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엔틴 타란티노의 신작 <헤이트풀8>에는 <장고: 분노의 추적자>를 잇는 남북전쟁기 미국의 정치적 공기와 <황혼에서 새벽까지>의 고어, 그리고 <저수지의 개들>의 밀실 서스펜스가 공존한다. 한데 이 ‘밀실’이 아주 넓다. 울트라 파나비전 70 렌즈를 부활시켜 지난 50년간 없던 2.76:1의 화면 비율로 로버트 리처드슨이 촬영한 <헤이트풀8>에서, 뜻밖에 가장 압도적인 그림은 광대한 설경보다 실내다. 타란티노는 세트의 세부에 전례 없이 공을 들이고 다수 인물의 배치와 동선을 활용해, 미디엄숏 이상 물러나면 4인 이상이 잡히기 일쑤인 난해한 프레임을 유리하게 활용했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열 개의 인디언 인형>이 공연 중인 대형 극장의 무대를 보는 기분이다.
12/24
나의 최신 베스트 크리스마스 무비는 올가을 서울프라이드영화제에서 관람한 숀 베이커 감독의 <탠저린>이다. 오렌지 색 태양 아래 핫팬츠를 입은 사람들이 활보하는 LA의 뜨거운 크리스마스이브. 매춘으로 먹고사는 트랜스젠더 단짝 신디와 알렉산드라는 종일 걷고 또 걷는다. 마약상 남자친구 대신 짧은 징역을 마치고 출소한 신디는 그새 바람을 피운 연인의 행각에 가슴이 찢어져 상대 여자를 잡겠다고 쏘다니고, 가수가 꿈인 알렉산드라는 자비 공연을 홍보하고 클럽에 치를 돈을 버느라 다리를 쉬지 못한다. 한편 트랜스젠더에게 성적으로 은밀히 끌리는 아르메니아계 이민 택시 기사는 둘의 주변을 맴돌다, 유럽에서 명절을 쇠러 온 장모에게 덜미를 잡히고 만다. “이놈의 도시는 다 가짜 같아. 크리스마스도 가짜 같아.” 누군가 불평한다. 그러나 <탠저린>의 크리스마스 정신은, 이 무궁동의 악다구니 소란이 스모그와 함께 잦아드는 한밤중에야 가만히 드리운다. 뮤지션의 꿈도, 진정한 사랑도 아득히 멀기만 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내 인생은 끝까지 그저 값싼 흉내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엄습하는 불안에 몸이 떨려올 무렵 신디와 알렉산드라는 서로에게서 온기를 발견한다. 더도 덜도 아닌 내일 아침에도 일어나 거리로 나올 수 있게 해줄 만큼의 온기를. <탠저린>은 화각을 넓히는 어답터를 아이폰5에 부착해 단 두대의 스마트폰으로 촬영했다는 사실로 이슈가 됐다. 그러나 저예산영화의 경제성과 경쾌함은 이 영화의 부차적 미덕에 불과하다. 확장된 시야에 담긴 도시 전경은 번잡하고 지저분한 채로 아름답고, 길거리에서 몸을 부딪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보폭과 눈높이로 촬영된 거리에는 설명할 수 없는 활력이 넘친다. 그리하여 <탠저린>은 <500일의 썸머> 이후 오랜만에 LA라는 도시를 완전히 새롭게 바라보도록 만드는 영화이기도 하다. 이러한 시각적 에너지와 인물들이 짐짓 감추고 있는 페이소스가 섞여 발산되는 씁쓸한 향기가 매혹적이다. 무엇보다 숀 베이커 감독의 연출에는 ‘이웃’의 관점이 있다. 관객은 감독이 주인공을 포함한 이 구역 주민들을 잘 알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리고 이들을 감독이 충분히 안다는 사실로부터, 주류영화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종류의 섹스와 거래,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재단하지 않고 관찰하는 힘이 나온다. 카메라가 휴대폰으로 축소된 덕분에 비전문 배우들이 촬영기의 존재감에 눌리지 않고 보여주는 태연스러운 연기가 <탠저린>의 친밀한 무드에 한몫한 것은 물론이다.
