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린왕자>(2015) <퍼펙트 데이>(2015)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2015) <파괴된 낙원: 에스코바>(2014) <인히어런트 바이스>(2014)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2014) <지미 P>(2013) <파괴자들>(2012) <울프맨>(2010) <체>(2008> <씬 시티>(2005) <21그램>(2003) <헌티드>(2003) <써스펙트>(2001) <웨이 오브 더 건>(2000) <스내치>(2000) <트래픽>(2000) <라스베이거스의 공포와 혐오>(1998) <트렁크 속의 연인들>(1997) <바스키아>(1996) <더 팬>(1996) <유주얼 서스펙트>(1995) <골든 볼>(1993) <차이나 문>(1991) <백색전쟁>(1990) <007 살인면허>(1989)
위험한 짐승이 돌아왔다.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이하 <시카리오>)의 알레한드로(베니치오 델 토로)는 도시를 배회하는 상처 입은 야수다. 그의 얼굴은 전쟁의 상처처럼 깊게 팬 주름으로 뒤덮여 있다. 긴장해서 일부러 인상을 쓰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하도 오래되어 이제는 자신의 얼굴이 되어버린 것 같은 구겨진 마스크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특별한 대사나 설명 없이 그가 걸어온 길의 험난함을 짐작할 수 있다.
영화 후반부에 드러나는 알레한드로의 사연은 범죄도시 후아레즈가 어둠 속에 덮고 싶어 하는 모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약 카르텔에 가족이 잔혹하게 살해된 지방 검사는 복수의 화신이 되어 돌아왔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적의 목줄기를 물어뜯는다. 다만 암살자가 되어 돌아온 지방 검사는 복수를 행할 때 환희와 쾌감에 들뜨지 않는다. 그는 마치 오랜 고통에 감정이 메말라버린 것마냥 기계적으로 복수를 수행한다. 관객이 이 끔찍한 사적 복수 앞에 함부로 정의를 외치거나 비난할 수 없는 것은 바로 그 공허한 눈빛 때문일 것이다. 다만 그 공허함이 알레한드로의 것인지 베니치오 델 토로의 것인지 구분하는 건 쉽지 않다.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한 지점에서 스스로 폭력이 된 알레한드로는 베니치오 델 토로를 위해 마련된 옷처럼 딱 들어맞는다. 사실 알레한드로는 전형적인 캐릭터다. 비밀을 가슴에 묻고 털을 곤두세운 채 주변을 밀어내는 상처 입은 짐승. 눈 감으면 종종 악몽에 시달리면서도 눈을 뜨면 기계처럼 자신의 목적을 수행하는 고독한 늑대. 한데 이 사납고 차가운 동물이 인간의 표정을 하고 있는 건 오직 베니치오 델 토로의 공이다. 굳이 알레한드로의 사연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베니치오 델 토로가 그 자리에 서서 우리를 응시하는 것만으로 이 영화의 상당 부분이 설명된다. 정확히는 그의 피로한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그의 깊은 우울에 내심 동조할 수밖에 없다.
알레한드로는 마치 <트래픽> 속 멕시코 경찰 하비에르의 미래를 마주하는 것 같은 기시감을 안겨주는 인물이다. 정의와 출세 사이에서 세속적인 갈등을 했지만 끝내 세상이 나아지리라 믿었던 경찰의 이야기로부터 15년, 멕시코는 여전히 무법천지고 폭력이 일상 위에 군림하고 있다. 이런 도시에서 생존의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하비에르가 꿈꿨던 정의가 좌절되고 여전히 끈질긴 목숨을 이어가고 있다면, 15년 후 알레한드로가 되어 복수에 매진한다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물론 이 두 인물 사이 15년의 시간차를 잇는 건 베니치오 델 토로의 구겨진 표정이다. 구겨져 펼 수 없는 금속판마냥 미동도 없이 항상 일그러져 그늘진 얼굴은 배우 베니치오 델 토로의 타고난 자산이다.
1988년 데뷔해 어느덧 30년을 채워가고 있는 베니치오 델 토로의 연기 인생에는 몇 차례 전환기가 있었다. 첫 번째는 두말 할 것 없이 <유주얼 서스펙트>다. 법조인 집안에서 태어나 연기에 빠져든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연기자에게 허락된 역할은 그리 많지 않았다. 엑스트라 악역을 전전하던 그는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역할을 특별한 존재로 승화시켰다. 구겨진 표정에 웅얼거리는 말투는 브라이언 싱어 감독에게 요청한 델 토로의 아이디어였다. 이후 제임스 딘, 말론 브랜도, 잭 니콜슨 등과 종종 비교되곤 했던 특유의 웅얼거림은 그의 인장이 되었다. 로버트 드니로와 함께한 <더 팬>, 오랜 벗 줄리언 슈나벨 감독의 <바스키아>, 조니 뎁과 함께한 <라스베이거스의 공포와 혐오>에서 다양한 얼굴을 선보였지만 반응은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다.
