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이호재] “결국 우리 인간의 이야기”
2016-02-10
글 : 윤혜지
사진 : 최성열
<로봇, 소리> 이호재 감독

<로봇, 소리>에서 해관(이성민)은 약속대로 자신이 소리를 무사히 ‘그녀’에게로 보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리를 무역선에 태워주려는 정도의 노력은 한다. 어떻게든 약속에 대한 의지를 보이려 애쓰는 것이다. 현실로 가정하면 황당한 일로 치부되겠지만, 그런 해관의 모습이 마냥 허무맹랑해 보이지만은 않는 건 이호재 감독이 하나를 받으면 적어도 반은 돌려주려는 사람이기 때문일 터다. 내놓는 말마다 약간의 냉소가 묻어나지만 그 너머엔 지킬 것은 지키며 살자는, 아니 지키겠다는 생각이라도 하면서 살자는 최소한의 선이 있다. 그는 “명함을 받아도 관리가 제대로 안 된다”며 명함의 무용을 이야기하면서도 “그렇다면 눈앞에서 전화번호를 저장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예의일 것”이라고 말하고는 바로 전화번호를 입력하는 사람이다. 또는 이야기 도중 잠시 이름이 헷갈린 스탭의 이름을 기어코 검색해 정확하게 확인시켜주(고선 자기 말이 맞지 않냐며 확답을 받아내)는 사람이다. 적당히 적당한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할까. <로봇, 소리>가 과욕을 부리지 않는 영화로 완성된 건 아마도 이호재 감독이 ‘선’을 가늠할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인 것 같다.

-데뷔작 <작전>(2008) 이후 두 번째 영화가 7년 만에 세상에 나왔다.

=행보는 갈지자였다. 두 작품을 준비하다 잘 안 됐고 <로봇, 소리>가 삼수째다. 영화사 비단길과 <작전>을 같이 하고 나서 우주정거장을 배경으로 한 SF 활극을 준비했는데 프로젝트도 크고 캐스팅에 난항을 겪어 멈췄다. 그다음엔 김대우 감독님과 격정멜로영화 <바캉스>를 준비하다 역시 캐스팅 문제로 영화가 멈췄다.

-원래 SF 장르에 흥미가 있었나보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물어보면 부담스럽다. (웃음) 관객으로서만 좋아했지 내가 만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로봇, 소리>도 SF 판타지의 무드를 가미한 휴먼 드라마잖나. 비현실적인 설정을 가져와 그걸로 드라마를 엮는 건 오래전부터 한국영화가 자주 해온 일이고 <로봇, 소리>도 그 연장에 있는 영화다. 앞으로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인 SF영화가 나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장르적으로 더 맞는 작품을 해보고 싶은 마음은 있다. 기회가 올 때 얘기지만.

-시나리오는 이소영 작가가 썼다.

=(<로봇, 소리>를 제작한 영화사 좋은날의) 정재원 대표가 내가 준비하던 첫 SF영화에서 프로듀서를 맡아줄 뻔했지만 영화가 안 되면서 내가 정 대표와 이소영 작가가 준비하던 작품에 끼게 된 거다.

-각색 중 이승연, 이지민 작가와는 어떤 논의를 했나.

=나는 팀 작업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다. 정 대표가 슈퍼바이징을 하고 이소영 작가가 쓴 원고를 이승연 작가가 한번 고치고, 내가 한번 고치고 하는 식으로 핑퐁 치듯 3년간 각색을 이어갔다. 중간에 이소영 작가가 다시 들어오면서 큰 변곡점이 생겼다.

-변곡점이라 함은.

=원래는 소년과 소리의 만남이었던 게 성인 남성과 소리의 만남이 되었고 대구 지하철 방화 참사를 주요 소재로 쓰게 됐다.

-왜 대구 지하철 방화 참사여야 했나.

=시나리오를 각색할 당시가 2013년이었다. 대구 지하철 방화 참사 10주기였는데 우연히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게 됐다. 사고야 막을 수 없었다손 치더라도 사고를 크게 키우진 않았을 수 있던 것 아닌가. 그리고 이전의 대형 참사에선 없었던, 마지막 순간에 소중한 사람에게 휴대폰으로 연락할 수 있었던 사례도 관심 있게 다가왔다.

