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김영진의 영화비평] 야만적인 죽음의 행렬
2016-01-26
글 : 김영진 (영화평론가)
장르 안에서 장르를 파괴하는 타란티노의 반어적 기교와 과시욕
<헤이트풀8>

<헤이트풀8>는 대살육이 벌어지는 클라이맥스 직전, 영화의 주무대인 잡화점에서 그날 아침 일어난 일들을 플래시백으로 보여준다. 혐오스런 주인공들이 서로 죽고 죽임을 당하는 결말은 얼마간 예상할 수 있었지만 주요 인물들 외에, 이 회상 장면에서 잡화점 주인과 종업원들이 나올 때 나는 당황했다. 영화의 상당 부분이 지날 때까지 그들은 서사에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었고 그렇다면 그들은 이미 죽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관객인 나는 그들이 죽을 것을 알고 어떻게 죽는지 지켜볼 수밖에 없어서 괴로웠다. 가벼운 인사치레와 무의미한 취향 테스트 같은 사소한 대화들이 오가는 가운데 나는 그들이 언제 죽임을 당할지 신경이 곤두섰다. 그들은 이 영화의 혐오스런 주인공들과 다르게 무구하고 명랑한 인물들이었다. 음식 솜씨 좋은 잡화점 주인 미니 아줌마와 종업원 젬마, 그리고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마차 조수 주디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현재의 삶에 만족하는 인간들의 하염없이 즐거운 행동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들은 그냥 순식간에 죽는다.

끽 소리 한마디 못하고 죽는 서사의 주변부 인물들의 무정한 죽음 묘사는 그들이 이 공간에서 살아선 안 되는 인물들이라는 걸 알려주는 감독의 판결 같다. 그들은 적대감으로 가득한 서부의 어느 특정 시기에 살아서는 안 될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너무 단순하고 순진하기 때문이다. 종업원이 그저 종업원일 뿐이니 살려달라고 해도 통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구하지만 상대방의 사악함을 의심하지 않고 알아차리지 못하는 바보들이다. 이들 바보 같은 민중에 비해 ‘혐오스런’ 여덟명의 주인공은 모두 어느 정도껏 강인하고 폭력적이며 못됐다. 또한 그들은 대체로 다들 자부심에 찬 연설을 할 준비가 언제라도 되어 있는 인간들인데 그것은 그들의 권능에서, 또는 권능을 잡고 있다는 그들의 착각에서 나온다. 그들 중 상당수는 법의 집행자를 자처하며 그들이 사법체계로부터 부여받은 권능이 있다고 행세한다. 사형집행인 존 루스, 현상금 사냥꾼 마커스 워렌, 보안관 크리스 매닉스가 그런 인물이다. 반대편에는 존 루스가 체포해 교수형을 시키려고 마을에 데려가는 범죄자 데이지 도머그와 그녀를 구출하려고 변장한 채로 존 루스 일행이 탄 마차를 잡화점에서 기다리는 무법자 일행이 있다. 무법자 일행도 처음에는 제법 행세깨나 하는 법집행자 행세를 하거나 크리스마스에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착한 아들 행세를 하거나 아니면 남북전쟁 때 장군이었던 과거를 자랑스러워하는데, 결과적으로 이들은 사법체계의 권능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그들만의 힘을 믿는다는 점에서 또 다른 법체계 바깥의 집행자들이다.

따지고 보면, 데이지 도머그를 돕는 패거리 못지않게 존 루스 일행도 정당한 권능이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지만 그들은 모두 자기들이 정당한 권능의 담지자인 척 행세한다. 이게 이 영화에서 웃기는 아이러니를 만들어내는 긴장의 동력인데 틈만 나면 모두 자신들이 지닌 권능의 정당함에 대해 장광설을 펴기 때문이다. 영화 첫 장면에 보이는 눈 덮인 야외의 예수상은 그런 점에서 비꼼의 대상이다. 눈보라와 태풍이 휘몰아치는 엄혹한 자연 질서에 버티고 선 예수상은 존엄하지만 이 영화의 내용은 그런 존엄함과는 거리가 멀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천장에 목매달려 죽어가는 도머그가 하나님을 찾자 마커스 워렌이 “이제야 신을 믿는군, 쌍년”이라고 말하는 것은 오프닝과 정확히 대구로 맞물리며 이게 다 신이 역사하신 해프닝이라고 불경스럽게 방점을 찍는다.

