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터/액트리스]
[새뮤얼 L. 잭슨] 선과 악의 경계를 넘어
2016-01-19
글 : 김현수
<헤이트풀8> 새뮤얼 L. 잭슨
<헤이트풀8>

영화 2016 <시라크> 2015 <헤이트풀8> 2015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 2015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 2014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 2014 <로보캅> 2013 <올드보이> 2012 <장고: 분노의 추적자> 2012 <어벤져스> 2011 <퍼스트 어벤져> 2011 <토르: 천둥의 신> 2010 <아이언맨2> 2009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2009 <스피릿> 2008 <아이언맨> 2007 <1408> 2005 <스타워즈 에피소드3: 시스의 복수>

드라마 2013 <에이전트 오브 쉴드> 2011 <더 마운틴탑>

착한 편인지 나쁜 편인지 아무래도 분간이 안 되는 묘한 미소, 은근히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리드미컬한 웃음소리, 저음과 고음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특유의 날카로운 억양, 여기다 세계 욕 배틀 대회가 있다면 한번 이상은 꼭 챔피언 자리에 올랐을 법한 무시무시한 욕설까지. 많은 영화 팬들이 새뮤얼 L. 잭슨의 대표적인 연기 특징이라며 꼽는 것들이다. 소위 말하는 꽃미남 티켓 파워를 자랑하는 배우도 아닌데 그는 어느새 해리슨 포드에 이어 역대 북미 최고의 흥행 수익을 올린 배우 2위에 올랐다. 심지어 오른 게 아니라 얼마 전까지는 그가 1위였다. 배우의 인지도를 단순 비교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윌 스미스나 모건 프리먼이 아니라 새뮤얼 L. 잭슨이라니 놀랍지 않은가. 그 비결은 일단 그가 21세기 할리우드에서 가장 거대한 두개의 프로젝트 <어벤져스>와 <스타워즈> 시리즈에 모두 출연했기 때문이다. 단지 출연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코믹스와 판타지를 기반으로 하는 두 영화 세계에서 각각 쉴드의 수장 닉 퓨리와 마스터 제다이 메이스 윈두라는 상반된 캐릭터를 모두 연기할 수 있었다는 데 주목하자. 그건 역시 다른 누구도 아닌 새뮤얼 L. 잭슨이기에 가능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영화배우로서 선함과 악함, 양극단의 캐릭터를 자유자재로 표현할 수 있는 그의 연기력은 출연작 전체의 특징으로 드러난다. 이를테면 쿠엔틴 타란티노 영화에서 그가 주로 연기한 캐릭터는 악질 중에서도 최악의 악당 축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펄프 픽션>에서 치즈 버거를 좋아하는 건달 줄스 윈필드는 지금의 새뮤얼 L. 잭슨이란 배우를 만들어준 일생일대의 캐릭터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는 성경 구절을 읊으며 방아쇠를 당기는 극악무도한 건달이다. <재키 브라운>의 징글징글한 마약밀매업자 오델 로비나 <장고: 분노의 추적자>의 악랄한 하인 스티븐 역시 흑인의 정체성을 역이용하는 지독한 캐릭터였다. 뿐만 아니라 <로보캅>의 오프닝을 장식하는 극우 성향 TV 방송 진행자 팻 노박이나 프랭크 밀러 감독의 영화 <스피릿>의 악당 옥토퍼스, <언브레이커블>의 엘리야 프라이스 등도 모두 새뮤얼 L. 잭슨이 갖고 있는 ‘다크 사이드’의 매력을 적절히 이용해 탄생한 캐릭터였다.

반면에 그와는 반대의 영역에 선 인물들이라 할 수 있는 영화들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대표적으로 <다이하드3>에서 테러사건에 연루되는 전파상 제우스나 <롱 키스 굿나잇>의 삼류 탐정 밋치 헤니시 혹은 <네고시에이터>에서 동료의 억울한 죽음을 파헤치기 위해 인질극을 벌이는 형사 데니 로맨이나 <타임 투 킬>에서 인종차별에 희생당한 딸을 대신해 복수하는 칼리 하일리 등 주로 1990년대 후반에 새뮤얼 L. 잭슨이 <펄프 픽션> 이후 선택했던 캐릭터들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이 그의 출연작 가운데 비교적 선한 영역에 놓인 인물들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선함의 정점에 놓인 캐릭터가 바로 <스타워즈> 시리즈의 제다이 메이스 윈두이다. 출연작 전체를 아우르는 복잡한 캐릭터의 양상을 어렵지 않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는 점에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8번째 영화 <헤이트풀8>의 마커스 워렌이 과연 어느 편인지를 판단해보는 것은 새뮤얼 L. 잭슨이란 배우의 매력으로 향하는 일종의 지름길이다.