12/25
크리스마스가 시간적 배경인 영화 말고 성탄 전야 파티에서 친구들과 둘러앉아 보고 싶은 영화라는 기준으로 크리스마스 무비를 고른다면 <매직 마이크 XXL>이 올해 영화 중 최고다. 스티븐 소더버그가 직접 연출한 훌륭한 20대 성장 드라마 <매직 마이크>에서 이야기를 덜어내고 순도 높은 엔터테인먼트로 탈바꿈한 이 영화가 전편과 맺고 있는 관계는 여느 할리우드 속편의 그것보다 훨씬 합리적이다(소더버그는 <매직 마이크 XXL>을 제작, 촬영, 편집했다). 남성 스트립댄서들의 공연 세트 피스들을 로드무비의 얼개로 엮어놓은 이 아이스크림 같은 영화는, 여행이라는 조건을 빌려 “스트립댄스는 진짜 직업이기 힘들어”라는 1편의 주저와 도덕적 쭈뼛거림으로부터 한시적으로 해방된다. “나의 몸과 재능으로 잘할 수 있는 일로 기쁨을 줄 수 있는데 뭐가 문제야?”라는 입장으로 돌아선다. <매직 마이크 XXL>이 내세우는 모토는 ‘성적 대상화의 평등’이다. 만약 실생활과 대중문화에서 섹슈얼리티의 상품화가 불가피하다면, 여성들이 스크린에서 대상화되는 만큼 남성의 몸을 욕망의 대상으로 제공한들 무엇이 그리 불미스럽겠냐는 주장이 노골적 대사와 에피소드로, 무엇보다 근사하게 안무하고 촬영한 퍼포먼스를 통해 쩌렁쩌렁 울려퍼진다. <매직 마이크 XXL>은 올해 가장 천진난만하게 낙천적인 영화이기도 하다. 주역 댄서들은 이성애자 남성이지만 영화 속 세계는 다양한 인종과 섹슈얼리티의 인물들로 채워져 있으며 그들의 쾌락은 불화를 빚지 않는다. 조이 투 더 월드!
말이 나온 김에 끝말잇기로 2015년 영화의 미니 비망록을 써보기로 한다. 벗어던지는 옷 말고 차려입은 옷과 분장으로 말하자면, 마리옹 코티야르가 올해 가장 인상 깊은 스크린 속 의상과 메이크업의 단골 모델이다. 영화의 테마를 미니어처로 줄여놓은 듯한 <이민자>의 싸구려 자유의 여신상 코스튬은 그중 3등이다.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 해고 위기에 놓인 산드라가 동료 노동자들의 지지를 호소하기 위해 가가호호 발품을 팔고 다니는 주말에 입었던 핑크빛 민소매 상의는 어떤 옷보다 선명히 눈에 새겨졌다. 여름의 녹음 속에서 두드러진 이 간소한 옷은 그녀의 다급함과 무방비함, 더위와 피로를 전한다. 또한 무감동하고 대동소이한 공공 주택단지의 벽면과 대비를 이뤄 인물을 더욱 오도카니 외로워 보이게 한다. 의상과 미술에 전반적으로 공들인 영화 <맥베스>에서도, 코티야르가 분한 레이디 맥베스의 차림은 빛난다. 맥베스의 즉위를 전후해 그녀의 의상은 진흙투성이 배경과 하나되는 어두운 색으로부터 결백을 강변하는 듯한 과도한 화이트로 넘어간다. 메이크업은 좀더 상징적이다. 눈과 이마까지 엷게 뒤덮은 푸르스름한 그녀의 독특한 아이섀도는 스코틀랜드 남자들이 전장에 나갈 때 얼굴에 칠하는 검댕의 등가물이 아닐까 짐작하게 된다. 아쉽게도 저스틴 커젤 감독은 레이디 맥베스에게 의상만큼 딱 들어맞는 심리적 궤적을 부여하지는 못했다. “젖을 먹여봐서 아이의 사랑스러움을 잘 알지만 거사 앞에서라면 젖꼭지를 빼고 머리통을 바술 거예요”라고 속삭이던 그녀는, 영화 후반 남편이 아이들까지 도륙하자 충격을 견디지 못해 미쳐가는 것처럼 묘사된다. 