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라디오헤드는 사운드클라우드 계정에 “메리 크리스마스, 포스가 함께하길”로 끝나는 메시지와 함께 <007 스펙터>(2015)의 미사용 주제곡을 올렸다. 아름다운 곡이다. 반복해서 듣다보니 <007 스펙터>를 두 파트로 나눈, 만들어지지 않은 미지의 영화를 상상하게 된다. 샘 스미스의 곡을 쓴 파트1에서 스완(레아 세이두)이 본드(대니얼 크레이그)에게 “당신은 어쩔 수 없는 암살자니까”라고 하며 떠나버리고, 라디오헤드의 곡을 쓴 파트2에서 본드가 마침내 암살자를 때려치우고 스완에게 돌아가면서, <007 카지노 로얄>(2006)에서 베스퍼(에바 그린)로 인해 파괴되었던 영혼을 되찾으며 다니엘 크레이그 007을 마무리했다면 어땠을까? 만들어진 영화는 그 모든 일을 해결하기엔 러닝타임이 짧고 호흡이 가빴다. 영혼은 그렇게 쉽게 되찾을 수 없다.
서로 사랑하는 둘이 세계로부터 도주한다는 낭만
기대한 프랜차이즈가 아쉬움을 안긴 대신, 전혀 기대치 않은 프랜차이즈에서 충족이 있었다. <미션 임파서블: 로그네이션>(2015)에서 신디케이트에 맞서 고군분투하는 에단 헌트(톰 크루즈)에게 의문의 스파이 일사(레베카 퍼거슨)는 영화 중반에 갑작스레, “그냥 지금 너랑 나랑 같이 도망치면 어떨까?”라는 제안을 한다. 그전까지 보아온 영화의 목적 자체를 무효로 만들어버리는, 장르의 기능적 임무를 초월한 진리의 손짓. 그렇다. 복수니 대의니 집어치운다면, 개인의 평화를 위해 주인공은 도망칠 수 있다. 그런데 왜 그러지 않는가? 스완과 본드가 함께 떠나는 엔딩이 미흡하고 불안했던 반면, 에단이 일사를 보내는 엔딩은 인간에 대한 예의까지 담긴 훌륭한 결말이었다. <미션 임파서블>의 품격이 007을 능가하는 날이 올 줄이야.
서로 사랑하는, 혹은 서로에게 매혹된 두 사람이 함께 세계로부터 도망치려는 정서에는 신비로운 힘이 있다. 적어도 내게는 그 힘이 늘 먹힌다. 이야기의 전체 맥락에 엿을 먹이더라도 둘의 정서만 납득된다면 상관없어진다. 성서에 적힌 인류 최초의 연인도 선악과를 맛본 탓에 낙원에서 쫓겨난 것이 아니라, 신의 압제를 피해 미친 세계에서 도망친 거라 믿고 싶다. 심지어 나는 편협한 사고방식의 남성 전문가류 영화들에서도 여성과 도망치고픈 마음을 발견한다. 이미 나는 <블랙코드>(2015)와 마이클 만의 강탈영화들을 다룬 졸문(拙文)에서, 그의 작품 세계가 실은 ‘론 울프’들이 어떻게 여자와 함께 도망칠 것인가 고민하는 ‘30초 골목’ 딜레마의 반복이라고 쓴 적 있다(<씨네21>1002호). 홀로 강건하다고 믿는 남자들은 혼자 도망치다 죽는다.
자본주의 세계에서 개개인은 노동력에 지나지 않고, 각자의 존재는 경제 논리에 의해 언제나 반드시 소외당한다. 이 거대한 소외 앞에서는 누구도 예외가 없어 사회는 물론 가족 안에서도 개인은 늘 고독하다. 사랑만이 고독을 벗어날 유일한 희망이다. 타인이었던 두 개인이 기적적으로 만나 사랑으로 연대하여 이 세계의 논리에 대항한다. 서로를 소외시키지 않고 끊임없이 상대방과 나의 존재를 의식하며 살기 위해서는 각자가 착취당하는 세계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함께 달아나는 일이란 결국 도피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계 밖에서 살 수 없고, 살아본 적도 없으며, 논리로 무장한 세계 앞에서 사랑이란 가장 연약하고 불안한 연대다.