사법적 권능의 무의미함

영화 초반, 사형집행인 존 루스와 그에게 잡힌 여자(죄수) 데이지 도머그가 탄 마차에 현상금 사냥꾼 마커스 워렌이 타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보안관 크리스 매닉스가 탄 후 이들간에 벌어지는 대화의 주내용은 사법적인 권능에 관한 것이다. 이 세 사람 모두 특정인의 생사여탈권에 관한 권능이 있다고 떠벌린다. 도머그가 존 루스의 권능을 슬쩍 비웃었다가 존 루스에게 무자비하게 얻어터지고, 마커스 워렌이 신주단지 모시듯 갖고 다니는 링컨의 친필 편지를 도머그가 또 조롱했다가 다시 얻어맞고 마차 밖으로 튕겨나가 뒹구는 장면들은 이자들의 위임받은 권능에 대한 자부심을 폭력적으로 증명하는 것인데 엉망진창으로 얻어맞고도 도머그는 기죽지 않고 그들의 권능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당당한 태도를 취한다. 존 루스와 마커스 워렌, 나중엔 보안관 크리스 매닉스까지 서로 인정받을 만한 권능이 있다고 젠체하고 있을 때 도머그의 반응 화면은 이들 사이에 오가는 긴장을 깨고 이들을 견제하는 또 다른 힘의 원천으로서의 화면 지배권을 담보하는 역할을 한다(데이지 도머그 역을 맡은 제니퍼 제이슨 리의 배우로서의 존재감이 그걸 해낸다).

존 루스는 자신이 잡은 죄수를 죽여서 데려가지 않고 살려서 교수형이라는 정식 법절차를 밟아 죽게 하는 법의 대리자다. 그에 반해 마커스 워렌은 죄수를 죽여서 시체를 갖고 가 포상금을 받는 인간 사냥꾼이다. 그도 존 루스 못지않게 사법체계 권능의 담지자로 행세한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불법이지만 그는 현상금 수배라는 법의 명령을 대행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존 루스와 마커스 워렌이 의기양양하게 뻐기고 있을 때 보안관을 자처하는 크리스 매닉스는 마커스 워렌이 남북전쟁 시절 자행한 위법적인 행동을 끄집어내 비난하고 워렌은 발끈한다. 워렌은 그 상황을 변명하면서 전시상황이라는 걸 들어 위법이 아님을 강조한다. 워렌은 법의 정의를 흑인의 소수자 정체성과 연관지어 교묘히 정당화하는 데 능한 인물이다. 이는 나중에 나오는 워렌의 회상 장면에서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미니의 잡화점에 도착한 후 만난 남군 장군 샌포드 스미더스를 공격하기 위해 그는 스미더스의 아들을 포로로 잡아 성폭행을 한 후 죽인 에피소드를 털어놓는다. 피부색에 따라 모든 게 결정된다고 믿는 완고한 인종차별주의자 스미더스에게 그는 자신의 권능을 과시하며 격분한 스미더스가 자신을 공격하려 하자 그를 쏴죽인다. 마커스 워렌이 시도해 성공하는 건 법의 집행이 아니라 자기결정권에 따른 원시적인 대결이었다. 여기서 그가 입만 열면 강조하려 했던 합법적인 권능의 가치는 휴짓조각이 된다.