설득력 있고 생생한 올해의 ‘레이디 맥베스’는 정작 <모스트 바이어런트>에 있다. 제시카 채스테인이 연기하는 1980년대 뉴욕 여성 안나는 남편과 석유운송회사를 운영한다. 사업은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상속된 재산이다. 언뜻 미팅에 동행하고 회계를 보는 섹시한 내조자로 보이지만 안나의 내면에는 딸 아닌 사위에게 사업의 책임을 넘긴 아버지에게 받은 박탈감과 중요한 일은 자기 혼자 하는 줄 아는 남편을 향한 조소가 숨겨져 있다. 물론 그녀는 딴주머니를 찬다.
12/26
폭력과 패션이 키워드로 부각된 영화로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이하 <킹스맨>)를 빠뜨릴 수 없다. 이 첩보영화는 <007 카지노 로얄> 이전 007 시리즈 스타일로 회귀해, 옷 잘 입고 싸움 잘하고 여자를 손쉽게 사로잡는 알파 메일(alpha male) 판타지로 돌아간다(매튜 본 감독은 <007 카지노 로얄> 감독으로 물망에 올랐다 탈락한 적이 있다). 그러나 널리 회자된 콜린 퍼스의 대사, “매너가 남자를 만든다” (Manners maketh man)가 어색하게도, <킹스맨>이 계급과 젠더를 다루는 태도는 별로 신사적이지 않다. 이 영화가 전제하고 있는 신사, 혹은 멋진 남자에 대한 관념은 남성의 물리적 힘과 신분, 소유물에 한정돼 있어 시대에 한참 뒤떨어진다. 철 지난 화보가 즐비한 20년 지난 남성 잡지를 들춰보는 느낌이다. 게다가 영화 말미에 튀어나온 섹스 관련 농담은 연말까지도 라이벌이 등장하지 않은 올해 최악의 조크다. 비단 거기 담긴 차별적 관점 때문만이 아니라 재미없고 불필요한데 중요한 지점에 구태여 집어넣은 센스가 최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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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예수는 신이 보낸 것이 아니라 유아독존 아버지에게 반발해 가출한 것이다. 자코 반 도마엘 감독의 <이웃집에 신이 산다>에 의하면 그렇다. 오빠 J.C(Jesus Christ)의 뒤를 따라 인간 세상으로 탈출한 소녀 에아는 사고로 한팔을 잃은 아가씨, 사랑에 목마른 노부인, 성도착자, 여자가 되고 싶은 병약한 소년 등을 여섯 사도로 선택한다. 고독하고 병든 이들의 가슴에 하나씩 들어 있는 고유의 음악에 귀 기울여 그 리듬과 조화로운 삶을 찾게 거들어주는 과정이, 에아가 새로 쓰는 ‘신약’의 서사다. 이 기발한 여섯 복음서는 각각 사도들이 내면과 화해하는 순간으로 정점에 도달한다. 어린 날 춤을 추다 팔을 잃은 후 웃음도 잃은 채 살아온 오렐리(로라 벨린든)에게 그 순간은, 식탁 위에서 홀로 춤추고 있는 손과 마주친 어느 깊은 밤 찾아온다. 오래전 그날부터 지금껏 한번도 멈추지 않았던 것처럼 자유롭게 춤추고 있는 손과 오렐리는 마침내 악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