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민의 오독의 라이브러리]
[박수민의 오독의 라이브러리] 시네마 타령
2015-12-29
글 : 박수민 (영화감독)
미래의 영화에 대한 위악적 예측과 올해의 시네마,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마침내 영화를 찍는 법을 터득하는 감독이 있다. 지금 이 문장은 이상한 문장이다. 그럼 영화를 찍는 법을 끝내 익히지 못하는 감독들도 있다는 말인가? 수도원 같은 골방에서 홀로 포스 수련을 하는 이 오독의 남자는 영화를 무비(movie)와 시네마(cinema)로 나누는 편협한 개똥철학을 얘기해볼까 한다. 물론 ‘무비’가 다크사이드, 시스이고 ‘시네마’가 라이트사이드, 제다이라는 건 아니다. 무비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는 주류영화 전체, 시네마는 그중에서 가끔씩 위대한 영화예술에 도달한 작품을 구분하기 위해 선택된 단어일 뿐이다. 어떤 연출자든 우선 영상에 대한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영상을 다루는 자기만의 태도나 방식은 무엇보다도 궁극적인 유일한 관객으로서 카메라의 위치와 움직임을 정하는 작가의 시선에 대한 것이다. 눈앞의, 카메라 앞의 그림을 ‘보는’ 방식이 있고 ‘보여주는’ 방법이 있다. 보는 스타일에 머물면 무비로 남지만, 보여주는 시네마틱을 터득하면 시네마에 도달한다.

한국 드라마를 닮아가는 한국영화

데이비드 O. 러셀의 <아메리칸 허슬>(2013)을 보았을 때 나는 앞으로의 주류영화 양식이 어쩌면 이런 스타일이 되지 않을까 예상해보았다. 관객 동원력과 연기력이 일정 타율로 검증된 스타, 일급 배우들을 여럿 등장시켜 그들이 각자의 신과 서로의 신을 빼앗도록 만든다. 지금 이 신을 누구의 연기가 장악하느냐가 유일한 영화적 텐션이고, 애초 시나리오가 그들의 연기를 상정하여 시퀀스보다는 신 중심으로, 서사보다는 캐릭터 중심으로 쓰여진다. 캐릭터, 상황, 대사가 영화를 구성하는 전부이고 액션은 이 세 가지 요소의 연장선일 뿐이다. 감독은 연출보다는 중재를 한다. 등장인물이 여러 명이 연결된 상황극. 하지만 쿠엔틴 타란티노보다는 우디 앨런스러운, 한때 ‘앙상블 영화’와 유사한 방식. 주된 장르는 모호하지만 모두 조금씩 섞여 있고, 나름대로 주제의식도 남겨두어 무슨 종합선물세트 같은 영화. 관객이 극장 밖을 나설 때, 배우의 표정과 근사한 대사 몇줄은 뇌리에, 그래서 곧장 SNS에 140자 남길 수 있는 무비. 나는 감히, 2015년에 수천만 관객을 나눠가졌던 한국영화들도 비슷한 스타일이었다고 본다.

이런 스타일에 대한 역사적 기원을 내 라이브러리에서 찾아본다면, 당혹스럽게도 <매드 매드 대소동>(1963)이나 1967년작 <007 카지노 로얄>이 떠오른다. 심지어 감독도 네명 이상인 <007 카지노 로얄>은 위대한 배우들이 우르르 출연해 난장을 벌였다. 당시의 정통 관객에겐 산만하기만 한 쇼였겠지만, 일상 자체가 온갖 정보에 대한 멀티태스킹인 요즘의 관객에게 ‘올스타쇼’는 예를 들자면 히어로들이 쏟아져 나오는 <어벤져스> 같은 것이다. 관객 입장에서 스타와 연기 잘하는 배우들이 많이 나오면 좋다. 연기자들에게도 영화 내내 홀로 올인하는 부담이 줄어들고 스케줄상의 가변적인 이점이 있다. 영화에 돈을 대는 쪽에서는 화면에 배우의 얼굴을 비추는 양(인원수, 노출시간, 숏 사이즈)과 관객 로스(loss)간의 상관관계를 밝혀내고 투자 대비 손실의 확률을 줄이는 데 필요한 절대값을 언젠가 마침내 계산해낼지도 모른다.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그리하여 이번 세기의 영화는 결국 선전이 되지 않을까? 예술도 엔터테인먼트도 아닌, 프로파간다로서의 영화에는 어떠한 이즘(ism)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오로지 팔리기 위한 상품으로서 이윤을 위한 영화만이 있을 것이다. 작가, 감독의 영화는 20세기의 유물이 되고 자본은 중간에 예술가를 두는 대신 배우들과 직접 만난다. 마치 CF 같은 영화의 탄생. 영화를 만드는 주체나 소비하는 관객 모두 저비용 고효율, 적게 노력하고도 많은 것을 얻길 원한다. 이제 관객은 장면을, 프레임 안에 담긴 미장센을 진득하게 읽어낼 의지가 없다. 유튜브가 손에 있는 그들은 바쁘고 조급하다. 러닝타임 90분 안에 충분히 만족할 만한 카타르시스가 제공되어야 한다. 언뜻 난해한 회화 앞에 오랫동안 지루하게 서서 뭔가를 느끼느니 검색으로 의미를 찾는 게 빠르고 쉽다. 느끼는 것보다 아는 것이 감정의 유일한 전달이 되면서 배우들은 연기를 과장하기 시작한다. 흐르는 눈물을 보아야 슬픔을 감각하고 핏대가 선목을 보아야 분노를 감각하기에, 영화는 별 고민 없이 너무나 쉽게 클로즈업으로 배우의 얼굴을 잡고 모든 리액션 컷을 따고 들어간다. 전경으로 객관을 볼 기회는 극장에서조차 점점 더 드물어진다.