두 번째 전환기라 할 수 있는 <트래픽>에서 그는 자신의 영역을 강화해나가는 방향으로 출구를 찾는다. <트래픽>에서 폭발한 그의 존재감은 연기 스타일이 급변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에게 딱 맞는 역할을 찾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는 전혀 다른 가면을 번갈아 쓸 수 있는 종류의 배우는 아니다. 매너리즘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그가 완벽히 소화할 수 있는 역할 역시 제한적이다. 대신 우울과 고독, 갈망과 불안의 경계 위에 선 역할에 한정해서는 가히 독보적인 이미지를 구축해왔다. 투박한 언사, 무뚝뚝함을 넘어 시큰둥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의 태도는 연기를 넘어 일상의 이미지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긍정적으로 말해 영화 속 역할보다 배우 베니치오 델 토로의 얼굴이 더욱 깊게 각인된다. 흔히 ‘메소드 연기’의 대표주자로 언급되지만 그는 자신을 지우고 역할 속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모든 역할을 자신의 삶으로 만들어버린다. 그 결과 애써 힘주지 않아도 이미 구겨진 얼굴에서 오는 황량함은 인물의 심리를 직관적으로 스크린에 투사한다. 이후 <웨이 오브 더 건> <써스펙트> <헌티드> <21그램>에 이르기까지 그는 야수의 얼굴로 폐허가 되어가는 영혼을 거칠게 소모해나갔다. 그야말로 ‘지나간 자리마다 모두 폐허’가 되는 ‘시방 상처 입은 짐승’이 된 것이다.
완급을 조절하기 시작한 것은 베니치오 델 토로 필생의 역작 <체> 이후부터다. <트래픽> 무렵부터 꿈꿨던 프로젝트였던 체 게바라 역할은 어쩌면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압도하는 캐릭터였는지도 모른다. “절대 닿지 못할 곳이라도 계속 가는 사람이라서 체를 좋아한다”고 밝힌 그는 진짜 체 게바라에 도달하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그리고 마침내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체 게바라를 완성해 61회 칸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쟁취했다. 그렇다. 베니치오 델 토로에게 그것은 연기를 넘어 불가능을 향한 투쟁이었던 것 같다. 베니치오 델 토로가 체 게바라가 되어가는 과정은 난생처음 자신의 굳어진 마스크를 깨부수는 과정이었다. 그 깊고 깊은 밑바닥에 도달하는 걸음 앞에서 체 게바라와 흡사한 외견 따윈 사소한 요소에 불과하다. <체> 이후 베니치오 델 토로의 행보는 비로소 자유로워 보인다. <울프맨> 같은 판타지 스릴러는 물론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에서는 컬렉터 역을 맡아 악취미적인 분장마저 유쾌하게 소화해냈다.
사실 <시카리오>에서 베니치오 델 토로가 대체 불가능한 놀라운 연기를 선보인다고 할 순 없다. 우리가 늘 알아왔고, 이제는 일종의 고정관념처럼 각인된 베니치오 델 토로의 아우라를 고스란히 활용하고 있을 따름이다. 마약과 폭력의 도시에서 생존해나가는 짐승의 몸부림은 우리가 익히 보아왔던 이미지들이며 유사한 역할을 곧잘 소화해온 배우들도 적지 않아 일견 누구라도 맡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누가 이 역할을 맡더라도 베니치오의 이상의 존재감을 선보이리라곤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는 알레한드로라는 캐릭터의 얼굴을 지워버리고 그 자리에 자신의 우울을 구겨넣는다. 거꾸로 말하자면 그 구태의연함이 이 영화의 힘이고, 델 토로를 델 토로답게 만드는 정서이며, “홀연히 걸어나와 영화를 더 근사하게 만들어놓고 사라지는”(숀 펜) 배우 베니치오 델 토로의 재능이다. 베니치오 델 토로라는 배우가 곧 알레한드로의 근거가 되는 마법. 웅얼거리기는커녕 한마디 말 없이 그저 어둠 속에 몸을 파묻고 이쪽을 바라보는 것으로 상황을 이해시키는 존재감. <시카리오>는 익숙한, 그리고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역할로 돌아온 델 토로의 귀환이 새삼 반가운 영화다. 멀고 먼 길을 돌아 다시 남미의 폭력을 몸에 두른 그 역할들이 강박과 소모가 아님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미친 존재감을 만끽할 수 있다. 예전이라면 어색하게 느꼈을지도 모를 <어린왕자>의 목소리 출연,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의 캐스팅 소식이 한층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픽션을 논픽션으로 만드는 남자
때론 배우의 존재가 영화의 사실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베니치오 델 토로는 자신의 존재감을 영화적 진실로 바꾸는 힘을 가진 배우다. 콜롬비아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파괴된 낙원: 에스코바>나 <체>의 리얼리티는 그것이 실존 인물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베니치오 델 토로라는 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성립한다. “그는 모든 것이 실제처럼 보이길 원하고, 이를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는 배우”라는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평은 픽션을 논픽션으로 만들어버리는 남자의 본질을 정확히 짚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