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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아무 일도 안 한다면 또 다른 참사가 일어날 것이다”
2015-12-24
글 : 정지혜 (객원기자)
사진 : 최성열
<그들이 죽었다> 백재호 감독

마야인의 달력이 끝나는 2012년 12월21일에 지구가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지구의 소멸을 앞두고 뭔가를 해보려고 발버둥치는 젊은이들이 있다면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았을까. ‘지구가 멸망한다는데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다 무슨 소용인가.’ ‘만약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다면 지금 이대로도 괜찮은 걸까.’ 백재호 감독의 장편 데뷔작 <그들이 죽었다>(2014)는 바로 그 시기에 이런한 질문들을 하며 살아가는 무명배우들의 이야기다. 무명배우인 상석(김상석), 태희(김태희), 재호(백재호)는 재호의 연출하에 함께 영화를 만들기로 한다. 출발은 호기로웠지만 결국 영화가 엎어지자 상석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시나리오로 옮기기 시작한다. 12월10일 영화 개봉 이후 줄곧 관객을 만나러 상영관을 찾고 있는 <그들이 죽었다>의 백재호 감독 겸 배우를 만났다. “연기자로 출발해 연출, 프로듀서, 촬영, 영화제 일까지 하며 영화판의 팔색조를 꿈꾸는 야심만만한 젊은 감독이다. 그 재능이 귀하고 반갑다”는 이송희일 감독의 귀띔처럼 영역 구분 없이 발로 뛰는 열혈 청년이다. 이번에도 일당백이다. 연출뿐 아니라 제작, 각본, 촬영, 편집, 연기까지 다 했다.

-어제는 관객과의 대화를 위해 대구의 독립영화전용관인 오오극장에 다녀왔다고 들었다. 매일 상영관으로 출근 중이라고.

=<그들이 죽었다>는 영화 속 현실과 영화 속 주인공들이 만드는 영화 사이의 경계가 모호한 상태로 진행되는 영화다. 그러다보니 관객이 영화를 보고 어떻게 생각할지 되게 궁금했다. 실제로 영화가 끝난 뒤 영화의 출연배우와 감독이 현실 공간에 나타났을 때 놀라는 재미도 있잖나. 상영관이 얼마 없는 데다 곧 극장에서 내릴 것 같아서 이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다. ‘그때 조금 더 관객과 만날걸’ 하는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다.

-첫 연출작으로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 부문에 초청된 이후 개봉까지 하게 됐다.

=완성에 대한 의지가 컸다. 일단 완성만 하면 영화는 친구들끼리 모여서 보거나 유튜브에 올리자고 생각했다. 영화제는 기대조차 안 하고 있었는데 뜻밖의 소식을 듣고 정말 놀랐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 갈 때 되게 몸조심을 했다. 영화 제목대로 혹여나 우리가 죽는 게 아닌가 싶어서. (웃음) 영화를 만들고 영화제에 가고 개봉까지 하고 보니 한 단계 한 단계 밟고 올라가고 있는 것 같다. 일단 말은 뱉어둬야 하는 건가. 그래야 그 말에 책임지기 위해서라도 뭔가를 해나갈 것 같다.

-영화의 내용이 자전적 이야기의 반영인가.

=2012년 대통령선거 개표방송을 보면서 내가 기대했던 결과와 너무 다른 현실을 보며 영화를 만드는 일에 회의를 느꼈다. ‘영화를 통해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자’는 생각으로 힘들지만 만들어왔는데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싶으면서 작업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후 쓴 시나리오가 <그들이 죽었다>다. 지질하고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청춘들이 뭔가를 해보겠다고 하는데 잘되지는 않고. 그럼에도 지구 멸망이나 죽음이라는 극한의 순간 앞에서 조금씩 뭔가를 해보려고 하는 그런 이야기다.

-영화는 셀프 카메라로 유언을 남기고 자살을 시도하려는 상석, 마야인의 달력이 끝난다는 2012년 12월21일을 기다리고 있는 화(이화) 등의 인물을 통해 끊임없이 죽음을 암시한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죽음에 대해 생각해왔다. 고등학생 때 밀레니엄을 앞두고 친구들한테 ‘지구가 멸망할 텐데 공부해서 뭐하냐’며 하도 말을 했더니 친구 부모님들이 부모님께 연락을 해올 정도였다. 고교 동창들은 <그들이 죽었다>를 보고 ‘네가 말하던 그대로 영화를 만들었구나’ 하더라. 혼자 있을 때 상당히 게으른 편이기도 하다. 이런 유의 사람이 변하려면 극한 상황에 직면해야만 한다. 나는 죽음을 생각하면 뭔가를 하게 된다. 자신이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해 ‘내일 하면 되지’라고 말하는데 사실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 이 세상에 아무런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 채 죽는다면 그건 안 될 것 같았다.