-이야기는 크게 아저씨와 꼬마의 로드무비로, 길을 떠나 엉뚱한 여정을 겪고 제자리로 돌아오는 과정을 그린다. 그 여정에서 고려한 것들은 뭔가.

=아마 해관은 안 가본 데가 없을 거다. 웬만한 사람도 다 만났을 테니 전혀 짐작조차 가지 않고 떠오르지 않는 인물들을 만나야 했다. 기억나진 않지만 사실은 예전에 만난 적이 있던 누군가를 만나면서 여정을 끝내자는 게 기본적인 틀이었다. 작은 실마리들이 개연성 있게 이어져야 했으니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선 해관에게 무얼 줘야 할까 고민했다.

-대략 다섯개의 플래시백 장면은 각기 유주(채수빈)의 행방에 관한 실마리를 하나씩 안겨준다. 플래시백과 현실 장면을 교차로 사용하는 데에 자칫 영화가 단조로워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있지는 않았나.

=왜 없었겠나. 시나리오 작법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게, 플래시백과 내레이션은 영화 만드는 사람이 절대 쓰지 말아야 할 것이라는 금기잖나. (웃음) 하지만 그것만큼 과거를 잘 설명해줄 수 있는 장치도 없다. 기억과 실제 일어났던 일 사이의 괴리를 설명하기에도 꼭 필요했다.

-영화가 시작하는 1990년부터 영화 속 현재인 2013년까지 대구 지하철 방화 참사 말고도 예닐곱개의 이슈가 더 눈에 띈다. 도로명주소 전면 교체 사업, 2G망이 3G망으로 넘어가는 시기, 세운상가 개발계획, 국정원의 민간인 사찰, CCTV나 어플을 활용한 프라이버시 침해 그리고 세월호 참사다. 해관이 바다에 빠지는 장면이 영화 앞뒤로 나오고, 소리가 듣는 아프가니스탄 아이의 목소리 위로 “엄마, 아빠 살려주세요”라는 자막이 뜬다.

=뭘 그렇게 많이 찾았나. (웃음) 아프가니스탄 민간인 폭격도 포함할 수 있을 거다. 일단 정치적인 이슈를 불러일으키려는 목적은 전혀 없었다. 다만 세상을 보는 내 시선에 그런 이슈들이 섞여 있기 때문에 영화에 개입됐을 거다. 이야기의 개연성을 따라가다보니 절로 만나게 된 현실이기도 했다. 그런데 다른 건 몰라도 세월호 참사는 정말 의도하지 않았다. 시나리오를 쓰던 때와 시기가 맞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를 만드는 동안 뜨끔한 건 있었다. 무엇보다 상업영화가 그런 이슈를 포함하는 게 윤리적인가에 대한 고려가 먼저 있었다. 참사가 벌어진 타이밍에, 그 참사를 연상할 수 있는 이 설정을 유지하는 게 맞는 일인가 하는 고민을 많이 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해관이 물에 빠지는 건 소리가 땅에 떨어지면 부서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또 출국을 하려면 공항이나 항구를 거쳐야 하는데 공항보단 항구로 가는 게 나았으니까.

-조금 모호한 건 강지연(이하늬)의 행동의 변화다. 항공우주연구원에서 일하는 엘리트가 그렇게까지 해관을 도와줄 이유가 뭔가.

=시나리오 각색 과정에서 문제점으로 많이 지적된 부분이긴 했다. 해관에 대한 연민과, 실물로 만난 인공지능 로봇에 대한 과학자로서의 흥미가 결합된 태도가 아닐까 싶다. 또 처음엔 강지연이 남의 속마음을 알기 위해 일종의 훔쳐보기를 하는데 그렇게 도덕적 관념이 희미한 친구가 국가기관의 사찰을 당하고 나니 잘못을 깨닫고 분노하는 지점이 있을 것 같았다.

