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선과 악이 교차하는 회색 도시
2015-12-10
글 : 이주현
드니 빌뇌브 감독이 만들어낸 혼돈의 세계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드니 빌뇌브 감독의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는 멕시코 마약 카르텔을 소탕하기 위해 미국과 멕시코 국경지대에 모인 FBI 요원과 CIA 요원 그리고 정체불명의 암살자의 서로 다른 목표를 따라가는 영화다. 감독의 전작 <그을린 사랑>(2010), <프리즈너스>(2013), <에너미>(2013)와 일정 부분 닮았으나 꽤 다른 매력 또한 장전하고 있다. 에밀리 블런트, 베니치오 델 토로, 조시 브롤린의 흠잡을 데 없는 연기와 문제의식을 힘 있게 밀고 나가는 드니 빌뇌브의 연출이 영화의 재미와 의미를 배가한다. 선악의 경계가 무너진 혼돈의 세계에서 드니 빌뇌브가 본 것은 무엇이고 말하려 한 것은 무엇일까.

드니 빌뇌브는 세계를 혼돈으로 가득한 미로(迷路)로 인식하는 감독처럼 보인다. 그의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곧잘 출구가 보이지 않는 미로에 던져진다. 길은 쉽게 단절되고 또 엉뚱한 곳에서 연결된다. 이쪽과 저쪽, 무관해 보이는 점들은 어느 순간 하나의 선으로 연결돼 있다. <그을린 사랑>(2010)에서 어머니의 유언장을 받아든 쌍둥이 남매가 마주하는 가족에 대한 진실도, <프리즈너스>(2013)의 실종된 딸을 찾아 헤매던 아버지와 납치범을 쫓던 형사가 발견하는 진실도, <에너미>(2013)의 도플갱어 아담과 앤소니가 욕망을 통제하지 못해 치르는 대가도, 모두 혼돈의 미로를 통과한 결과였다. 그 과정에서 드니 빌뇌브는 종종 선악의 경계를 뭉갠다. 그리고 윤리적, 도덕적 질문을 던진다. 드니 빌뇌브는 말한다. “세상은 흑백이 아니라 회색이라 생각해왔다. 선과 악이라는 개념도 개인의 문화와 지정학적 배경에서 유래되었다고 본다.” 선과 악을 결정하는 잣대가 결국은 상대적이라는 이야기.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2015) 역시 회색의 미로 같은 세계,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명확하지 않은 혼돈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다.

이상주의와 현실주의에 대한 이야기

FBI 아동 납치 전담반 리더 케이트(에밀리 블런트)는 애리조나주의 한적한 동네에 들어선 멕시코 카르텔의 가옥을 덮친다. 비닐로 둘둘 만 시체들을 벽에 매장해놓은 ‘죽음의 집’이 세상에 공개되자 미국 사회는 분노한다. 즉각적으로 멕시코 소노라 카르텔 대응팀이 꾸려진다. 케이트는 콜롬비아 출신의 의문의 사내 알레한드로(베니치오 델 토로)와 함께 CIA 요원 맷(조시 브롤린)이 이끄는 비밀 작전에 투입된다. 카르텔 대응팀은 미국과 멕시코의 접경 도시인 후아레즈로 향한다.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도시’, ‘세계의 살인 수도’라는 오명을 안고 있는 멕시코 후아레즈에선 부패한 경찰과 마약 밀매를 업으로 삼는 조직들 사이의 전쟁이 매일같이 벌어진다. 착취와 보복이 도시의 생리가 돼버린 도시에서 케이트가 목격하는 것은 대로변에 내걸린 목 잘린 시체들이다. 맷과 알레한드로는 짐승의 도시에선 짐승의 법칙을 따르는 게 당연하다는 듯 소노라 카르텔의 고위 조직원을 납치하고 또 고문해 정보들을 캐낸다.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는 멕시코 마약 카르텔 소탕 작전을 줄거리로 가져가는 장르물이지만, 거기에 시원한 악의 소탕 같은 것은 없다. 혼돈만이 존재할 뿐이다. 혼돈에서 허우적대는 인물은 케이트다. 그리고 관객은 주어진 임무도, 작전의 목표도 모른 채 현장에 투입된 케이트의 시선으로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하게 된다. 케이트의 의구심과 불안과 갈등이 커질수록 관객의 의구심과 불안과 갈등도 증폭된다. 즉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는 케이트의 시선으로 본 어느 암살자-시카리오(Sicario, 멕시코에서 암살자를 뜻하는 말)에 대한 이야기다. 케이트는 알레한드로에게 누구를 위해 일하느냐고 묻는다. 한때는 검사였던 알레한드로는 형식적으로는 “파견되는 곳에서 일을 한다”고 말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복수의 완성을 위해 손에 피를 묻힌다. 법의 테두리를 손쉽게 넘나드는 CIA 요원 맷은 범죄율을 0%로 만들 수 없다면 범죄자들을 통제 가능한 범위에 두어 범죄의 질서를 유지하는 게 최선이라 믿는 사람이다. 소노라 카르텔을 소탕하려는 맷과 소노라 카르텔의 보스에게 복수하려는 알레한드로의 목표는 일치한다. 알레한드로의 행위를 묵인하는 것이 맷으로선 합리적 선택인 것이다. 두말할 것 없이 이들의 대척점에 케이트가 있다. 맷은 케이트에게 묻는다. 지킬 것 다 지켜가며 범죄의 꼬리만 자르고 있으면 이기고 있다는 기분이 드느냐고. 죄 지은 자가 죗값 치르는 것을 보고 싶어서, 정의라는 것이 승리하는 광경을 보고 싶어서 카르텔 대응팀에 합류한 케이트는 자신이 원하는 바와 현실 사이에 큰 괴리가 있음을 절감한다.