좋은 이야기는 세계의 문제와 개인의 문제가 한 지점에서 만난다. 세계는 개인으로 치환하며 개인은 세계로 확장된다. 연인이 세계로부터 도망치는 정서를 담은 영화도 마찬가지다. 러브스토리를 본 것 같은데 마음에는 세계와 개인의 현실이 남는다. 훌륭한 영화는 현실의 냉정한 태도를 극에서도 견지한다. 그리고 위대한 영화는 영화적 진실로 가끔 현실을 초월해버린다.
앨런 J. 파큘라의 <클루트>(1971)는 한 기업가의 실종으로 시작한다. 부인에게 다정하던 남자는 어느 콜걸에게 보낸 음란한 편지를 남긴 채 행방이 묘연하고, 그의 친구인 존 클루트(도널드 서덜런드)가 사립탐정으로 고용되어 문제의 콜걸 브리(제인 폰다)를 만나러 뉴욕으로 온다. 브리는 모델과 연기자 오디션을 보러 다니지만 매번 떨어지고, 대신 자신을 사는 남자들에게 또 다른 자신을 연기한다. 싸구려 아파트로 돌아와 “재촉하시고 단련하시는 주님”을 읊조리면서, 쓸쓸하지만 자기 삶을 자신이 통제한다고 믿는다. 그런 그녀를 몰래 지켜보는 스토커가 밤마다 전화를 걸어온다. 수화기 저편의 괴한은 아무 말없이 기분 나쁜 숨소리만 들려준다.
영화는 범인을 찾아 미스터리를 해결하는 것이 목적이 아님을 초반부터 밝힌다. 위대한 촬영감독 고든 윌리스가 잡은 앵글에서, 범인은 항상 빌딩 꼭대기층 창가에서 검은 실루엣으로 고독하게 앉아 있다. 그의 뒤로는 다른 고층 빌딩과 항구를 오가는 선박들이 세계의 건설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중이다. 이 영화의 진짜 범인은 세계다. 스토커 같은 자본주의는 브리를 내려다보며 이 세계가 바깥에 언제나 존재함을 전화 속 괴한의 숨소리로 증명한다. 범인이 녹음한, 자신을 팔기 위해 상대를 유혹하던 브리의 음성을 들려주는 장면은 그래서 섬뜩하다. 모두 살기 위한 네 선택이고 욕망이니 소외감과 외로움, 더러운 기분까지도 감수하라는 것이다.
제목은 ‘클루트’이지만 이것은 브리의 이야기다. 클루트는 브리를 연민하며 곁에서 묵묵히 그녀를 지킨다. 그러나 브리는 조건 없이 자신을 돌보는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다른 남자들처럼 조종하거나 관계를 부수고 다시 무감각한 상태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브리가 클루트와 함께 텅 빈 아파트를 떠나는 마지막 장면은 그녀가 심리상담사에게 전하는 내용의 후일담과 병치된다. 브리는 자신은 그와 같은 꿈을 꿀 수 없고, 곧 뉴욕으로 다시 돌아오겠다고 말한다. 파큘라는 애써 해피엔딩을 주지 않고 그들의 도피가 실패했음을 명백히 밝힌 것이다. 함부로 환상을 제공하지 않는 영화의 진중한 태도는 제인 폰다의 연기와 함께 현실에 맞닿아 있다. 이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도망치는 일은 현실은 물론 영화에서도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샘 페킨파의 <겟어웨이>(1972)는 영화적 진실의 힘으로 이 불가능한 탈주에 성공한 드문 사례일 것이다. ‘닥’(Doc) 맥코이(스티브 매퀸)는 무장강도 혐의로 10년형을 선고받아 복역 중인 감옥에서, 방직기의 소음으로 강조되는 노역과 갇힌 삶을 버텨내지 못하고 미모의 아내 캐롤 맥코이(알리 맥그로)를 지역에 큰 영향력을 가진 배넌(벤 존슨)에게 보낸다. 탐욕스런 악당에게 ‘무엇이든 하겠다’는 메시지를 대신 전하러 간 아내가 어떤 고초를 겪을지 닥이 전혀 몰랐다고는 할 수 없다. 덕분에 감옥에서 나온 닥은 배넌의 지시로 텍사스의 한 은행을 턴다. 일이 꼬이고, 함정에 빠졌음을 깨닫는 순간, 닥은 배넌과 아내 사이에 다른 계략도 있었음을 알게 된다.