영화 초•중반까지의 마차 여행 장면이 법의 권능에 대한 가면놀이의 말잔치라면 미니의 잡화점에 도착한 이후 벌어지는 장면은 법의 권능으로 자신들을 포장해 행세하려던 존 루스 일행의 야만인으로서의 본질이 무법자 일행과의 대결 속에서 벗겨지는 폭력의 행사장이다. 아이러니는 그로부터 나온다. 존 루스와 마커스 워렌과 크리스 매닉스가 자부하는 법의 권능이란 건 야만의 이면을 감추는 가면일 뿐 그들이 집행하는 법질서는 늘 야만적인 폭력으로 귀결된다. 여기서 합리적인 사법체계가 개입할 틈은 전혀 없으며 그런 면에서 그들은 그들을 공격하기 위해 미니의 잡화점에서 기다리고 있던 무법자들과 동질의 인간들이다. 보안관이라는 걸 강조하며 남들과 자신을 구별하려던 크리스 매닉스가 데이지 도머그를 구하기 위해, 무법자 일행 중 누가 커피에 독을 탔는가를 판가름하는 기준은 우습게도 그가 생각하기에 ‘가장 못생긴 놈’을 지목하는 것이다. 혐오스런 여덟명 가운데 가장 문명인 행세를 하는 존 루스는 마커스 워렌과 크리스 매닉스를 변절자와 약탈자로 비난하며 제일 잘난 척 으쓱대지만 오히려 가장 먼저 죽는다. 의심 많은 마커스 워렌과 약삭빠른 크리스 매닉스에 비하면 그는 상대적으로 좀 우둔하다. 굳이 태우지 않아도 되는데 얼어죽을 뻔한 두 사람을 태운 것은 상대적으로 그가 선량한 구석이 있다는 걸 뜻하지만 이는 그가 변변히 신음도 못 내고 죽은 미니 잡화점 식구들과 약간 비슷하다는 걸 알려준다. 그 때문에 그는 가장 먼저 죽는다.

사법체계의 권능이라는 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고 등장인물들이 필요에 따라 걸치는 망토와 같은 것이며 가장 필사적인 동기는 생존에의 열망과 집요한 복수욕뿐이다. 마커스 워렌은 흑인으로서 당했던 폭력을 백인들에게 돌려주고, 데이지 도머그를 구출하려는 무법자 일행은 도머그를 해코지한 상대들에게 복수를 하려 든다. 공적인 동기보다 사적인 동기가 우선하는 폭력의 고리에서 문명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마커스 워렌의 사적 복수 동기에 인종주의가 깔려 있다는 게 사태를 조금 더 복잡하게 보이게 하는 데다, 절대 악의 현현으로 보이는 괴물성을 지닌 데이지 도머그가 사법적 권능의 담지자인 척하는 남자들의 기세에 전혀 굴하지 않는 강인함을 지니고 있다는 게 이 영화의 유일한 매력점이라는 것도 판단을 헷갈리게 한다. 여하튼 이것은 잡놈, 잡년들의 야만성을 무한히 펼쳐놓기 위해 힘껏 당긴 활시위와 같은 영화다.

‘링컨의 편지’는 이 야만성을 가리고 지탱하는 가녀린 단서다. 존 루스를 비롯해 대다수 인물들이 혹했던 마커스 워렌의 링컨 자필편지는 진위 여부가 불분명하다. 링컨이라는 이름은 존 루스와 마커스 워렌, 크리스 매닉스가 집착했던 법의 권능의 최종 담지자다. 링컨은 그들이 마음대로 행사했던 주권대리자로서의 권능을 합법화하는 이름이다. 처음엔 데이지 도머그가 그 편지에 침을 뱉었고 그다음엔 크리스 매닉스가 그 편지의 위조 여부에 의심을 품었다. 결국 맨 마지막 장면에서 죽어가는 와중에 그 편지를 읽어보고 싶다고 마커스 워렌에게 부탁한 크리스 매닉스는 그 편지를 다 읽고 슬쩍 비웃은 뒤에 찢어버린다. 그들이 지탱했던 법의 권능은, 권능의 대리자로서의 행세는 다 망상이고 헛짓이다.

단독자는 없다

망상과 헛짓으로 점철된 이 피범벅 유혈극이 서부극 장르의 외피를 두른 건 쿠엔틴 타란티노의 그간 행보에서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더 반어적인 맥락으로 다가온다. 마차 여행과 중간 역에서의 정박 동안에 벌어지는 사건들은 금방 존 포드의 <역마차>를 떠올리게 하지만 존 포드의 감상적인 인간애가 끼어들 여지가 여기엔 전혀 없다. 서로 다른 계급의 인간들이 갈등 끝에 일시적인 화합을 맺지만 끝내 문명인의 공동체에 끼어들 수 없는 단독자들로서의 남녀 주인공이 공동체를 떠나는 낭만적인 결말은 더욱 언감생심이다. <헤이트풀8>의 주인공들은 애초부터 섞일 수 없었고 그 섞일 수 없는 미움의 강도가 더해지다가 살기 위해 맺는 희미한 연대의 끝에서 결국은 다 죽는다. 이 공동체에서 예외적으로 괄호쳐질 수 있는 단독자로서의 자격 부여라는 축복은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는다.