드니 빌뇌브 감독은 이 영화를 “이상주의와 현실주의에 대한 이야기”라고 설명한 바 있다. 현실주의자의 논리는 때로 편의적이어서 위험하다. “피투성이가 되게 맞으면 뭐가 좋은지 알아? 몇 군데 더 다쳐도 모르거든.” 카르텔과 내통한 비리경찰의 증언을 받아내는 알레한드로의 모습에서 누군가는 딸의 납치범이라 확신해 알렉스(폴 다노)를 납치•고문하는 <프리즈너스>의 도버(휴 잭맨)를 떠올리기도 할 테다. 두 사람 모두 개인적 명분/원한으로 법 집행자가 되려 한다는 점에서 닮았다. 한편 이상주의자의 논리는 종종 나이브하다. 총이 곧 법이고, 돈이 곧 법인 무법지대에서라면 더더욱 그렇다. 드니 빌뇌브는 말한다. “우린 슈퍼히어로가 필요하다. 하지만 오늘날 현실에선 영웅들의 손이 대개 깨끗하지 않다. 영웅들은 어려운 윤리적 선택들을 마주하게 된다. 악과 싸울 때면 반드시 필요한 선택들이다. 카르텔을 막기 위해 우린 어디까지 가야 하는가? 그들처럼 되지 않고서도 그들을 막을 수 있을까? 이런 질문,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의 윤리적 선택이 날 매료시켰다.” 드니 빌뇌브는 케이트를 통해 ‘그들처럼 되지 않을’ 가능성을 제시하지만, 영화 전반엔 현실주의자의 고단함과 이상주의자의 무력감이 공평히 드리워져 있다.

케이트와 알레한드로의 관계는 영화의 주제를 부연하는 서사로 작동한다. 영화 초반, 두 사람이 국방부 전용기에서 처음 대면했을 때 알레한드로는 케이트에게 이렇게 말한다. “시계의 작동 원리를 묻지 말고 시곗바늘이나 잘 보고 있어라.” 시계가 12시를 가리키고 있다면, 어째서 두개의 바늘이 정확히 12라는 숫자에 포개지게 되었는지 묻지 말라는 이야기. 지금이 12시라는 것만 알면 된다는 이야기. 현상과 원리, 표면과 이면에 대한 이야기. 대부분의 사람들은 굳이 시계의 작동 원리, 힘의 재편 원리, 권력의 이동 원리, 세상의 작동 원리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게 세상은 굴러간다. 아니, 그래도 세상은 굴러간다. 하지만 현상을 관찰하면 원리가 보인다. 표면을 들여다보면 이면이 보인다. 공포를 통해 공포와 싸워온, 이미 영혼의 훼손을 경험한 알레한드로가 아직 애송이에 불과한 FBI 요원 케이트에게 해줄 수 있는 이야기는 그러니까 현상을 잘 관찰하라는 충고 정도다. 이 말은 케이트에 대한 보호의 차원에서 혹은 케이트가 작전에 방해되지 않았으면 하는 편의의 차원에서 나온 말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후아레즈의 지옥을 통과하고, 멕시코로 향하는 땅굴 작전을 수행한 이후 케이트는 변해 있다. 케이트와 알레한드로의 관계 역시 이전과 동일할 수 없다. 케이트의 목숨을 구해준 것도, 케이트의 가슴팍(방탄조끼)에 총알을 박는 것도 알레한드로다. 생명의 은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살자일 수밖에 없는 알레한드로는 케이트의 마음을 흔들어놓는다. 그의 방법을 지지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그를 막을 수 있는 방법도 없다. 서로에게 연민을 느끼는 순간이 있지만,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가는 존재임을 그들은 알고 있다. 케이트의 무력감과 좌절감은 엔딩에 이르러 극에 달한다. 영화에서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다. 작전이 규정대로 진행됐다는 문서에 사인을 하라는 알레한드로와 그럴 수 없다는 케이트는 한번씩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게 된다. 정적이 감돌지만 모든 감정이 폭발하는 격렬한 순간. 이는 마치, <그을린 사랑>의 그 유명한 수영장 신처럼 고요하지만 폭발적이다. 드니 빌뇌브는 결국 현실주의의 논리도, 이상주의의 논리도 긍정하지 않는다. 영화는 멕시코 노갈레스 경찰의 아들이 공차기를 하는 장면으로 끝맺음된다. 저 멀리선 폭격 소리가 폭죽 소리처럼 들린다. 세상은 그렇게 또 돌아가는 것이다. 그는 쉽게 세상을 낙관하지 않는다.