-함께 출연한 김상석, 김태희 배우와는 오랜 친구 사이라고 들었다.

=동국대학교 동문이다. 나는 광고홍보학과에 입학해 연극학과 복수전공을 했다. 상석은 공군사관학교를 자퇴하고 연극학과로, 태희는 경호학과에 가려다 연극학과에 들어갔다. 나와 상석이 동갑(1982년생)이고 태희가 한살 어린데 제일 늙어 보인다. (웃음) 애초에 배우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연극과에 간 친구들과 달라서인지 셋이 잘 통했다. 졸업하고 상석의 장편 연출작 <별일아니다>(2013)를 만들면서 다시 모이게 됐다. <별일아니다> <그들이 죽었다>에 이어 인권연극제에 올린 태희의 연출작인 연극 <미싱은 돌아가네>까지 함께했다. 계속 영화를 만들자는 의지가 다들 커진 상태다.

-<별일아니다>에도 실제 배우 이름 그대로 상석, 태희, 재호가 등장한다. 심지어 상석이 좋아하는 여주인공 미소(김은주)가 <그들이 죽었다>에서 상석이 마음쓰는 여자로 (전화상) 출연한다. 내용 면에서도 그렇고 두 작품이 묘하게 연결돼 있다.

=품앗이하듯 <별일아니다>를 촬영하고 편집하면서 아쉬웠던 점, 미처 넣지 못한 아이디어를 더 발전시켜보고 싶었다. 같은 소재에서 출발했지만 두명의 감독이 만들면 각각의 영화가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를 기대하며 만드는 것도 흥미로웠다.

-올해 서울독립영화제 폐막식 때 대상을 받은 <스틸 플라워>(2015)의 박석영 감독을 대신해 박 감독의 성대모사로 수상 소감을 전해 화제였다.

=마라케시국제영화제 참석차 출국하게 된 박 감독님이 혹시 몰라 수상 소감을 전해둔다며 연락을 해왔다. ‘크게 운다’ 등의 지문까지 다 써 있는 장문의 글이었는데 ‘토씨 하나라도 틀리면 안 된다’며 엄포를 놓으셨다. 시국선언이라도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보니까 <그들이 죽었다> 홍보 멘트를 넣으셨더라. 혹시나 내가 그 부분을 안 읽을까봐 그러셨나보다. (웃음) 박 감독님과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때 처음 만났다. 둘 다 첫 장편 연출작인 데다 서로의 작품을 좋아했고 소규모 스탭으로 제작하는 작업 방식도 비슷해 통하는 면이 많았다. 또 세월호 참사에 어떻게든 힘을 싣는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해 진상규명의 필요를 말하는 피켓 시위에도 함께 나섰다. 그러면서 서로에 대한 애정이 생긴 것 같다.

-세월호 참사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들이 죽었다> 편집을 하고 있는데 세월호가 침몰하고 있다는 뉴스를 접했다. 2013년에 세월호를 타고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다. 그때 정말 행복했고 재밌어서 그 후에 누가 제주도에 간다고 하면 인천에서 배를 타고 가라고 추천도 많이 했다. 그렇게 좋았던 기억이 한순간 악몽으로 바뀌면서 큰 충격이었다. 어쩌면 이전의 다른 참사 때 내가 외면하고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않았던 것이 쌓이고 쌓여 세월호 참사로 돌아온 게 아닐까 싶다. 이번에도 아무 일도 안 한다면 또 다른 참사가 일어날 것이다. 미약하나마 작은 힘을 보태고 싶다.

-엔딩 크레딧에 ‘프로젝트42’라는 건 뭔가.

=내가 대표이사이자 비서이자 직원으로 있는 제작사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2005)에서 주인공들은 궁극적인 해답을 얻으러 다니는데 슈퍼컴퓨터가 정답은 ‘42’라고 말한다. 답은 이미 내려져 있고 중요한 건 질문을 찾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게 내가 생각하는 정해진 답 42라면 결국 나만의 질문을 계속 찾아가야 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지어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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