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림동에 살고 청담동 부근에서 일하(면서 한국 사회의 빈부 차이를 온몸으로 느끼)던 시절이었다. 동료가 사무실 근처에서 주운 휴대폰 하나를 두고 우리는 고민에 빠졌다. 연락처를 찾으려고 열어본 전화기에 유명한 연예인과 매니저들의 전화번호가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로 말하자면 먼저 인터뷰를 잡았는데도 다른 일정이 들어오면 가차 없이 까이고 까이다가 영혼에 깊은 화인 하나 품고 살아가기에 이른 청춘들로서, 그 화인에 아로새긴 네 글자는 이.류.잡.지.였으니…. “베끼자.” 누가, 네가?
그랬다. 때는 휴대폰으로 인터넷을 한다는 건 근미래에나 가능한 일로 보이던 선사시대, 전문가의 손을 거치지 않고 주소록을 옮기려면 손으로 베끼는 수밖에 없던 암흑의 시절이었다. 결국 우리는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면서 (사실은 없어, 가오) 궁상맞게 주소록 베끼는 걸 포기하고 휴대폰을 주인에게 넘겼다. 그는 누구였을까, A++급 여배우 ***의 매니저였다. 인터뷰 1회권하고 교환할걸 그랬지.
세월은 유수와도 같아 휴대폰으로 동영상을 주고받는 근미래가 살아생전에 도래했다. 전화기 잃어버린 매니저가 그거 찾겠다고 도시의 연쇄 폭행범으로 거듭나는 영화 <핸드폰>을 보면서 나는 안도했다, 그때 주운 것이 멀티미디어 따위 모르던 뗀석기 수준의 휴대폰이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던가. 100만원대 월급이 그나마도 밀리고 있었는데 거기에 *양 비디오라도 들어 있었다면 <핸드폰> 찍을 뻔했다.
김혜수와 전도연 등을 맡았던 전직 매니지먼트계의 거물 박성혜의 에세이 <별은 스스로 빛나지않는다: 스타를 부탁해>를 보면 15년 동안 전화번호를 바꾸지 않았다던데 그걸 읽은 나는 그럼이 사람은 15년 동안 번호 이동 할인 한번 안 받고 기기 바꿨겠네, 가오 있어, 아니 이게 아니라, 매니저에게 전화기는 그만큼 소중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우쳤다.
하지만 <핸드폰>은 전화만큼이나 전화 예절 또한 소중하다고 역설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기획사 대표 오승민(엄태웅)이 성질 부리지 않고 전화를 받았더라면 이런 액션 활극을 찍지 않아도 좋았을 텐데, 이 영화 각본 쓴 사람, 매니저들하고 통화깨나 해봤구나. 나도 매니저들하고 통화만 했다 하면 왠지 겁이 나고 비굴해진 나머지 스스로 착해져서 한번은 옆에서 듣고 있던 편집장에게 칭찬도 받았다, “텔레마케터 해도 되겠다.”
그렇다고 세상에 친절한 매니저가 없는 건 아니다. 이 사람 저 사람 뒤엉켜 술을 마시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이라고는 나하고 난생처음 보는 어느 매니지먼트 회사 대표뿐이었던 (나머지는 의자에 걸려 있었고) 어느 술자리에서의 일이었다. 적막이 흘렀다. 나는 그를 보고 웃었다, 그도 나를 보고 웃었다, 자, 이제 뭘 해야 할까. 그는 가방을 열더니 인화한 사진을 한 보따리 꺼냈다. 그리고 내가 그때껏 만난 누구보다도 친절한 말투로 설명을 시작했다. “우리 ** 사진 보실래요? 이건 정장 입은 거, 아유, 잘생겼다, 그리고 이건… 어머, 수영복이네? 우리 **가 요새 운동을 하느라. 그럼, 수영복으로 몇장 더?” 그렇게 나는 몸은 좋지만 웃기게 생긴 청년의 반누드 사진을 보면서 충만한 새벽을 맞았다. 아, 친절하여라.
그리고 몇년 뒤, 웃기게 생긴 청년은 개성 있는 마스크를 지녔다는 스타가 되었다. 그 아슬아슬한 경계를 포착하다니, 아무나 매니저 하는 게 아니구나. 제목이 그래 보여 팬픽 독립영화로 착각했지만 어엿한 팬픽 상업영화였던 환희 주연의 <스타: 빛나는 사랑>에 나오는 매니저는 정교한 내추럴 메이크업으로 무장한 주연 여배우한테 화장하면 예쁘겠다고 눈뜬장님 수준의 대사를 날리기에 저러고도 월급 받나 싶었지만, 그러고도 월급 받는 사람이 한둘도 아니고, 아니, 어쨌든 진짜 매니저에겐 날카로운 안목이 필요하다.