-신진호(이희준)는 자기가 하는 일이 부당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직장인으로서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다. 그를 끝내 구속수감시킨 건 일종의 보상인가.

=단죄다. 통쾌할 정도는 아니지만 캐릭터의 맺음으로 봤을 때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나온 게 아닐까. 그리고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 때로는 문제다. 그들은 자기 위치에서 일만 열심히 한다고 생각하지만 거기에 대한 정당성이나 부당성에 대해선 생각을 안 하는 것 같다. 내가 하는 일이 얼마나 정의로운가, 내 양심에 위배되지 않는가보다는 내가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가, 이로써 어떤 이익을 얻는가가 판단의 우선순위가 되는 것 같다.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게 항상 선하다고만은 말할 수 없다. 우리가 국가기관의 부당함, 자본의 횡포라고 부르는 것도 거기서 열심히 일하는 누군가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물론 그 안에서 부당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다 자신의 행동에 온전히 동의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소리의 초기 디자인을 함정석 게임 컨셉아티스트가 맡았던데 어떤 경로로 일을 의뢰한 건가.

=아는 선배의 친한 애니메이션 감독님의 친한 컨셉아티스트다. (웃음) 엎어진 첫 번째 작품할 때 소개받아 그가 우주정거장 디자인을 해줬다. 그건 미완으로 마쳤지만 그 인연으로 정 대표가 연락해서 소리 디자인을 맡겼다.

-디자인 과정에서 서로 얘기한 컨셉들이 있었을 것 같다.

=CCTV다. 지구를 감시하고 도청하는 위성이잖나. CCTV를 거꾸로 하면 소리 모양이 된다. 하지만 해관이 으레 사람 모양으로 생각하고 거꾸로 들어버린 거다. (웃음) 몸체는 야쿠르트 병도 생각나고. 가장 중요한 건 눈 주위를 둘러싼 띠다. (휴대폰에 저장한 너구리 사진을 보여주며) 이게 귀여워서 너구리처럼 소리의 눈 주변에도 띠를 둘렀다. <조니 5 파괴 작전>(1986)이나 <월•Ⓔ>(2008)를 보면 로봇의 표정을 보여줄 때 눈썹을 많이 활용하는데 소리는 눈썹이 없어서 띠를 이용했다. 띠를 하면 카메라 앵글에 따라 곡선이 달라지니 그걸로 감정표현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지만 일단 너구리가 귀여우니까. (웃음) 그런데 때마침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2015)가 개봉했다. 찍는 동안에도 전혀 생각을 못했는데 사람들이 하도 비슷하다 해서 보니 내가 봐도 실루엣이 비슷하긴 하더라. 하지만 양심을 걸고 베끼지 않았다. 누가 그렇게 대놓고 베끼겠나.

-현장에서 소리는 얼마나 움직일 수 있었나.

=눈 주변 띠가 슬라이딩해서 움직이는 것만 CG이고 나머지는 현장에서 직접 조종해서 움직였다. 감성을 자극하는 드라마이기 때문에 관객과 소리 사이의 최소한의 보이지 않는 막을 걷어내고 싶었다. 현장에서 보이스 가이드를 하는 보이스 액터도 따로 있었다. 소리를 조작하는 스탭들과 조감독까지 서너명이 한팀으로 돌아다녔다. 배우들 중 가장 스탭이 많이 붙은 배우다. 전원을 켜지 않으면 고개를 삐딱하게 하고 있는데 그걸 보고 우리끼린 ‘배우님 촬영하기 싫으신가보다’ 말하곤 했다. (웃음)

-해관이 들고 다니는 걸 보면 꽤 무거워 보이던데.

=30~40kg쯤이었다. 현장엔 소리가 세대 있었다. 하나는 전체 작동이 가능하도록 모든 정교한 부품까지 다 있는 소리였고, 다른 하나는 모양만 똑같이 만든 스턴트용 소리였다. 무겁고 비싼 진짜 기계를 물속에, 바닥에 마구 집어던질 수는 없잖나. 또 하나는 이성민 선배님이 들고 연기할 가벼운 소리였다. 이 소리가 처음에 사이즈를 확인하려고 스티로폼 보디로 만든 ‘초호기’다. 선배님은 괜찮다고, 들 수 있다고 하셨는데 그건 절대 무리였다. 의욕은 앞서셨으나…. (웃음)

-S19호라는 소리의 이름은 어디서 온 건가.