<블레이드 러너> 속편 연출

데뷔작 <지구에서의 8월32일>(1998)부터 지금까지, 드니 빌뇌브는 꾸준히 자신의 영화적 좌표를 이동시켜왔다. 그리스신화의 비극에 맞먹는 충격적 서사를 정교한 플롯에 실어 들려주었던 <그을린 사랑>의 드니 빌뇌브를 기억하는 이들이 여전히 절대다수이겠지만, 그는 장르와 이야기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나 고요하고 힘 있는 연출을 보여준 감독이었다. 주제 사라마구의 <도플갱어>를 영화화한 <에너미>에는 이런 문장이 등장한다. “혼돈은 아직 해석되지 않은 질서다.” 이 문장이야말로 드니 빌뇌브 영화의 핵심을 짚어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상주의자가 되고 싶은 현실주의자가 만든 영화처럼 보이는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에도 이 문장은 적용 가능하다. 혼돈과 질서가 공존하는 회색의 세계, 그 미로를 탐험하는 것이 어쩌면 드니 빌뇌브의 영화 여정 같아 보인다. 그러니 혼돈의 질서를 찾는 데 매료된 그가 1982년에 만들어진 <블레이드 러너>의 속편 감독으로 낙점되었다는 사실은 크게 놀랍지 않다. “어둠과 빛 모두를 그려낼 줄 아는 사람이 필요했다. 복잡한 감정을 잘 다루면서 거대한 액션과 공간을 그릴 줄 아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 사람이 드니 빌뇌브였다.”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를 제작한 배질 이와닉의 이 말은 드니 빌뇌브가 곧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영화까지 접수하리란 예견처럼 들린다. 두편의 SF 장르 <블레이드 러너2>와 <스토리 오브 유어 라이프>의 연출이 이미 예정되어 있으니, 우리는 여유를 갖고 그의 새로운 영화 좌표를 확인하면 될 것이다.

촬영감독 로저 디킨스.

이보다 사실적일 수 없다

촬영감독 로저 디킨스와 음악감독 요한 요한손

<007 스카이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파고>의 촬영감독 로저 디킨스가 <프리즈너스>에 이어 두 번째로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 촬영을 맡았다.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의 화면은 사실적이고 묵직하다. 그리고 시원시원하다. 미국과 멕시코의 상이한 풍경과 뇌운을 품은,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른 석양을 담아내는 와이드숏은 꾸밈없이 아름답다. 땅굴 작전에 투입되는 무장한 팀원들의 모습을 검은 실루엣으로만 처리한 장면은 기이하고 아름답다. 로저 디킨스의 화면에 더욱 힘을 실어주는 건 요한 요한손의 음악이다. <사랑에 대한 모든 것>으로 골든글로브 음악상을 수상한 요한 요한손 역시 <프리즈너스>에서 드니 빌뇌브와 손발을 한번 맞춰본 사이. 드니 빌뇌브는 음악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감독이다(<그을린 사랑>의 오프닝 신에 라디오헤드의 <You and Whose Army?>를 사용한 것은 무척 실험적이고 용감한 선택이었고, 음악이 선사한 여운 또한 상당했다). 아이슬란드 출신의 작곡가 요한 요한손은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의 단도직입적인 전개에 어울리는 힘 있는 곡들과 사실적 화면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곡들을 통해 영화에 힘을 보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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