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나호원의 영화비평] 친근하지만 새롭게
2016-03-15
글 : 나호원 (런던 통신원)
<주토피아>가 성취한 애니메이션으로서의 재미 요소를 탐색하다
<주토피아>

동물들이 등장한다. 현실을 빗대어 풍자한다. 모든 (포유)동물들의 평화로운 공존, 그러나 여전히 지배하는 불안과 공포. DNA로 대표되는 생물학적 속성은 사회화 과정으로 제어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두려움을 유지하고 증폭시키는 고정관념과 편견은 극복할 수 있는 것일까? 나아가 모두가 저마다의 개성과 인격을 존중받으며,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이상적 이념을 실현하는 것은 개인의 몫인가, 집단의 몫인가? 우리는 그것을 이행할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내하려는 준비가 되어 있는가? 혹은 여전히 그것은 지배 이데올로기의 달콤한 청사진에 불과한 것인가? <주토피아>에 대한 언급은 이처럼 간결히 정리할 수 있다. 적어도 애니메이션영화 자체의 즐거움을 거세한다면 말이다. 제작사가 디즈니라면 평가의 방향성은 이미 정해져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이 글은 그러한 무한 반복 재생산에서 벗어나보고자 한다. <주토피아>는 꽤나 재밌기 때문이다.

동물, 유토피아 그리고 애니메이션의 만남

제목이 작품을 설명할 때가 많다. <주토피아>도 그러하다. Zoo + Topia. 흔히 동물원을 뜻하는 zoo의 그리스어 어원은 동물 zoion이다. 날것 그대로의 생명/살아 있음을 뜻하는 zoe와도 이어져 있다. 움직이는 환영을 만들어내는 회전 원통 조에트로프, 달리는 말의 연속 사진이 부착된 회전판을 환등기와 결합해 움직이는 영상을 구현해낸 주프락시노스코프처럼 영화 이전의 움직임 재현 장치들은 동물/생명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본래 동물의 운동을 분석하려는 과학적 목적에서 개발된 것들도 많다.

장소를 의미하는 토피아는 흔히 수식어와 함께 등장한다. ‘주토피아’는 동물들의 땅이면서 동시에 발음의 유사성으로 인해 유토피아를 떠올리게 한다. <주토피아>가 펼쳐 보이는 세상 또한 현실보다는 이상향의 구현이라는 점이 강하다.

사진술 발명이 모색되던 때는 유토피아 사회주의의 이상이 싹트던 시기와 겹친다. 활동사진(motion picture)이라는 영화가 등장할 무렵이면, 유토피아의 이상 또한 현실 속에서 본격적으로 기획되고 실행되던 시기다. 이는 예술가들의 모색과 실천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진이 활동사진으로 거듭날 때, 아방가르드 화가들은 사진의 사실적 재현술을 극복하고자 했다. 유토피아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정치적 활동, 혹은 이에 저항하는 반동의 정치 활동에서 사진술은 조작을 위한 도구로 쓰였다. 20세기 초반 아방가르드 화가들은 자신들의 선배 세대가 사진술과 겨루던 경쟁을 더이상 할 필요가 없었다. 인간은 복제 기계를 따라갈 수 없었지만, 복제 기술은 현실을, 사실을, 그리고 진실을 복제하지는 못한다는 점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사진이, 그리고 움직임을 부여받은 활동사진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믿을 것이 못 되었다. 활동사진이 유토피아의 운동성, 넘쳐나는 폭발력을 실어나를 것이라 기대되었지만, 현실을 지배하는 활동사진은 달콤한 이야기만 유혹적으로 속삭일 뿐이다. 애니메이션이 대안으로 급격히 주목받은 시점이다. 한편으로는 세상을 단숨에 뒤엎을 것만 같은 역동성이 추상애니메이션을 통해 탐색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의 질서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카툰애니메이션이 카타르시스를 제공했다. 그때만 해도 미키 마우스를 비롯한 카툰애니메이션은 윤리 따위는 거들떠보지 않았다. 법질서 따위는 내던져버리라는 듯 난봉질을 대놓고 했다.

