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김영진의 영화비평] 섬세한 묘사의 미학
2016-03-01
글 : 김영진 (영화평론가)
한편의 시와 같은 영화 <자객 섭은낭>에 숨은 아름다움을 논하다
<자객 섭은낭>

허우샤오시엔의 <자객 섭은낭>을 보고 한때 좋아했던 장이머우의 <영웅: 천하의 시작>(2002, 이하 <영웅>)과 <연인>(2004)을 다시 봤는데 끝까지 보기가 힘들었다. 일단 거기 담긴 세계관과 태도가 전혀 다르다. <자객 섭은낭>은 대의를 위해 희생하는 강호영웅의 행동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해석하고 있다. 이에 비하면 장이머우의 영화들은 상투적이다. <영웅>의 마지막 장면은 천하를 위해 주인공이 암살을 포기하는 것으로 끝나는데, 개봉 당시에 나는 이 장면을 장이머우가 중국 인민들을 역사상 처음으로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해준 공산당 독재를 상징적으로 추인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연인>에서 3일을 같이 지낸 남자와 도망치기 위해 3년 동안 애인이었던 남자를 버리는 여자의 선택을, ‘십면매복’이라는 중국어 제목처럼 평생 젊은 시절을 자기 의지로 살지 못했던 장이머우 세대의 자기고백처럼 받아들인 것도 좀 부끄러웠다. 무엇보다 <자객 섭은낭>에 비하면 <영웅>과 <연인>의 과시적인 기교는 천해 보인다.

장이머우의 무협영화들도 정통 무협영화라고 보긴 힘들지만 허우샤우시엔의 <자객 섭은낭>도 무협영화라는 장르로 받아들이긴 힘들다. 무협영화의 장르 관성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극이고 많지 않은 액션이 추가된 영화다. 감독이 허우샤오시엔이니 미리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지만 이 영화의 완성도는 그런 예상도 뛰어넘는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무협영화에서의 가시적이고 동적인 액션의 움직임을,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움직임의 섬세함으로 대체한 연출 방향일 것이다. 이 영화에서의 액션은 주인공 섭은낭의 싸움 동작보다 그녀의 유령처럼 걷는 걸음걸이, 그녀가 기다리며 머무는 장소의 사물들의 기척, 그녀가 자리를 떠난 뒤의 사소한 흔적들 같은 것이 더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자객의 기다림은 길고, 실행은 짧은 순간 벌어지지만 영화 첫 장면의 프롤로그를 제외하면 섭은낭은 계속 임무를 지연시키고 나중에는 스스로 포기한다. 그녀가 왜 자객으로서의 본분을 버리고 임무를 포기하는지 그 앞뒤 맥락을 살피도록 안내하는 것이 이 영화의 동기로 보인다.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존재의 운명적 갈등

