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송경원의 영화비평] 영화는 영화다
2015-12-31
글 : 송경원
현재진행형의 지옥에 비애를 느낀 이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1.

“자살을 당할 수도 있어.”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이하 <시카리오>)에서 절정을 찍는 오싹함은 이 무미건조한 대사 한줄에 실려 있다. 영화 말미, 암살자 알레한드로(베니치오 델 토로)는 케이트(에밀리 블런트)를 찾아와 자신들의 작전이 적법하게 이루어졌다고 위증하도록 강요한다. 케이트가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리자 알레한드로는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진정 걱정스러운 듯 말을 건넨다. 이 대사는 이상하다. 자살이라는 능동적 행위에 ‘당한다’는 피동사는 붙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말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반면 이 상황은 적절하다. 우리는 알레한드로의 표현이 케이트를 살해하고 자살로 위장하겠단 협박임을 안다. 인상적인 건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강요당하는 이 순간을 굳이 ‘자살’로 꾸미겠다는 알레한드로의 표현이다. 이를 단지 알리바이를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라 말하는 건 케이트가 겁에 질려 눈물을 흘린다고 보는 것만큼이나 충분치 않은 해석이다. 자유의지의 최종 수단이랄 수 있는 자살마저 누군가의 통제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건 나를 둘러싼 세계 전체를 박탈당하는 잔혹한 일이다. 영화 내내 이리저리 휘둘려도 이를 악물고 버티던 케이트가 이 지점에서 끝내 눈물을 터트리는 건 아마도 자신이 믿고 있던 법과 원칙, 진실이라는 울타리가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 새삼 확인‘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시카리오>에는 두 가지 별개의 세계가 존재한다. 하나는 케이트가 속한 미국, 다른 한곳은 세계에서 가장 폭력적인 도시라는 후아레즈다. 후아레즈의 폭력은 미국으로 건너오지 않고 후아레즈 안에만 머물 것, 그것이 영화 속 세계가 제시한 유일한 법칙이다. 이 법칙이 깨졌을 때 사건이 시작된다. FBI 아동납치 전담반의 케이트는 자국에서 일어난 마약 관련 폭력사건에 분노하여 근본 원인을 색출하기 위해 특별조사팀에 합류한다. 멕시코 카르텔 대응팀의 CIA 요원 맷(조시 브롤린)과 콜롬비아 출신의 특수요원이라는 알레한드로는 그녀를 작전에 참여시키되 실질적인 수행 과정에서는 철저히 배제한다. 케이트는 법을 피해가기 위한 도구로 후아레즈에 소환되었을 따름이다. 케이트가 거짓 증언을 해줌으로써 미국과 후아레즈는 각기 다른 법이 지배하는 상호 불가침의 공간으로 존속 가능한 것이다. 그녀의 존재는 적어도 미국 내에서는 법을 지키는 척이라도 하겠다는 일종의 위악의 도구에 가깝다.

<시카리오>는 케이트가 두 세계의 경계를 찢고 건너가는 과정에 대한 체험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문제는 그녀가 자신이 속한 세계의 법과 원칙이 보편타당한 것이라 믿었다는 데 있다. 오직 목격자로서의 위치만을 허락받은 케이트는 짐승들의 법이 지배하는 후아레즈에 들어서자 혹한에 발가벗겨진 사람처럼 왜소하고 무력해진다. 처음부터 발가벗겨져 늑대들 사이에 내던져졌지만 정보의 통제와 격차 탓에 본인만 그 사실을 모른다. 영화가 사건의 내막을 까발릴 때마다 케이트는 질질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장르적으로 말해 서스펜스가 촘촘하다. 온전히 자유의지로 사건에 발을 들였다고 생각했던 케이트가 실은 자신에게 허락된 선택지가 아무것도 없음을 깨달을 때, 그녀는 자신이 ‘자살을 당할 수도 있는’ 또 다른 세계의 진실을 받아들이며 끝내 무너진다. 흥미로운 건 케이트가 무력감에 젖어드는 과정이 관객이 느끼는 무력감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점이다. 주인공의 감정에 동화했다고 말하면 그만이겠지만 이 영화의 형식은 그 이상의 작동원리를 품고 있다고 믿는다. 목격만이 가능한 케이트의 위치는 언뜻 스크린을 마주한 관객의 자리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2.

