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트>(2014)가 개봉할 무렵 도경수를 만난 적이 있다. 처음으로 자신이 출연한 영화의 개봉을 앞둔 신인배우로서 개봉을 준비하는 전 과정이 생경한 듯한 얼굴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들떠 있지는 않았다. 차분하고 씩씩하게 자신이 맡은 연기를 설명해보려 했던 것 같다. <순정>(개봉 2월24일)으로 다시 만난 도경수는 그때보다 말수가 조금 더 늘었고, 시원스레 소리내 웃기도 하며, 잠시 말을 멈춘 채 곰곰 생각을 가다듬어보겠다고도 했다. 여유가 한뼘 더 생긴 것 같았다. 도경수의 말을 빌리자면 “정말 아무것도 몰랐던 <카트> 때”를 지나 “현장에서, 사람들을 통해 많이 배우고 있는” 과정 속에서 체득한 어떤 것들 덕분이 아닐까 싶었다. <순정>의 현장에서 도경수는 무엇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온 것일까. 다음은 첫사랑의 열병, 우정의 아릿함이라는, 태어나 처음으로 휩싸여본 감정 앞에 당황해하는 열일곱살 범실 역을 맡은 도경수의 대답이다.
“순정(純情)이라는 말은 아예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는데….” <순정>의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도경수의 솔직한 마음이 그랬다. 누군가는 ‘사랑의 종말’을 말하기까지 하는 시대에 순정이라는 말은 벅차게 들릴 만도 했다. 이제 막 만 스물셋, 푸르스름한 때에 접어든 도경수에게는 더욱 그랬을 거라 짐작된다. 영화의 한 장면 한 장면을 찍어나가면서 도경수는 순정의 의미를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순정>은 1991년, 여름방학을 맞아 뭍에 있다 고향인 섬마을로 돌아온 열일곱살 동갑내기 다섯 친구들의 사랑과 우정의 기억 속으로 관객을 이끈다. 그저 좋아서 좋았던, 순순(恂恂)한 시절에 대한 이야기다. 그 속에서 도경수는 섬에 사는 친구 수옥(김소현)을 향한 애틋한 마음을 품은 소년 범실이 되었다. 숫기라고는 없고 무뚝뚝하기까지 한 바다 소년. 범실은 사근사근한 말보다는 뭉툭한 행동으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제 마음을 보인다. 다리가 아파 걷기 힘든 수옥에게 대뜸 “업히라”며 등짝을 들이밀고, 수옥의 방 창문 아래 담벼락에 기대도 보고, 달빛을 보며 수옥에게 혼잣말로 “잘 자”라는 수줍은 밤 인사도 건넨다.
그런 범실을 보며 도경수는 자신과 범실 사이의 “가운뎃점을 찾아보고” 싶었다. 만 스물셋 도경수와 열일곱의 범실, 2016년의 도경수와 1991년의 범실 사이의 교집합이다. “범실의 순수하고 풋풋한 모습,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부끄러워 말도 잘 못하는 모습은 지금의 나와는 닮지 않았다. 현재의 나라면 내 마음을 숨기지 않고 얘기할 테니까. 사회생활을 하면서 ‘맞으면 맞다, 아니면 아니다’라는 게 확실해지기도 했고. 하지만 열일곱의 나라면 충분히 범실과 비슷하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부끄러워하는 풋풋함. 나에게는 더이상 없는 그런 모습.” 도경수는 지난 자신의 모습을 끄집어와 범실과 포개보았다. “첫사랑의 의미는 잘 모르겠다. 단지 ‘처음’이라는 데 의미가 있는 건 아닐 것이다. 내가 아직 나이는 어리지만, 지금까지 경험해본 것 중에서 감정 표현이 제일 큰 사랑을 그것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내 첫사랑을 떠올려봤다. 그때 느낀 감정을 통해 알게 된 건 상대를 좋아할 때 생기는 설렘보다도 그 뒤에 느낀 슬픔과 우울함이 더 컸다는 거다. 아마도 범실은 수옥과의 관계에서 그런 우울함을 크게 느끼지 않았을까. 그래서인지 촬영하고 나서도 범실의 마음이 한동안 내 안에 그대로 있었다.”