그 결과 영화가 멸망한 자리엔 오직 드라마만이 남을 것이다. 온통 배우 얼굴만 가득한, 그들이 PPL로 들어간 물건들을 붙잡고 그 편리한 기능에 비추어 힘든 인간의 삶을 논하는 유의 드라마 말이다. 나는 TV드라마를 비하하고 곡해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미국 드라마는 점점 더 미국영화스러워지고 있는 반면, 한국영화가 한국 드라마스러워지고 있는 현실은 걱정스럽지 않은가? 그냥 돈 많이 들인 드라마 같은 영화들은 카메라에 배우의 표정, 몸짓만을 담기에 급급하다. 서사를 이룰 최소 단위의 문법 외에 더해진 영화적인 무엇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기억나는 것은 오로지 배우가 연기한 감정뿐, 영화에 풍경은 사라지고 표정만이 잔뜩 있다.

물론, 험악한 비약일지 모른다. 표정만으로도 재미있고 훌륭한 영화는 넘치도록 많으며, 그것만으로도 영화는 충분히 어려운 예술이다. 그러나 나는 숏과 컷이 붙어 신으로, 시퀀스로 만들어지며 발생하는 화학작용이 인간의 감정을 붙잡아 흔들어 영혼에까지 도달하는, 시네마라는 이름의 포스를 아직 숭배한다. 모션 픽처가 누구나의 커뮤니케이션 형태인 동영상으로 흡수된 지금의 유튜브 시대에도 나는 여전히 영화는 회화여야 한다고 믿는다. 영화는 동영상이기 이전에 그림이어야 한다. 시네마틱한 그림을 그리는 감독은 먼저 상정한 공간에 인물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를 알고, 무엇보다 미장센을 만든다. 배우가 연기하는 감정뿐만 아니라 숏과 컷이 만들어낸 감정을 그린다. 그 순간 배우의 얼굴은 표정을 넘어 풍경이 된다. 연말에 천만다행으로 그런 포스의 시네마를 보았다. 드니 빌뇌브의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다.

누구의 시선이 아닌 나의 시선

카르텔 소탕 작전에 합류한 FBI 요원 케이트(에밀리 블런트)를 따라서 멕시코 후아레즈로 들어가는 이 영화는 일종의 지옥 견학 투어다. 그녀와 함께 가는 과정, 도달하는 진실, 그 이후까지 영화는 내내 관객을 시네마틱한 그림과 리듬으로 압도한다. 카메라는 인물을 따라가다가, 완전히 전경으로 빠지고, 멀찍이 머물다가, 야간투시경을 쓰고 보거나 하면서 그야말로 귀신같이 위치를 바꾸며 캐릭터의 시점과 관객의 시선을 명확하게 동일한 경험과 감정으로 통제한다. 심지어 이 영화는 후반부에 주인공을 바꿔버리는데, 관객은 갑작스레 시선의 동행자였던 케이트 없이 카르텔 두목의 저택에 인질처럼 ‘끌려들어간다’. 갑자기 누구의 시선도 아닌 나의 시선으로, 이 사적인 복수의 목격자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숨죽여 훔쳐본 세계의 진실은 사적인 동기와 공적인 목적이 뒤섞인 혼돈이라는 힘의 질서이며, 그 속엔 우리가 믿는 정의 따위는 한줌 흔적도 없고, 언제든지 인간은 인간에 대해서 영혼이 파괴된 암살자들이 될 수 있다는 것뿐이다. 그리하여 어떤 진실보다도 냉혹한 것은 바로, 그전에 존재하는 ‘사실’이다.

늑대들의 세상을 목격한 케이트의 절망적인 얼굴은 줄곧 보여주었던 멕시코의 광막한 땅처럼 창백하다. 어둠 속에 얼굴이 가려진 알레한드로(베니치오 델 토로)는 푸르게 빛나는 짐승의 눈으로 그녀를, 우리를 가만히 지켜본다. 그렇게 그들의 얼굴은 풍경이 되고,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는 아이는 총성 울리는 땅 위에서 공을 찬다. 드니 빌뇌브의 시네마는 이렇게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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