영화는 폭력적인 매체다. 극장에 들어선 관객은 정해진 위치에 앉아 일방적으로 정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사각의 프레임을 활용한 매체는 적지 않지만 영화는 제한된 공간 안에 시간의 개념까지 끌어들여 독자적인 관람 체계 안에서 작동한다. 스크린 맞은 자리에 놓인 관객은 피동의 존재다. 일체의 저항이 허락되지 않은 상태에서 영화가 쏟아내는 관람 체계에 복속한다. 적어도 영화가 상영 중인 동안 관객은 바깥의 물리적인 세계와 단절된 채 스크린에 투사된 이미지를 일체의 의심 없이 사실인 양 받아들인다. 심지어 영화는 관객이 스크린이 제시하는 관람 체계 안에 투항했다는 사실조차 은폐시킨다. 이때 관객은 철저히 목격자의 위치에 놓인다. 간혹 스크린의 견고한 경계에 균열이 가는 드문 순간에야 관객은 목격만이 허락된 자신의 위치를 겨우 자각할 수 있다.

스크린 앞에 묶인 관객의 위치에 대해 몇 마디 설명으로 정리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시카리오>의 스크린에 균열이 발생했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드니 빌뇌브 감독의 편집이 이음매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매끄럽다는 점은 새삼 말할 것도 없다. <시카리오> 역시 관객(또는 케이트)을 질질 끌고 다니는 서스펜스의 리듬감과 숏의 통제가 탁월한 영화다. 한데 이토록 영리하고 철두철미한 영화에 이해하기 힘든 불순물들이 섞여 있다. 정보의 전반적인 통제가 이루어지긴 하지만 <시카리오>는 어디까지나 케이트와 연루된 사건들의 흐름을 따라간다. 케이트가 행위의 주체는 될 수 없을지언정 영화 속에 그녀와 무관한 사건이란 있을 수 없다. 마약 카르텔이 애리조나주 가옥 벽에 시체를 매장해둔 이른바 ‘죽음의 집’의 오프닝 신부터 살해 협박을 받는 영화 말미의 순간까지 이 영화는 케이트의 시선하에 머문다. 그렇게 케이트는 영화 전반 맷과 알레한드로, 그리고 관객을 위한 시선의 매개로서 공고한 위치를 차지한다.

하지만 마약 카르텔에 연루된 부패 경찰 실비오(맥시밀리아노 헤르난데즈)가 등장하는 장면들은 케이트와 전혀 무관하게 진행된다. 케이트가 맷의 권유로 전담팀 합류를 결정한 뒤 영화는 곧바로 실비오의 집안 거실로 이동한다. 아들은 늦잠을 자고 있던 실비오에게 축구 시합에 가자고 조르고 실비오는 못 이긴 척 집을 나선다. 이후 실비오가 알레한드로에게 사로잡히는 순간까지 실비오가 등장하는 모든 장면들은 붕 뜬 느낌을 준다. 이유는 간단하다. 케이트의 시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도 멕시코의 평범한 가정을 상징하는 실비오의 숏은 케이트의 시공간과 불일치한다. 우리는 잉여라고 불러도 좋을 이 장면들을 집요하게 반복하는 이유를 추측해볼 필요가 있다.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시카리오>의 엔딩은 실비오의 아들이 축구 시합을 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실비오는 알레한드로의 복수에 휘말려 간단하고 허무하게 살해당했다. 마약 카르텔에 협조한 그의 죄가 그렇게 살해당해 마땅한가에 대한 질문은 잠시 미뤄두고, 이 이상한 엔딩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자. 아버지를 잃은 실비오의 축구 시합을 관람하는 건 어머니뿐이다. 아이들의 축구 시합이 한창일 때 어디선가 총성이 들려온다. 시합은 잠시 중단되지만 휘슬이 울리자 아이들도, 학부모들도 이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다시 축구시합을 진행한다. 이 장면은 폭력이 일상화된 멕시코에 대한 상징이다. 마약 카르텔이 국경을 넘어 미국 내에서 폭력을 행했을 때 미국은 맷을 위시한 대응팀을 꾸려 즉각 응징한다. 맷의 목표는 폭력의 근절이나 법의 수호가 아니라 구분된 두 세계, 미국과 멕시코의 경계를 확실히 하는 것이다. 케이트는 그 냉혹한 진실 앞에서 무력감에 빠진다. 뒤이어 영화는 폭력이 일상이 된 멕시코의 삶을 엔딩에 배치한다. 드니 빌뇌브 감독은 오직 이 한 장면을 위해 실비오의 숱한 이야기들을 중간중간 깔아둔 것이다.