섭은낭(서기)은 스승으로부터 위박이라는 곳의 군주 전계안(장첸)을 죽이라는 명을 받지만 끝내 그를 죽이지 않는다. 어린 시절 그들 두 사람은 정혼한 사이였고 섭은낭은 그를 사모했다. 그렇지만 섭은낭이 전계안을 끝내 죽이지 않은 것은 과거의 감정 때문만은 아닌 듯 보인다. 섭은낭이 전계안의 주관으로 열린 대신회의를 건물 천장에서 몰래 지켜보고 있을 때 전계안은 당 조정과의 화친을 주장하는 대신들과 강경 대응을 주장하는 대신들 사이에서 명시적으로 자기의견을 표명하지 않는다. 그는 위박의 독립을 원하는 듯 보이나 그걸 스스로 결정하지 않는다. 그는 우유부단한 군주이다. 섭은낭이 지켜보는 전계안의 가정사도 그리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와 정략결혼한 본부인 전원씨는 전계안의 권력을 호시탐탐 노리는 야심가이며 그들 사이에 애정은 없다. 전계안은 자식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아이들은 나중에 전계안이 전원씨가 꾸민 모종의 음모를 알고 분개해 전원씨에게 칼을 들이댔을 때 엄마 편을 들며 전계안을 가로막는다. 섭은낭은 자객으로 길러진 자신의 운명처럼, 전계안에게서도 타의에 따라 살아가는 자의 운명을 본다. 영화의 후반부에서도 전계안은 여전히 자신이 통치하는 위박의 대조정 정책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시들지 않은 연정과 동병상련의 감정으로 섭은낭의 마음을 추측하는 것도 곤란하다. 이 영화에는 주인공의 심리를 특정한 범주로 환원해 설명할 플롯상의 장치가 전혀 없다. 섭은낭은 어디에나 있는 듯하지만 남들의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에서 어디에도 없다. 숨어서 귀를 기울이며 기다리는 여자라는 뜻의 이름을 지닌 이 주인공은 다른 사람들이 사는 공간에 끼어들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주체가 아니다. 자객이지만 영화 초반을 제외하면 누구도 죽이려 들지 않으니 사건이 돌풍처럼 커져가는 것도 아니다. 섭은낭의 망설임, 회한 속에서 우리는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지켜봐야 하지만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나 대의를 위한 자기희생 따위의 명분이 들어설 여지가 없으니 영화의 플롯 전체가 텅 빈 진공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서사를 포기한 게 아니라 아예 신경 쓰지 않는 듯이 연출한 허우샤오시엔의 접근법은 이 영화를 우리가 다른 방식으로 보게끔 유도한다. 잠이 올 만큼 명상적이지만 명시적인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 대신, 눈앞에 보이고 들리는 모든 것들이 소름끼칠 만큼 아름답고 정교하게 구성돼 있다.

흑백으로 담은 프롤로그 화면은, 감독이 사건과 액션을 묘사하는 방식을 응축해서 보여주는데 종래의 전형적인 묘사와는 전혀 다르다. 첫 장면에서 카메라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움직이면 스승의 명을 받는 섭은낭이 소개된다. 카메라가 수평으로 움직이는 동안 두 마리의 당나귀가 서 있는 배경에 나뭇잎들이 바람에 살살 흔들리고 있다. 섭은낭이 스승으로부터 단검을 받아 쥐면 화면이 바뀌는데 이번에는 카메라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이며 한 무리의 병사들이 숲 사이를 가로질러 말을 몰고 있다. 이번에도 숲의 나뭇잎들은 바람에 밀려 조금 더 세차게 흔들린다. 다시 화면이 바뀌면 섭은낭이 숲속에 숨어 이동하는데 카메라는 맨 첫 장면과 똑같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한다. 섭은낭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걷다가 살해대상의 행방을 좇아 다시 오른쪽으로 걷는 순간 화면은 컷되어 말을 타고 오른쪽으로 이동하는 군사들의 대장을 보여준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두번씩 반복된 이 화면의 수평 움직임은 번개처럼 숲에서 튀어나와 단검으로 대장의 목을 베는 섭은낭의 짧은 도약으로 이어진다. 화면의 수평 움직임은 수직적인 섭은낭의 튀어오르는 움직임으로 폭발하고 섭은낭의 칼을 맞은 대장이 말에서 떨어져 죽는 하강의 움직임으로 마무리된다.

