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이용철의 영화비평] 이상향은 없다
2016-01-19
글 : 이용철 (영화평론가)
<헤이트풀8>, <역마차>와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 사이의 어떤 지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헤이트풀8>

모든 웨스턴은 무정부적이다. 첫 번째 웨스턴의 주인공은 강도였다. 수정주의 웨스턴이라고 해서 다를 건 없다. 아니, 수정주의쪽으로 오면서 더 무정부적으로 변했다. 그렇다고 해서 웨스턴이 정치적 아나키즘에 딱 들어맞는다는 뜻은 아니다. 아나키즘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인 ‘권력과의 관계’에서 그러하다는 말이다. 웨스턴의 주인공은 권력에서 벗어나 자유를 좇는 자들이다. 그들이 말을 타고 어디로 달려가는지 바라볼 필요가 있다. 간혹 그것이 <헤이트풀8>(2015)처럼 지옥으로 판명날 때도 있지만, 웨스턴은 무법자가 찾아가는 공동체의 이상향에 관한 영화다. 기억하라, 웨스턴은 19세기에 관한 이야기다. 이상하게도 관객은 무법자들의 세계를 동경한다. 당신은 언젠가 <내일을 향해 쏴라>(1969)의 부치 캐시디와 선댄스 키드를 사랑한 적이 있다. 혹은 <와일드 번치>(1969)의 불한당들은 어떤가. 그런데 또 이상한 것은 당신이 그들을 사랑하는데도 정작 그들이 꿈꾸던 세상이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헤이트풀8>는 그 이유를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시선 아래 찾아보는 작품이다.

서부의 소박한 공동체

존 포드의 <역마차>(1939)에서 마차를 모는 자는 겁쟁이 아저씨 벅이다. 탈옥수 링고를 잡을 목적으로 탄 보안관을 포함한 총승객 수는 (공교롭게도 <헤이트풀8>와 같은) 여덟이다. 탈옥한 청년, 전직 창녀, 임신부, 의사, 도박사, 은행가, 주류 판매원 사이의 계급과 성향의 차이로 인해 갈등을 빚지만, 그들은 곧 외부의 적인 아파치로 인해 내부적으로 결속된다. 그리고 아이의 탄생으로 갈등은 해소된다. 엔딩에서 보안관은, 탈옥한 남자 링고와 창녀가 그들만의 공간으로 도망칠 수 있도록 풀어준다. 곁에서 멀어지는 마차를 보던 주정뱅이 의사는 “저들은 문명의 축복으로부터 구원되었군”이라고 답한다. 국경 너머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조용히 살아가기를 꿈꾸는 링고는 구닥다리 아나키스트다. 존 포드의 경력에는 이상한 부분이 여럿 발견된다. 그는 배우 시절 D. W. 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1914)에서 KKK단의 일원으로 출연한 적이 있다. 할리우드에서 매카시즘의 광풍이 불 때 의연하게 행동했던 사람도 그였다. 리버럴한 민주당 지지자이자 반역자로 스스로를 규정한 그였지만, 그가 아나키스트까지 지지했을 리 만무하다. 그러나 웨스턴 감독으로서 권력에 대해 품었던 태도가 <역마차> 같은 작품을 만들었다고 본다. 적어도 그는 이상향의 꿈을 지녔던 사람이다.

