는 건 아니다. <최악의 상황에서 살아남는 법>은 아마존 논픽션 부문 베스트셀러 1위였다고 하지만 조난자는 물을 하루에 2리터 정도만 마셔도 충분하다는 따위의 쓸데없는 (보통은 몸에 좋으니까 억지로라도 하루에 2리터 마시라고 하던데 말이다) 조언을 싣고 있다.
평소 그런 책을 읽지 않았더라도 가진 게 많으면 살아남을 수 있다. 무인도에 떨어진 택배도 문 앞까지 배달하는 페덱스의 고객 감동 서비스를 두 시간 반에 걸쳐 홍보하는 영화 <캐스트 어웨이>의 척(톰 행크스)은 택배 더미와 함께 난파한 덕분에 돌을 갈아 칼을 만든다거나 덩굴 껍질을 벗겨 밧줄을 꼰다거나 하는, 인턴에게나 어울릴 잡무는 하지 않아도 된다. 역시 페덱스 간부, 조난자계의 은수저라고 할까. 그러고 보면 파이도 난파영화 역사상 가장 호화로운 구명보트를 탔으니까 (비록 호랑이한테 밀려 문간방 세입자 신세로 전락하기는 하지만) 훌륭하게 살아남아 어엿한 어른이 되어 역대급 구라를 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문명과 떨어진 무인도에 표류해도 출발이 다르면 생존 확률이 다르다. 척에게 망사 스커트로 만든 그물이 없었더라면 코코넛 주스만 마시다가 작살의 달인이 되기 전에 아사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내가 비록 은수저를 물고 무인도에 떨어졌지만 열심히 해서 얼마나 물고기를 잘 잡게 되는지 보면 알 거예요, 이런 말은 사양하고 싶다. 다른 조난자들은 열심히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느긋하게 작살 연습하는 동안 먹고 마실 밑천이 없어서 굶는 거니까.
애인보다 배구공이 낫다
열대의 파라다이스를 탈출해 문명의 쓰레기장으로 돌아오기까지 필요한 두세 가지 것들
재활용 정신
고작 한강 밤섬에 표류했지만 수영을 할 줄 몰라 무인도 생활을 하는 <김씨표류기>의 남자(정재영)는 재활용의 달인이자 인분을 사용한 친환경 농법의 달인이다(그래서인지 초청받은 영화제가 서울환경영화제). 먹은 게 없어서 싸는 것도 적은 게 억울할 뿐. 방금 포장 뜯은 배구공을 친구 삼는 페덱스 간부와는 격이 달라 말벗해주는 친구도 녹슨 케첩 깡통이지만, 깡통 얼굴은 윌슨보다 예쁘지.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먹다버린 생선 가시 한개도 소중히 여겨야 하는 것이 무인도 생활이다. <캐스트 어웨이>의 척도 바람에 날아온 문짝 하나로 팔자를 고친다.
식도락 정신
엄마, 아빠하고 무인도에서 탈출해 구사일생으로 혼자 살아남은 1편의 꼬마를 며칠 만에 도로 그 섬으로 보내 속편을 생산한 이기적인 영화 <푸른 산호초2>에 나오는 목사 부인은 열대지방에서 3년을 살면서 좀 먹어본 여자다. 바나나 정도는 우습고 타로 토란과 퐁퐁달리아(근데 이게 뭘까) 같은 식용식물을 한눈에 알아보고 캐먹는다(이게 뭐가 대단할까 싶다면, 칡즙 먹어봤다고 뿌리 알아보랴). 로맨틱 코미디로 착각했지만 실체는 SM 강간 판타지 주인님 놀이 영화였던 <스웹트 어웨이>에서 그나마 호감이 갔던 장면도 마돈나가 ‘주인님’ 명령에 복종해 문어를 바위에 패대기치는 장면이었다. 그래, 문어는 두드려야 연해지지, 무인도에서 이 나가면 큰일이야(<캐스트 어웨이>에서 가장 끔찍했던 자가 발치 장면 참조).
박애 정신
<라이프 오브 파이>의 성전 <서바이벌 가이드>는 이렇게 말한다, 기운을 잃지 않기 위해 종종 카드놀이나 스무고개를 할 것이며 더불어 노래를 부르고 이야기를 나눌지니. 근데 누구하고? 윌슨하고. <캐스트 어웨이>의 척은 배구공 윌슨하고 놀고, <김씨표류기>의 남자는 케첩 깡통한테 의견을 구하고, <마션>의 마크는 화성을 떠나기 전에 ‘우리 로버’(일종의 자동차) 잘 부탁한다며 쪽지를 남기고, <그래비티>의 라이언(샌드라 불럭)은 사라진 동료의 환상을 불러내 정교한 기술적 논의까지 나눈다. 그래, 멀리 있는 애인보다 옆에 있는 배구공이 낫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