=초고서부터 그 이름이었다. 소리 같은 위성이 걔 말고도 더 있을 거잖나. 여러 대 중 19번째일 거라 생각하긴 했는데 S가 뭘 의미하는지는 모르겠다. 풀네임을 말하는 장면에선 첫 숫자만 자기가 발사된 연월일이고 그 뒤는 의미 없는 나열이다.

-심은경이 소리의 목소리 연기를 책임지는데 특유의 툴툴대는 톤이 잘 어울리더라.

=일단은 딸을 찾는 아빠의 이야기이고 유사 부녀 관계를 형성해야 했으니 스탭 모두가 암묵적으로 소리는 여자애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편집한 남나영 기사님만, 보이스 액터의 목소리를 들을 때까지도 소리를 남자라고 생각하셨다. 왜 그랬냐고 물으니 “야, 나는 고양이도 남자애만 키워!”라고 하시더라. (웃음) 뭐 그건 기사님 사정이고. (웃음) 아무튼 소리는 이십대 초반의 여성 목소리를 내야 했는데 심은경씨를 가장 먼저 떠올렸다. 목소리만 출연한다는 게 내키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은경씨는 여러모로 도전정신이 있는 배우더라.

-“보호는 고마운 것입니까”라고 소리는 두번 묻는다. 부모 자식의 관계에서 생각해볼 만한 질문인 것 같다.

=사춘기를 지나는 딸에게 아빠는 불편한 사람이다. 왠지 모르겠는데 자연스레 사이가 멀어지더라. 우리가 흔히 가족을 이야기할 때 서로 보듬어주고 챙겨주고 늘 함께하고 뭉치는 관계라고 말하지만 사실 가족은 해체를 전제로 한 공동체다. 끊임없이 독립적인 개체를 생산하는 집단이라고 생각한다. ‘함께’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나. 어떻게 떠나보내느냐도 중요하다. 대개의 부모는 나의 분신이 불안한 선택을 하는 걸 말리고 보호하고 싶어 하는데 그게 과연 당사자에겐 얼마나 고마운 걸까 생각해봤다.

-실제 따님과는….

=아직 괜찮다.

-영화에 사진으로 나오는 강지연의 남자친구 얼굴은 누구의 것인가.

=정재원 대표다. (웃음) 지금 영화 출연을 엄청나게 후회하고 있다. 우리가 가진 매우 한정된 자원 안에서 초상권 문제와 얽히지 않을 가장 좋은 사람이었다.

-에필로그에서 해관과 소리가 거쳐온 공간을 역으로 보여주는 장면엔 무언가를 기억하려는 향수 어린 무드가 있다.

=강한 비극을 맞은 사람들의 시간은 한 발짝도 더 앞으로 가지 못한 채 거기 멈춰 있다. 세상이 잠깐은 같이 슬퍼할지라도 곧 그 아픔을 극복하고 결국 당사자들만 계속 뒤처지게 된다. 에필로그에서 해관과 소리의 여정을 되짚어가는 건 영화를 만들면서 내가 한번쯤 해보고 싶었던 거다. (웃음) 중요한 건 애도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딸에 대한 해관의 감정이 조금이나마 소리에게 전이돼 소리를 위해 그가 무언가를 함으로써 2003년에서 한 발짝도 못 움직이던 사람이 ‘이젠 움직여볼까’ 하고 마음먹게 되는 과정이었다.

-생각해둔 차기작도 있나.

=기준은 항상 내가 꽂히는, 재밌어하는 이야기다. 당시 트렌드에 맞느냐 안 맞느냐에 따라 진행이 좌우되는 것 같긴 하다. 그래서 고민스럽다. 하지만 영화 자체가 취향과 표현에 대한 일이니까 나도 아직은 내가 어떤 영화를 만들게 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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