로버트 알트먼의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1971)은 <역마차>와 반대 지점에 있는 작품이다. 도박꾼과 매춘부가 손을 잡고 광산촌에서 사업을 벌인다. 내내 비와 눈이 내리는 추잡한 거리 아래로 사람들은 술, 돈, 섹스 같은 욕망에 젖어 산다. 서부 공동체의 미덕은 찾아보려 해도 없다. 마침내 맥케이브의 돈벌이를 탐내는 거대 자본이 폭력적으로 접근한다. 폭설이 내리는 어느 아침, 맥케이브는 킬러들에 쫓기다 죽음을 맞는다. 그의 얼어붙은 몸 위로 하염없이 눈이 내린다. 그것도 모른 채 밀러 부인은 중국인의 아편 가게에서 취한 상태로 깨어난다. 같은 시간에 마을에서 가장 황폐한 건물이던 교회에 불이 난다. 사람들은 일렬로 서서 물을 날라 불을 끈다. 그들은 환호하지만 그들이 앞으로 공동체의 삶을 이어갈 것 같지는 않다. 알트먼은 서부의 소박한 공동체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자본주의의 냉혹함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역마차>에서 마차는 정거장에 두번 들른다. 거기에는 <헤이트풀8>의 ‘미니의 잡화점’ 같은 가게가 있다. 거기서 말을 쉬게 하고, 사람들은 밥을 먹고 차를 마신 뒤 휴식을 취한다. 두 번째 정거장에서는 하룻밤을 지내기도 한다. 고전 웨스턴에서 궁금한 점은 인물들의 행위에 화폐가 개입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누구도 그들에게 얼마를 내라고 말하지 않으며, 그들도 얼마를 내겠노라고 말하지 않는다. 흡사 집단 안에서 무료 서비스가 제공된다는 듯이 군다. 물론 교묘하게 숨겨진 부분이 있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고전 웨스턴을 볼 때만큼은 모든 것을 서로 나누는 아름다운 공동체라는 착각을 할 수밖에 없다.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에 오면 모든 게 달라진다. 모든 재화와 노동은 화폐로 환산된다. 밀러 부인과 자려면 거금 5달러를 지불해야만 한다. 같은 웨스턴 장르의 영화지만 차갑고 동정 없는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을 보노라면 <역마차>의 세상이 돌변했다는 인상을 받는다. 두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그리 다르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두 영화가 30년의 간격을 두고 만들어졌다는 점뿐이다.

아나키스트들의 싸움

<헤이트풀8>는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미국 서북부 와이오밍의 한 귀퉁이에서 벌어진 일을 이야기한다. 가운데가 꺾인 이야기라는 점에서 쿠엔틴 타란티노가 그간 만든 대다수의 영화와 전개방식이 크게 다르지 않다. 여덟 녀석이 등장해 모두 죽는 <저수지의 개들>(1991)과 닮았고,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2009)의 첫 챕터를 확장시킨 느낌도 든다. 종종 언급되는 존 카펜터의 1982년 작품 <괴물>의 영향도 여러 군데에서 보인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이름이 불려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특히 눈보라로 산장에 갇힌 손님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추리극인 <쥐덫>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그런 것들에 대해 글을 쓸 수도 있겠으나, 나는 <헤이트풀8>가 <역마차>와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 사이의 어떤 지점에 있는지 궁금했다. 웨스턴에서 왜 꿈이 사라져버렸는지 타란티노가 알고 싶어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급조된 상상이 옛 무정부주의자들의 강령보다 더 허점투성이지만 내 생각을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헤이트풀8>의 다섯 챕터는 표면적으로 ‘미니의 잡화점에 모여든 사람들 중에 누가 악녀 데이지 도머그의 편인지’ 가리려는 이야기다. 현상금 사냥꾼 루스는 도머그를 사형지인 레드락까지 데려가 거액의 현상금을 받으려고 한다. 그외에 또 다른 현상금 사냥꾼인 워렌, 자칭 레드락의 새 보안관이라는 매닉스, 미니 대신 잡화점을 맡고 있다는 밥, 교수형 집행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모브레이, 도축업자 게이지, 장군 출신 스미더스는 의심의 눈초리를 감추지 않는다. 적은 내부에 있기에 그들은 서로를 의심한다. 타란티노는 특유의 대화의 예술을 통해 각자의 면모를 은밀하게 드러내기를 시도한다. 인물끼리 일대일의 대화를 나눌 동안, 나머지 인물은 연극의 무대장치라도 되는 양 조용히 선을 넘지 않는다. 그들 사이에서 중요하게 취급되는 것은 ‘어떤 성향을 지니고 무엇을 하느냐’다. 남북전쟁 이전의 미국에 대한 상상으로 <장고: 분노의 추적자>(2012)를 찍었던 타란티노는 <헤이트풀8>에서 지금까지 이어지는 현재형으로서의 전쟁을 이야기한다. ‘평화를 가장해 남과 북으로 나뉜 정서, 인종 차별, 대의를 위한 희생, 정의의 소중함’ 등은 인물들이 나누는 이야기의 핵심이다.