<시카리오>를 향한 불만과 윤리적인 문제는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드니 빌뇌브 감독은 세계를 바꾸거나 메시지를 설파하는 것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저 지금 세계의 모습이 이러하다는 걸 증명하는 것에서 멈춘다. 이를 두고 혹자는 소년이 계속 공을 찰 것인가, 총을 쥘 것인가에 대한 질문, 세계에 대한 책임을 방기했다고 비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잉여로운 숏들이야말로 매끄러운 연결과 호흡에 균열을 일으키는 쐐기라는 점을 상기하자. <시카리오>는 케이트의 시점과 실비오의 시점, 두 시공간이 병행하는 서사가 아니다. 물리적으로 그렇긴 하지만 병행이라 하기엔 실비오의 시점은 분량이나 밀도에서 현저한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이 숏들은 중요하다.

알레한드로와 조우하기 전까지의 실비오의 숏들은 다른 층위의 세계다. 실비오는 케이트가 속한 사건의 흐름이나 인과관계에 속해 있지도 않고, 케이트는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이들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말하자면 이 숏들은 케이트로부터 완벽하게 단절되어 있다. 케이트는 마치 스크린을 마주한 관객처럼 주어진 자리에서 미국의 폭력과 멕시코의 폭력을 목격하고 그 정보들에 압도당한다. 스크린이 제시한 관람체계에 복속하고 이후 의심하지 않는 관객처럼 가혹한 체험을 거친 후 자신의 믿음을 깨고 새로운 세계의 단면을 진실이라고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 결론이 과연 진실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드니 빌뇌브 감독은 거리를 둔다. 다시 말해 케이트의 위치가 고전적인 스크린 앞에 꼼짝없이 묶이는 관객과 닮은 것에 반해 드니 빌뇌브는 전통적인 관객의 위치를 미세하게 흔들어 우리를 스크린으로부터 최대한 떨어트리려 애쓴다.

3.

<시카리오>에는 여느 영화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독특한 숏들이 몇 가지 있다. 케이트가 멕시코로 건너갈 때 카메라는 익스트림 롱숏으로 비행기의 그림자와 산맥의 구겨짐까지 담아낸다. 알다시피 이러한 부감숏은 비현실적인 시점이며 대개 스펙터클에 봉사한다. 심지어 이 영화에서는 조감을 넘어 위성숏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치 높은 시점의 화면들을 종종 보여준다. 국경지대의 끝도 없이 뻗은 도로, 멕시코 사막의 황량함, 후아레즈의 전경 등 근래 보기 드문 익스트림 롱숏의 향연은 그 자체로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안긴다. 바꿔 말하자면 매우 영화적인 시점들이다. 이 비현실적이고 때때로 아름답기까지 한 장면들은 도시의 살벌한 분위기로부터 끊임없이 관객을 떼어놓는다. 스크린 속 압도적인 폭력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를 쾌감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스크린이라는 안전한 막이 우리의 안전을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빈번한 부감숏과 익스트림 롱숏은 관객으로 하여금 이것이 장르적인 순간들임을 계속 자각하도록 유도한다. 빼어난 촬영과 유려한 편집 차원일 뿐 아니라 일종의 거리두기가 이루어지는 장치인 셈이다. 초반 애리조나주 ‘죽음의 집’에서의 총격 신이 클로즈업 위주로 구성된 사실감 넘치는 액션인 데 반해 후아레즈에서의 총격 신은 풀숏을 빈번하게 활용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라고 볼 수 있다.

<시카리오>는 뉴스나 보도화면이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멕시코의 참상을 전한다. 관찰자의 입장에서 한발 떨어져 바라보는 이와 같은 숏들이 쌓일수록 영화는 실제와 같은 현실감을 안기는 대신 재구성된 사건을 총체적인 시점으로 볼 수 있도록 이끈다. 대표적인 이미지가 영화 종반 멕시코 국경지대를 침투하는 1인칭 슈팅 게임을 연상시키는 화면들이다. 야간 투시경과 위성화면으로 구성된 이 숏들은 차갑고 기계적인 시점에서 사건을 재구성한다. 여기서 느낄 수 있는 생생함은 여느 장르영화가 재현한 사실성과는 조금 다르다. 긴박감이 넘치지만 실재가 아니라 실제를 흉내낸 효과라는 점에서 게임의 감각으로 이 상황을 대리체험하는 것이다. 이 모든 이질적인 숏들은 스크린과 관객의 간격을 벌리고, 전통적인 개념에서의 관객의 위치를 뒤흔들어 우리를 고민에 빠뜨린다. 사실적으로 재현할수록 스크린의 벽은 되레 두꺼워지기 때문이다. 관객은 케이트의 먹먹함에 일방적으로 동화하는 대신 맷, 알레한드로, 케이트, 이 3인의 엇갈리는 욕망을 부감으로 내려다볼 수 있는 ‘거리’를 획득한다.