하지만 영화에서나 현실에서나 매니저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하라는 일은 뭐든지 한다는 사실이다. 집에서 게임하던 톱스타의 전화를 받고 담배 사러 나가던 매니저가 “우리 **이 진짜 착해요. 동네 담배 가게가 어딘지 몰라서 그러는 거예요” 감싸길래, 어쩜 이런 거짓말을 하면서도 표정이 진심이야, 과연 배우 매니저구나 했지만 <라디오 스타>를 보니까 진짜였어, 매니저 있는 사람들은 담배를 어디서 파는지 몰라, 이래서 담배 자판기를 부활시켜야 한다니까, 아니 이게 아니고, 그 사람 연기가 아니었구나 뒤늦게 깨달았다.
재벌이 아니라면 세상에 감정 노동 아닌 일이 없어 오늘 하루도 키보드 두드린 내 손가락이 한 일보다 갑을 상대로 내 감정이 한 일이 훨씬 많지만 (그러니까 돈 받으면 내 손가락을 위한 반지 한개보단 내 감정을 위한 술 한병을 사리라), <라디오 스타>의 매니저 민수(안성기)처럼 “얼굴에 수십번 똥칠해서 똥독 오른” 건 아니니 다행이라 하겠다.
20년 동안 민수가 한 일을 꼽아보자면, 짐꾼에 기사에 가이드에 대변인에 짜장면 비벼주다 말고 담배와 커피 자판기 노릇까지, 게다가 팬들이 몰려들면 보디가드도 해야 한다. 저 깊은 바다를 가르며 헤엄치는 청어 떼처럼 질주하다가 순식간에 270도 회전하여 송골매처럼 스타를 덮치는 팔팔한 10대 소녀 무리 곁에 한번이라도 서봤다면 알게 될 것이다, 매니저에게도 보디가드는 필요하다.
박성혜가 내린 정의에 따르면 매니저란 “한마디로 문화 상품인 스타를 생산하는” 직업이면서 이상하게 그 ‘문화 상품’ 중 하나인 영화에선 미움받는 직업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동안 거친 직업으로도 모자라 다시 새로운 직업을 구하느라 고심 중인 실업자로서, 직업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왠지 저 사람이 사는 세상은 한여름 같아, 아주 눈이 부시지. 퇴직했지만 용돈 주는 딸자식은 없고 그냥 딸자식만 있던 아빠가 경비원 일을 시작했을 때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노동과 월급이 있는 찬란한 세상이라니. 어쩌면 미안해서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참을 수 없는 존재로 인한 서러움
매니저에게 웬만해선 없는 두세 가지 것들
퇴근은 없다
매니저 관상인 건지, <핸드폰>에 이어 <톱스타>에서도 배우가 되지 못해 매니저 노릇을 하는 엄태웅은 기어이 톱스타가 되고 나서도 이런 소리만 듣는다, 촌스러워, 욕심이 붙었어, 빈티 나. 그러고 보니 <톱스타>는 왕후장상엔 씨가 없어도 톱스타엔 씨가 있다고 주장하는 영화였군, 매니저는 안 되는 거야. 어쨌든 그 영화에서 술 마시고 사고 치는 엄태웅을 보면서 나는 왜 매니저들이 새벽까지 배우들하고 붙어 있는지 알았다. 집에도 데려다줘야 하겠지만 감시도 해야 하니까. 옛날에도 퇴근 시간 없던 그 매니저들은 이제 24시간 스마트폰으로 트위터 감시해야겠구나. 스마트폰 너무 보면 목에 주름 생긴다던데.
국경도 없다
한물간 스타라도 열심히 뒤치다꺼리하다가 <라디오 스타>의 민수처럼 “얼굴이 삭는” 매니저 팔자에는 국경도 없다. 그 많은 러브라인에서 한 가닥도 배정받지 못한 <러브 액츄얼리>의 조는 돌보는 가수의 막말과 사고를 감당하느라 그랬는지 원래 그랬는지 살찌고 삭았는데, 그걸 일깨워주는 사람이 바로 그 가수다. 얼굴도 안 나오는데 자꾸 추남에 뚱보라고 시청자들한테 알려주지, 아, 친절하여라. 그러고는 크리스마스에 들고 오는 것이 고작 샴페인 한병이다. 매니저에게도 안주는 필요할 텐데.
배려 따윈 없다
신인 배우를 차로 치었다가 합의금 주는 대신 매니저로 일하게 된 <스물>의 치호(김우빈)는 감독(박혁권)의 귀염둥이다. 술자리 진상, 그 갑 중의 갑으로서, 이미 한 얘기를 하고 또 하는데 심지어 그 얘기가 진지하기까지 한 완전체 진상하고 놀아주는 사람은 치호뿐이니까. 그렇게 놀아주는 치호를 보면서 감독과 동고동락해야 마땅한 스탭들은 지금이다 싶어 잽싸게 도망간다. 원래 술자리 진상하고는 한 시간씩 돌아가며 놀아주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의 인정이거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