수평 움직임의 반복 끝에 수직 움직임과 충돌하는 패턴은 이어지는 또 다른 섭은낭의 암살 시도 장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린아이와 함께 놀고 있는 어떤 군주가 보이고 화면은 그가 잡아 건네준 나비의 움직임을 따라 계속 좌우로 이동한다. 나비가 화면 위로 날아가버리고 아이가 공을 갖고 노는 동안 우리는 군주와 그의 곁에 있는 시종들의 눈길을 따라 아이가 움직이는 동선을 쫓아간다. 화면은 여러 차례 수평으로 좌우를 왔다 갔다 하는데 화면이 바뀌자 천장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는 섭은낭이 보인다. 섭은낭이 아래로 사뿐히 뛰어내리면 이미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이고 군주는 아이를 안고 졸고 있다. 군주에게 접근한 섭은낭은 칼을 쥐고 있지만 깨어난 군주가 놀라 눈을 뜨고 바라볼 때 무슨 일인지 그냥 돌아서고 군주가 등 뒤에서 던진 칼을 받아친 후 그 자리를 떠난다. 여기서 벌어지는 사건의 묘사방법은 얼핏 보면 싱겁다. 자객은 자기 임무를 완수하지 않는다. 그 이유도 당장은 알 수 없다.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다. 섭은낭이 천장에 몸을 감추고 있는 게 더 일찍 관객에게 노출됐더라면 다른 전개가 이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감독은 그렇게 하는 대신, 화면을 사소하지만 힘있는 움직임과 맹렬한 소리로 채운다. 화면 배경의 커튼이 살랑살랑 움직이는 것, 촛불이 흔들리는 것, 향의 연기가 위로 스멀스멀 올라가는 것 등의 움직임이 느껴지는 가운데 풀벌레 소리와 새소리가 화면을 채운다. 그리고 화면이 바뀌면 섭은낭은 심산유곡에 있는 스승의 거처에 도착해 긴 계단을 올라간다. 다시 수직의 움직임이다. 스승의 방 앞에서 섭은낭은 아이가 함께 있어 죽이지 못했다고 아뢴다. 스승은 다시 그런 일이 있으면 상대가 가장 아끼는 것부터 죽이라고 명령한다.

일정한 거리를 지키면서 아무런 시각적 설명도, 대사처리도 배제한 채 움직임의 충돌과 화면 내의 풍성한 움직임들을 통해 자객의 기다림과 망설임의 어떤 정조를 표현해내는 이 프롤로그의 패턴은 결말부에 대구를 만들어내면서 묘한 감동을 준다. 결국 전계안을 처치하지 않은 섭은낭은 산 정상 근처에 있는 스승을 찾아가 임무를 포기했다고 아뢰며 책망하는 스승의 말을 듣고 인사를 올린 뒤 산을 내려간다. 이 장면에서 화면에는 호금전의 영화에서처럼 안개가 걷잡을 수 없이 피어올라 이윽고 자욱해지며 프롤로그에서 그랬듯이 카메라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서서히 움직이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산 정상 주변을 보여준다. 화면이 바뀌면 야트막한 산언저리를 올라와 내려가는 섭은낭 뒤로 스승이 그녀의 뒤를 쫓고 있는 것이 보이는데 왼쪽에서 등장해 오른쪽으로 섭은낭이 화면을 나간 뒤에도 카메라는 그 산의 풀숲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다. 역시 무시할 수 없는 화면 속 바람 소리가 심장을 울리는데 화면이 바뀜과 동시에 프롤로그에서 군주가 그랬듯이 스승은 느닷없이 섭은낭을 공격한다. 산 정상을 가득 메운 안개의 기운과 마찬가지로 이 장면에서의 바람 소리는 이어지는 스승의 공격 장면에서 스승의 무기가 바람을 가르는 크고 거센 소리로 파장을 넓히는데 선문답처럼 주고받는 그들의 차분한 말 속에 숨어 있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움직임과 소리로 그려낸다.

이 장면의 수직적 움직임 뒤에 이어지는 것은 섭은낭이 마경소년을 찾아 그가 사는 동네로 되돌아오는 장면이다. 양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어먹고 있는 걸 보여주는 카메라는 좌우 상하로 미세하게 움직이며 분위기를 잡고 화면이 바뀌면 다시 돌아온 섭은낭을 발견한 마경소년의 움직임을 따라 카메라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하면서 말을 끌고 걸어오는 섭은낭을 보여준다. 다시 화면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섭은낭과 마경소년의 이동을 따라 움직이고 마지막 장면에선 신라를 향해 떠나는 섭은낭과 마경소년 일행을 오랫동안 지켜본다. 번거로울 만큼 좌우 움직임을 되풀이하며 수직의 움직임과 대비를 이루는 이것은, 뛰어오르고 뛰어내리는 것에서 섭은낭의 자객으로서의 삶을 응축한 시각적 모티브의 마무리로 수평적 움직임을 길게 부연해 보여줌으로써 다른 차원에로의 삶을 향해 가는 섭은낭의 미래를 따뜻하게 품는 촉각적인 연출일 것이다. 화면은 정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화면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조금씩 약동하고 있으며 소리는 작은 오케스트라처럼 울려퍼진다. 마지막 마경소년의 동네에서 들리던 소리는 새들이 지저귀는 평화로운 음색이었다.