우리는 케이트가 이 사건의 온전한 목격자가 아님을 잊어선 안 된다. 케이트는 테두리 바깥의 폭력을 목격했지만 끝까지 실비오를 보진 못했다. 반면 관객은 케이트와 실비오 두 세계를 목격한다. 실비오의 숏들은 케이트에 속한 장면들과 다르게 중성적이다. 알레한드로라는 폭력과 교차하기 전까지 그들은 특정 방향을 지시하지 않고 그저 평범한 일상에 속한다. 그 뒤에 무슨 장면이 연결되느냐에 따라 이 숏의 의미가 결정되는 것이다. 엔딩에 이르러서야 그 일상이 끔찍한 폭력과 얼마나 얇디얇은 막을 사이에 두고 겹쳐 있는지 알게 된다. 그럼에도 케이트는 그 사실을 끝내 알지 못한다. 따라서 케이트는 이 영화의 온전한 목격자가 될 수 없다. 그녀는 맷과 알레한드로가 교차하는 시선의 매개일 따름이다. <시카리오> 전반에 깔린 무력감, 세계의 불가역성을 온전히 케이트의 시점으로 해석하기엔 곤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케이트의 무기력한 심정에 감화되는 것과 이 영화의 먹먹함에 동조하는 건 별개의 문제다. 전자는 세계의 불가역성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고, 후자는 현실을 인정하고 다음 걸음은 각자에게 맡기는 것이다. 전자가 무책임한 방기라면, 후자는 불편한 진실에서 눈 돌리지 않으려는 결의에 가깝다.

4.

스크린과 관객은 계약 관계다. 관객은 스크린에 불이 들어와 있는 한 저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이 사실인 양 받아들이기로 약속하고 그 자리에 앉아 있다. 물론 그 환영이 강렬하여 스크린 바깥까지 잔영을 남길 때도 있다. 일부 확장영화들은 스크린을 다면화하거나 관객의 위치를 변화시키는 방식으로 그 잔영을 스크린 바깥까지 늘리려 시도한다. 미래에 어떤 형태의 영화가 등장할지 모르지만 아직까진 스크린이라는 얇지만 두터운 막이 물리적으로 제거되는 일은 불가능하다. 아무리 한없이 투명에 가까워져도 거기엔 스크린이 있고 관객의 위치는 그 맞은편에 마련되어 있다.

<시카리오>는 근래 어떤 영화보다도 흡입력 있게 관객을 빨아들인다. 정확한 숏과 틈 없는 편집, 긴장감의 배분 덕분에 그야말로 영화 전체가 서스펜스 덩어리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단지 장르적 쾌감을 위해 질문을 방기하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건 중간중간 스크린에 균열을 내는 이질적인 시점들, 화자들, 관찰자의 자각 때문이다. 알레한드로의 경고대로 얼핏 ‘시곗바늘만 보는’ 것처럼 보였던 케이트는 종막에 이르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시계의 작동원리를 깨닫는다. 후아레즈 소탕 작전의 유일한 관객이었던 케이트는 끝내 스스로 부정하던 것들의 일부가 되어 미국과 멕시코의 경계를 찢고 위선의 대열에 합류한다. 영화 말미 케이트 주변을 맴도는 비애는 진실을 자각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통과의례의 결과다. 스크린 안쪽이 아무리 들끓어도 안전한 관객의 자리를 보장받는 우리는 여기서 좀더 나아가 한층 높이 올라간 부감 시점으로, 폭력의 작동원리는 물론 세계를 가르는 경계까지 조망한다. 이는 서사의 결과라기보다는 형식의 효과에 가깝다.

당신은 <시카리오>의 엔딩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실비오의 아들이 등장하는 엔딩 시퀀스는 일견 서사를 정지시키고 잔혹한 세계에 대한 질문을 방기하는 것처럼 비친다. 그러나 때론 아는 것보다 그것을 아는 방식이 중요할 때가 있다. 내가 이 영화를 지지하는 첫 번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카리오>는 스크린을 투명하게 만들어 현실을 대리하는 척하지 않는다. 대신 드니 빌뇌브는 매끄러운 편집 사이 특색 있는 숏들을 요철처럼 배치해 관객을 스크린으로부터 밀어내고 지정한 위치에 앉힌다. 우리는 여전히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일어나는 일을 목격할 따름이다. 다시 말해 영화는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스타일 과잉이라고 폄하할 수도 있는 <시카리오>의 잉여들이 실은 영화가 영화일 뿐임을 경계하고 또 강조하는 고백처럼 들려, 끝내 어여쁘고 미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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