영화는 제목이 그대로 목표인 은행강도 맥코이 부부의 20세기 미국 탈출기다. 문제는 이들이 지금 막 사랑에 빠진 눈먼 연인이 아니라 이미 서로간에 배신감을 주고받은 부부라는 사실이다. 서로에게 총을 겨눴고 손찌검까지 해버린 사이는 상대를 믿지 못해 각자의 길로 찢어질지 말지를 고민한다. 아내는 남편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지만 남자는 도리어 그 이유로 여자에 대한 의심과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샘 페킨파가 이들을 화해시키는 곳은 지옥의 밑바닥이다. 쓰레기 수거 차량에 몸을 숨긴 둘은 쓰레기장에서 쓰레기 더미와 함께 내뱉어진다. “네 말이 맞아, 우리 둘이 같이 도망치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 없는 거야.” 뒤늦게 깨달은 남자에게 여자는 “아니, 헤어져. 우린 가망이 없어. 넌 그 생각을 잊지 못할걸” 하고 남자의 두려움을, 내면의 이기적인 본질을 지적한다. 여기서 남자는 불가능한 맹세를 하고, 여자는 받는다. 두 인간쓰레기의 화해. 영화 속에서만 가능한 진실. 그런데 이것이 극장 밖 우리가 말하는 진실보다 더 진실처럼 여겨진다. 쓰레기장에서 두손 꼭 잡고 나오는 둘의 모습이 가슴을 먹먹하게 하고, 지옥의 밑바닥 같던 곳이 그 순간 천국처럼 보인 것이다. 그 장면들이 마치, 사랑하는 이들을 배신하지 않고서는 이 세계에서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우리를 위해 쓰레기를 콱 집어다 머리 위에 흩뿌려준 씻김처럼 느껴진다면, 너무 지나친 비약일까?
샘 페킨파는 둘의 이상향으로 여겨질 유일한 장면을 닥의 출소 직후의 냇가 시퀀스에서 현실인지 상상인지 알 수 없는 신비로운 교차편집으로 보여주었다. 피칠갑의 총격전 후에 도달한 멕시코는, 묘지의 십자가를 연상시키는 전봇대와 함께 끝없이 황무지만 이어진 땅이다. 낙원? 아니 이곳은 사후세계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부부는 탐욕스런 자본과 소음 요란한 기계들이 지배하는 땅인 미국에서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서로에게 배신당했던 기분을 묻어버린 채 고물차를 타고 떠난다. 넌 나 없이는 안 될, 고물 같은 서로에게 정든 몸을 싣고서.
현실을 딛고 서서 세계에 대항하는 법
영화는 물론 환상이지만 현실에 발 딛고 서서 세계에 대항해야 한다. 결코 영화 밖의 현실을 기만하지 않는 태도와 결국은 냉소적으로 젠체하는 현실인식. 현실을 초월하는 영화적 진실과 극장 밖에선 아무 의미도 없는 싸구려 판타지. 사실 한끗 차이일지 모르지만 나는 진짜와 가짜의 구분이 가능하듯, 분명 더 나은 영화를 구분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극장 안에 들어선 순간, 우리는 대략 2시간 동안 세계로부터 도망친다. 그러니 좀더 진짜를 봐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