남북전쟁이 끝난 이후의 시대가 배경인 <헤이트풀8>에서 그가 연기하는 마커스 워렌은 전직 장교 출신으로, 지금은 지명수배된 악질 범죄자들을 잡아 법원에 넘기는 일을 하는 현상금 사냥꾼이다. 새빨간 타이를 매고 쌍권총을 양 허벅지에 두른 채 눈 덮인 설원 위를 누비는 그는, 어디인지 모를 레드락이란 도시로 가는 마지막 마차에 무임승차한다. 그가 방금 죽인 세구의 시체를 레드락까지 운반해야만 현상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캐릭터의 등장만으로는 관객이 당연하게도 가장 먼저 강인한 폭력적 성향과 마주하겠지만, 어쨌든 이 정도의 정보만으로는 선과 악의 경계를 나누기가 어렵다. 물론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서서히 밝혀지게 될 그의 분노의 원인이 곧 어느 편인지를 결정짓는 열쇠가 되기는 한다. 거기에는 영화 전체의 주제의식뿐만 아니라 타란티노 감독이 새뮤얼 L. 잭슨을 이 영화에 캐스팅한 이유도 함께 담겨 있을 것이다.

흑인 장교 출신 현상금 사냥꾼 마커스 워렌의 증오심이 가리키는 건 다른 누군가라기보다는 ‘흑인’이라는 정체성을 지닌 자기 자신에 가깝다. 그는 흑인으로 태어나 백색 지옥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백인들을 무장해제시켜야”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즉, 내가 먼저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고 마는 폭력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보다 더욱 강력한 증오심 혹은 쌍권총으로 대표되는 폭력을 품고 사는 수밖에 없다. 그럼 그의 폭력을, 쌍권총을 우린 어디에 위치시켜서 생각해야 할까. 이쯤에서 다시 두 부류로 나눠본 그의 출연작 속 캐릭터 유형을 돌이켜보자. 새뮤얼 L. 잭슨이 연기하는 영화 속 캐릭터들이 영화 안에서 휘둘렀던 폭력의 유형 중 과연 어떤 것을 옹호해야 할지 고민되는 영화들이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타임 투 킬>의 주인공 카일은 자신의 딸을 죽인 인종차별주의자들을 직접 쏴죽이고는 “결코 후회가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1971년작인 동명 영화를 리메이크한 <샤프트>의 존 샤프트 형사는 인종차별주의자 갑부 아들(크리스천 베일)에게 방아쇠를 당긴 피해자의 엄마를 향해 슬쩍 미소를 지어 보인다.

새뮤얼 L. 잭슨이 60여편 넘는 영화에 출연하며 선과 악의 경계를 넘나들면서도 일관적으로 벗어나지 않고 던지는 질문이 바로 마커스 워렌의 쌍권총이 아닐까. 인종과 폭력. 지금의 미국 사회 혹은 전세계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들 말이다. 새하얀 설원이 배경인 <헤이트폴8>에서 타란티노 감독이 새뮤얼 L. 잭슨에게 직접 영화의 어떤 장면 혹은 어떤 점이 가장 인상적이었냐고 묻자, 그는 “마커스 워렌이 흑인이란 사실”이라고 대답했다. 타란티노 감독의 <헤이트풀8>가, 그리고 새뮤얼 L. 잭슨이 자신의 배우 인생 전체를 통해 쉴 새 없이 세상에 던지는 메시지는 이처럼 그 캐릭터가 선한 쪽에 있든 악한 쪽에 있든 상관없이 모두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것 같다.

<펄프 픽션>

<펄프 픽션>의 에제키엘 스피치

“쿼터파운드 치즈 버거가 불어로 뭔지 알아? 로오얄~ 치이즈~.” <펄프 픽션>에서 햄버거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놓던 건달 줄스 윈필드는 에제키엘서 25장 17절, “내가 이렇게 그들에게 분노의 징벌을 내려 크게 복수하겠다. 내가 그들에게 복수하면, 그제야 그들은 내가 여호와임을 알게 될 것이다”라는 구절을 읊고는 주저하지 않고 방아쇠를 당긴다. 이 장면의 대사에 ‘에제키엘 스피치’라는 별명이 붙었다. 당시 평론가들은 흰자위를 부릅뜨고 광기 어린 연기를 선보인 새뮤얼 L. 잭슨을 보고는 존 트래볼타, 브루스 윌리스 등의 배우를 압도한다고 상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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