<저수지의 개들>이 악당들 내부에서 무너져 내리는 블랙코미디라면, <헤이트풀8>는 서로를 분석한 결과 편을 나눈 후 벌이는 게임이다. 한쪽이 도머그를 중심으로 그녀를 죽음에서 해방시키려는 세력이고, 다른 한쪽은 정의를 구현하려는 명목으로 그녀의 패거리를 분쇄하려는 편이다. 나는 여기서 감히 도머그의 패거리를 아나키스트들이라 부르려 한다. 닥치는 대로 살인을 일삼아 거금의 현상금이 붙은 그들이 아나키스트들이라니. 그들은 유일하게 자본의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이다. 악당을 처형하는 걸 당연한 일로 여기는 루스와 워렌은 기실 거액의 현상금을 뒤쫓는 종자들일 뿐이고, 그들의 총 아래 슬슬 기는 매닉스와 스미더스는 남부의 비열한 변절자들이거나 잔당일 따름이다. 도머그의 패거리는 다르다. 그들은 아마도 거물급 권력자를 건드린 까닭에 거액의 현상금 수배자가 된 자들일지도 모른다. 그들의 눈에는 잡화점을 운영하는 흑인 미니와 점원들조차 백인의 권력 아래 기생하는 존재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미니가 박하사탕 5개에 5센트를 받고, 점원이 젤리빈을 즐거이 팔려고 꺼내는 순간에 패거리의 총이 폭발하는 건 그래서다.

사라진 꿈, 남는 것은 죽음

오프닝 크레딧에서 제목에 이어 눈을 사로잡는 것은 눈 덮인 십자가다. 나무로 된 예수는 새뮤얼 풀러의 <지옥의 영웅들>(1980)의 첫 장면에 등장하는 십자가 예수상과 꼭 닮았다. 2차대전에 나서는 노병이 1차대전의 마지막 날을 기억할 때 등장하는 예수상이다. 그날, 그는 그 아래에서 독일 병사를 죽였다. 두번의 재앙을 초래한 인간의 눈에 신은 죽었음이 분명하다. 그 시대를 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헤이트풀8>의 엔딩은 십자가상을 정확하게 뒤집은 시선으로 끝난다. 이제 나는 죽은 신을 보는 게 아니라, 죽은 아나키스트 데이지 도머그의 시선으로 곧 죽을 두 남자를 바라본다. 좋게 말해 리버럴한 북군 출신 워렌은 변절한 남부인 매닉스의 도움으로 악녀의 목을 매단다. 그들의 처지라고 나을 건 없다. 워렌은 불알에 총을 맞아 곧 죽을 것이고 매닉스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뭔가 옳은 일을 했다고 착각하고 거짓 웃음을 짓는 두 녀석을, 그녀는 죽으면서 바라본다. 뒤에 걸린 눈신발이 날개처럼 겹쳐져 그녀는 죽음의 천사처럼 보인다.

국경 너머에서 연인과 살고 싶었던 링고처럼, 도머그의 패거리는 멀리 멕시코로 도피해 누군가로부터 지배받지 않고 살려던 사람들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그들은 정치적인 아나키스트는 못 된다. 그들의 삶의 방식은 아나키즘의 현실성으로부터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다. 심지어 그들은 고전적 무정부주의의 잣대로 보아도 한심하고 부적합한 불한당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을 부정한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아나키즘의 씨앗을 찾을 수 있을까. 어떤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이기를 원했던 그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권력에 저항했다. 그리고 자기들만의 소박한 공동체 안에서 살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들의 꿈은 허락되지 않았다. 폭력(과 혁명)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국가와 질서와 억압 아래 숨기를 원했다. 요즘의 아나키즘은 현실성을 너무 강조하는 건 아닐까. 그들은 고전적 무정부주의자들의 이상향을 비판하곤 한다. 하지만 아나키스트에게는 현실보다 꿈이 더 소중하다. 일찍이 아나키스트이자 페미니스트인 에마 골드먼이 말하지 않았던가. ‘더이상 꿈꿀 것이 없음은 죽음을 의미한다.’ 그래서인지 <헤이트풀8>는 모두가 죽으면서 끝난다. 지금껏, 문 너머로 사라지는 존 웨인의 뒷모습은 웨스턴의 이상적인 엔딩이었다. 하지만 문은 닫혔고, 서부의 남자는 결코 문 너머의 이상향으로 걸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타란티노의 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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