집중과 포용의 거리두기

섭은낭은 대의를 위해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자객으로 만들어진 인물이지만 자신의 운명을 종내 거부한다. 한때 서로 사모했던 전계안을 죽이지 않는 것을 비롯해 전계안의 임신한 후처 호희를 구해주며 자신을 자객으로 살도록 승인했던 아버지 섭봉도 구해준다. 영화 첫 장면의 암살을 빼면 영화 내내 그녀는 누군가를 구해주고 있다. 자객이지만 협객으로 살며, 이는 자객으로서 본분을 잊은 행동이다. 섭은낭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영화는 전통적인 방식의 플롯과 캐릭터 묘사로 풀어내는 것을 외면하고 있다. 사건들의 연쇄는 플롯이 되지 않으며 듬성듬성 건너뛰고 생략돼 있어서 관객은 영화가 끝난 후 인물의 관계도와 그들 사이의 역사를 추론해봐야 한다. 처음 영화를 봤을 땐 상황을 이해하는 데 애를 먹었고 두 번째 봤을 땐 대충 이해했지만 세 번째 봤을 땐 그 모든 게 다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물들의 행동을 이해하는 데 단서가 되는 장면들은 다 들어 있다. 이를테면 섭봉이 딸을 생각하는 마음은 섭은낭이 마경소년의 간호를 받고 있는 걸 뒤에서 지켜보는 모습에 다 응축돼 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 영화에서 매우 극한으로 추구된 허우샤오시엔의 거리를 두는 연출과 거리를 둔 화면 내에서 굉장한 에너지로 분출되는 온갖 움직임들이다. 오래전 인터뷰에서 허우샤오시엔은 그의 영화에 대해 상투적으로 묻는, 왜 롱테이크를 고집하느냐는 질문에 어릴 적 망고나무서리를 할 때의 일화를 들려주었는데, 망고나무에 올라가 망고를 따면서 들킬까봐 긴장한 채로 집중하고 있으면 사방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일제히 소리를 내는 것이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롱테이크는 바로 그렇게 존재하는 것들에 온 신경을 쏟아 집중하는 방법 중 하나라는 것이다. 허우샤오시엔 영화에서 인물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행동하는지는 원인과 결과로 설명되지 않는다. 허우샤오시엔 영화에서 카메라는 인물들과 거리를 두고 인물들을 세세히 지켜본다. 그 지켜봄의 과정은 냉정한 거리두기가 아니라 실은 인물들이 존재하는 공간의 공기마저도 풍부하게 껴안으려고 하는 대단한 인정미의 소산이라는 걸 이 영화, <자객 섭은낭>을 통해 다시 깨닫는다. 죽여야 하는 적이 소중히 여기는 것, 이를테면 적의 아이나 여인에 대해 섭은낭이 느꼈던 감정은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로는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지만 촛불 하나의 흔들림에도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도록 공감각적 차원으로 화면에 새겨놓은 감독의 묘사 공력 덕분에 우리는 빙 둘러 섭은낭의 마음에 살짝 도달하는 것이다. 허우샤오시엔은 시인의 마음으로 영화를 찍고 있는 것이고 그건 종래의 서사 형태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새로운 걸 만들어낸다. 영화가 요란하지만 왜소한 감각의 전달매체가 되어가는 시대에 이 영화는 풍부한 공감각적 묘사의 깊이에 관한 드문 사례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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