서부가 문명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의 시공간이 아니라 돈과 생존을 위한 이전투구장이었다는 것은 스파게티 웨스턴과 할리우드 수정주의 서부극에서 이미 충분히 시연된 전제다. 타란티노는 대결 직전의 긴장감을 영화적 순간의 최종목표로 잡고 무한정이라도 늘릴 기세였던 세르지오 레오네의 수사를 대화 장면으로 끌고 들어와 하워드 혹스 코미디의 재담 비슷한 것으로 그 대화 장면들을 한껏 늘려 긴장을 끌고 나가는 전략을 구사하지만 이 경우에도 최종적으로 주인공의 단독자로서의 존재감은 주어지지 않는다. 레오네의 영화와 그 자신의 서부극에서 주인공을 연기했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풍겼던 단독자로서의 아우라 같은 것이 들어설 틈은 없다. 단독자로서의 주인공의 정체성은 고전기나 수정주의 시기를 거치면서도 줄곧 지켜졌던 서부극의 포기할 수 없는 알맹이였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서부극의 전제를 끌고 들어와 마구잡이로 부숴버리는 무제한 장르 파괴극이라 할 만하다.

오프닝의 눈보라 속 예수상은 고난의 인간 역사의 한복판에 버티고 서 있는 신의 의지의 준엄한 표상이 아니라 고난의 인간 역사 한복판에서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만신창이로 망가지고 혹사당하는 신의 의지의 가련한 표상이다. 타란티노가 끌리는 건 서부영화의 신화적 전제가 아니라 서부극이라는 배경막으로 펼칠 수 있는 기교의 전시다. 거대한 스크린에 투사되는 악한 인간들의 표정과 몸짓들, 그것들과 조응하는 성난 대자연의 기운들, 문만 살짝 열면 세차게 밀고 들어오는 눈바람, 추워서 오들오들 떠는 한기와 그것보다 더 서늘한 인간들의 마음, 이 모든 걸 화면에 담을 수 있는 카메라의 축복 속에 감독은 한놈 한놈 죽어가는 인간들에게 냉소를 보낸다. 사타구니에 정통으로 총알을 맞고 엉덩이가 움직일 때마다 신음하면서도 목매달린 데이지 도머그가 발버둥칠 때 ‘멋진 춤’이었다고 박수를 치는 마커스 워렌의 주인공으로서의 정체는 난감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흑인 현상금 사냥꾼 남성과 백인 범죄자 여성의 최후의 대결을 찍는 이 장면에서 사타구니가 뭉개진 남자와 오빠의 뇌수를 뒤집어쓴 여자가 주고받는 저주와 비난의 말들의 향연은 정치적 올바름 따위를 신경쓰지 않고 정체 불문하고 악의 현시를 열심히 증거채집하면서 즐거워하는 감독의 과시욕을 보여준다.

정의에 관한 장광설 끝에 찾아오는 갑작스런 폭력과 죽음의 연쇄극인 이 영화는 타락한 세계에서 자신만은 그나마 정의의 감각을 붙잡고 살아가고 있다고 자위하는 주인공들의 단독자로서의 정체를 발가벗겨 너는 단독자로서 자격이 없으니 다같이 죽으라고 판결한다. 마치 우리에게 이르는 것처럼. 그러나 나는 차라리 존 포드의 감상적인 인간애나 죽음의 공포 앞에 솔직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용기가 그립다. 기교에 대한 자신감과 장르 해체의 야심, 리얼리즘에의 경도가 뒤섞인 <헤이트풀8>는 너무 많이 아는 자의 과시욕으로 충만한 장르의 장송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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