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그 파괴적 변신의 쾌락, <복수는 나의 것>의 송강호
2002-03-20
글 : 백은하 ( <매거진t> 편집장)
사진 : 정진환

송강호는 누구였나. “내 말에 토…토…토다는 새끼… 배신이야 배신… 배반…” 흥분해 더듬거리는 말투로 ‘불사파’건설에 박차를 가하던 삼류건달이었나, “학생은 인생이 뭐라고 생각하나”같은 진지한 질문에 “저 학생 아닌데요”하던 엉뚱한 삼촌이었나. 마스크를 뒤집어 쓰고 광화문 네거리를 질주하던 슬픈 소시민이었나. 아니면 쵸코파이를 한입 가득 물고 “우리 북조선에서는 언제 이렇게 맛난 과자를 만드나”며 감격해 하던 사랑스런 전우였던가. 송강호는 어떤 배우였나. 아니 어떤 사람이었나.

아는 사람은 다 알고 모르는 사람은 전혀 모르는 사실 하나. 송강호는 예민하고 치밀한 사람이다. 본인 말대로 하면 “상당히 민감한 성격의 소유자”다. 영화나 자신과 관련된 작은 기사하나까지 꼼꼼히 읽는것도 유명하고, 인터뷰 중엔 작은 멘트하나까지, 해도 되는 말인지 아닌지를, 고민하는 빛이 역력하다. 물론 대중적으로 소비되었던 송강호의 이미지는 “그래도 니가 쏴라!”며 호탕하게 웃는 ‘희극성 90%’ 스타 이지만, 한번이라도 그를 만나본 사람이라면 그가 결코 ‘코믹한’이라는 수식어속에 가두어지지 않는 배우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여기, 송강호란 배우의 본질과 대중적 선입견 사이의 오해와 간극을 좁혀주는 영화가 있으니, 바로 <복수는 나의 것> 이다

낯설다. 송강호가 이렇게 생겼나. 그가 이런 배우였나 싶을 정도로 낯설다. 3옥타브를 넘나드는 딱다구리 웃음소리도 짝짝이 눈을 치켜올리는 재미있는 표정도, 없다. 낮고 세된 목소리, 피폐한 낯빛. 유괴된 후 딱딱한 주검으로 돌아온 딸의 부검을 지켜보던 한 남자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진다. 뼈와 살이 이그러지는 기괴한 소리 넘어 딸을 잃은 아비의 분노가 세상 밖으로 터져나오면 동진의 복수는, 송강호의 연기는 비로소 시작된다. 그것은 ‘변신’같은 흔한 단어로 설명될수 없는, 그것은 그동안 숨겨왔던 진짜 얼굴이 수면위로 떠오르는 순간을 천천히 그리고 오랫동안 지켜보는 것처럼 조마조마하고 짜릿하다.

“배우 인생에 그래프가 있다면 30대 중반에서 40대 중반까지가 정점인것 같아요. 자신의 연기색깔을 드러낼수 있는 최고의 시기죠. 어린 나이의 배우들이 에너지가 넘치지만 연륜이나 인생의 깊이가 모자란다면, 40대 중반이 넘어가면 체력적으로 힘들어지거든요. 에너지와 경험이 조화를 이루어 최고의 시점. 그런 맥락으로 본다면 이제 서른 중반을 넘긴 저는 최적의 시기의 시작점에 있는게 아닐까요.”

“너무 너무 신기한 영화아니예요?” “난 슬프더라구요” “재미있는 영화예요. 오락영화의 재미와는 다른 긴장감이 끝까지 유지가 되는…” 영화에 대해 한마디, 한마디를 떼어가던 이 배우는 결국 마음속에 담았던 진짜 마음을 꺼내고야 말았다. “걸작이예요, 걸작!” 조심스런 기대의 최고치가 확실한 만족의 최대치를 만난 사람처럼, <복수는 나의 것>의 개봉을 앞둔 그는 진정으로 ‘업’되어 있었다.

그러나 <…JSA>의 성공을 잇는 다음 작품. 즐겁게 도약할수 있는 시나리오들 사이에서 ‘복수는 나의 것’이라고 외치는 ‘파괴된 사나이’가 되라니, 왜 망설임이 없었겠냔 말이다. “박찬욱 감독이 표현하고자 하는 영화의 본질을 이해하기 어려웠다기 보다는 이런 파괴적인 영화를 과연 내가 할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죠.”그렇게 몇번의 거절과 승락. “출연을 고민했던 한 이유가 곧, 결정을 내렸던 이유 였어요. 이거 해보겠다고 생각한 순간 이미 승부수는 띄워진거고, 그때 이미 어떤 부분 나 자신을 이기지 않았나,하는 생각을 해요.”

대사가 별로 없는 영화만큼이나 촬영장에서는 별 다른 요구나 지시가 오가진 않았다. 그저 촬영에 들어가기 전, 박찬욱감독과 신하균, 배두나 이렇게 넷이 모여 밤을 새면서 첫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까지를 쭉 이야기 했던것이 다 였다. “영화전체의 정서를 공유하는 단계였던것 같아요” 촬영은 다른 배우들과 부딪히는 씬보다는 혼자서 짊어져야하는 씬들이 유독 많았다. 아이의 유괴와 죽음, 그리고 이어지는 복수. 누가 보아도 슬프고 비참한 상황이지만 눈물에 호소하지 않는 ‘하드 보일드’한 영화. “주관과 객관의 절묘한 외줄타기”는 외롭고, 긴 시간이었지만 그의 연기인생에서 가장 의미있는 몇달이었다.

이제 차가운 복수의 한철을 끝낸 송강호는 따뜻한 4월부터 “따뜻한 웃음을 줄수있는 영화”를 찍기 위해 경주로 간다. <YMCA야구단>은 개화기 대한민국 최초의 야구단을 둘러싼 이야기. 그저 한복입고 배트 거머쥔 송강호의 모습만 떠올려도 실실 웃음이 배어나오는 이 영화를 추석쯤 개봉시키고 나도 그는 쉴틈이 없다.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속으로 빠져든 후에도 2개의 작품이 그와의 조우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저, 아주 지겹게 보게 될겁니다. 하, 핫핫핫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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