<순정>의 다섯 친구들은 내내 붙어다니며 사랑과 우정을 아우르는 순정을 느껴간다. 그만큼 또래 배우들과 호흡을 맞춘 경험이 도경수에게는 기분 좋은 긴장과 색다른 즐거움을 불러일으킨 모양이다. “촬영 전에 약속을 했다. ‘우리는 이 섬에 사는 아이들이고 어렸을 때부터 친구다. 그러니 형, 동생은 이제부터 없다. 말도 편하게, 역할 이름대로 부르자.’ 지금도 휴대폰에 또래 배우들의 전화번호가 영화 속 이름 그대로 저장돼 있다. 좋은 친구들이 생긴 것 같다.” 배우들끼리 친해지기까지는 이은희 감독의 숨은 공도 컸다. 첫 촬영날 감독은 배우들에게 다짜고짜 손을 잡고 있으라는 ‘특명’을 내렸다. 다들 낯가림이 심해 어색해하던 배우들에게 감독이 의도적으로 귀여운 디렉션을 한 거다. “손을 잡는데 진짜 어색했다. 근데 그런 감정을 고스란히 느껴보는 게 촬영에 도움이 되더라. 배우들끼리 서로 한마디도 안 하고 있다가 손을 잡음으로써 말을 건네게 되는 용기가 생겼다.” 또 한번은 감독이 도경수 몰래 김소현에게 ‘액션’ 사인이 떨어지면 도경수의 얼굴에 뭐가 묻은 것처럼 해 슬쩍 그의 얼굴을 만지라고 한 적도 있다. “진짜 당황해서 바로 NG를 냈다. 내가 정말 순발력이 없었다. (웃음) 그런 상황을 그대로 받아서 반응했다면 그 순간의 감정을 더 잘 표현할 수 있었을 텐데.” 도경수에게 아직 연기는 아쉬움부터 말하게 한다. 범실이 투명 우산을 사이에 두고 수옥을 향해 (정확히는 우산에) 입술을 대는 장면도 그랬다. 그때의 수옥은 수술을 하면 다리가 완치될 수 있다는 희망이 사라진 후였고 그토록 친했던 친구들간의 불화로 마음에 깊은 상처를 얻게 된 뒤였다. 범실이 수옥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었던 순간이기도 했다. “‘네 곁에 내가 있지 않느냐, 괜찮으니 정신 차리라’는 의미까지를 표현하고 싶었다. 범실의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연기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큰 스크린으로 보니 잘 전달이 안 되는 것 같았다. 애드리브로든 행동으로든 범실의 마음을 좀더 크게 보여줬어야 했다.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배우로서 시작 단계에 서 있는 만큼 도경수는 차근차근 자신이 할 수 있는 연기부터 해나가려 한다.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 돌파구를 찾지 못해 답답해하던 <카트>의 고등학생 태영, 극중 작가의 어린 시절의 분열된 자아로 나왔던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2014)의 강우, 유년기에 겪은 학대로 괴물이 된 드라마 <너를 기억해>(2015)의 준영까지. 극중 도경수는 활달하고 경쾌한 청년은 아니었다. 어둠이 마음속 깊숙이까지 드리워져 누구도 그 속내를 쉽게 들여다볼 수 없게 막고 섰던 아픈 소년들이었다. 지난해 연말 촬영을 마친 <형>(2015)에서도 “어린 시절의 상처로 마음을 닫고 사는 유도 선수”로 등장한다. 어렸을 때부터 큰소리 내며 싸우기보다는 조용히 자기 안으로 감정을 삭이려 했다던 실제의 소년 도경수와 닮아 있다. 그건 자신에게 조금 더 익숙한 감정을 연기의 출발점으로 삼으려는 배우 도경수의 연착륙의 방편일 수도 있다. “보다 성숙한 역할, 물론 해보고 싶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런 역할을 연기하는 건 스스로가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지금의 내 나이에서 할 수 있는 역, 가져봄직한 감정들은 지금이 아니면 표현할 수 없을 테니까. 자연스럽게 해나가고 싶다.”
도경수는 미세한 변화들을 조금씩 이어가본다. 애니메이션 <언더독>에서 강아지 뭉치 역을 맡아 목소리 연기를 하게 된 것도 하나의 시도다. 선녹음을 끝낸 그는 “목소리 연기하는 내 모습을 카메라로 찍어 내 얼굴의 감정을 그림에도 반영한다고 하더라. 정말 기대된다. 목소리만으로도 섬세한 감정 표현을 해내야 해 색다른 경험이 되고 있다”고 전한다. 물론 엑소 활동도 빼놓을 수 없다. “나에게 올해는 엑소로서 활약하는 해가 될 것”이라고 귀띔한다. 배우나 가수로서 특별난 목표를 세워두고 달려가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기쁜 일이라면 감사히 생각하고, 슬픈 일이면 그건 또 그것대로 받아들일” 뿐이라며 덤덤히 말한다. 그럼에도 도경수가 더없이 바라는 한 가지가 있다. “멋진 남성이 되는 것”이란다. “MBC <무한도전>에 출연한 잭 블랙을 보는데 정말 멋있더라. 늘 조언을 아끼지 않는 (조)인성이 형도 보면 볼수록 멋진 분이고. ‘멋지다’는 건 사람을 대하는 태도나 예의, 위트 혹은 연륜일 수 있는데 아직 그게 뭔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멋지다’는 의미를 찾아가고 싶다.” 한뼘 그 이상의 여유, 그만큼 깊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의미로 읽힌다. “누가 봐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된다는 건 정말 어렵다. 대중 앞에 서는 일을 하다보니 할 수 없는 것도 많고. 그렇기에 할 수 있는 경험도 많다. (두 주먹을 맞부딪치며) 퉁 치려 한다. 아, 연애? 그래도, 연애는 무조건 할 거다. (웃음)” 이것이 만 스물셋의 청년 도경수의 순순한 마음이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