동물과 유토피아 추구자의 만남, 그것도 애니메이션을 중심에 둔 가장 극적인 만남을 보여주는 사진이 있다. 미키 마우스와 에이젠슈테인이 악수하는 모습. 이 사진은 1930년 디즈니 스튜디오 앞에서 찍은 것이다. <전함 포템킨>을 만든 에이젠슈테인이 디즈니 스튜디오를 방문한 까닭은 사운드와 이미지를 결합하는 방식을 탐색하기 위해서다. 미키 마우스는 소리와 움직임을 가장 완벽하게 소화해낸 영화 스타였다. 이후로 월트 디즈니와 에이젠슈테인은 서로를 존경하고 격려하는 관계를 유지했다(디즈니 스튜디오의 총파업과 대량 해고, 히틀러와 괴벨스의 디즈니 흠모, 레니 리펜슈탈의 디즈니 스튜디오 방문, 전후 매카시즘의 동조, 중남미 문화 사절단 순방을 통한 반미 세력의 고립화 등등 지금까지도 월트 디즈니의 부정적 평가를 폐기할 수 없는 일련의 행보들이 일어나기 전에 디즈니와 에이젠슈테인의 친선 관계는 형성되었다). 후일 ‘친애하는 나의 벗 에이젠슈테인에게’라는 친필 메시지를 적은 엽서에도 디즈니의 미키 마우스를 비롯한 동물 캐릭터들이 우르르 달려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캐릭터에 부여된 영리한 의인화 전략

인간을 빗댄 동물들은 신화나 우화 같은 이야기 형태를 통해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왔다. 그러나 이미지의 영역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대량 인쇄술에 기반한 삽화와 신문, 잡지의 풍자화를 통해서였다. 오노레 도미에, 귀스타브 도레, 그랑빌, 에르네스트 그리셋 등의 활약상이 도드라졌다. 애니메이션에 발을 들인 이후로 디즈니는 종종 유럽으로 자료 조사를 떠나곤 했고, 이때 의인화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도록은 최고의 득템 거리였다. 그러나 초기 애니메이션들이 동물 캐릭터로부터 출발하지는 않았다. 라이브 액션과 애니메이션의 역사 초반에는 무엇이든 움직이기만 하면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즐거움을 주기에 충분했다. 영화 장치가 등장한 지 약 10년 후부터 단순한 움직임은 슬슬 흥미를 잃어가기 시작했고, 라이브 액션은 드라마를 전달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의인화된 애니메이션 캐릭터도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비중이 커지면서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

<주토피아>

대중매체에서 의인화가 활약한 까닭은 우회적이면서도 단박에 풍자의 효과를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의인화는 스테레오타입에 뿌리를 둔다. 인간의 개성, 혹은 집단의 전형성은 동물 각각의 몸짓, 성향, 기존 관념에 고스란히 덧씌울 수 있었다. 기사를 읽지 못하는 문맹자나 읽기 귀찮아하는(혹은 너무 바쁜) 독자들은 한칸, 한 페이지의 이미지만으로도 상황 파악이 가능했다. 에이젠슈테인도 어린 시절부터 인물의 전형성을 강조하는 의인화된 캐릭터를 그려왔던 터라, 그의 영화에도 계급과 지위를 한방에 전달하기 위해 동물과 인간을 오버랩시키는 시도들을 했다. 덕분에 관객은 즉각적으로 영화 속 인물을 파악할 수 있었다.

<주토피아>는 이러한 의인화 캐릭터의 스테레오타입에서 출발한다. 그러고는 고정관념에 균열을 내고 흔들고 뒤집어 세우려 한다. 정형성은 캐릭터 설정에 기반을 제공하지만, 이야기 전개과정에서는 의심되고 극복하려는 대상이 된다. 관객에게는 친밀함의 시발점으로 다가가면서도, 종국에는 그 친밀함을 그대로 따르지 말라고 유도한다. 꽤 흥미로운 전략이다.

시간을 지배해 움직임을 잡다

의인화한 캐릭터의 토대가 되는 스테레오타입을 의심하고 타파하려는 시도 그대로, <주토피아>는 카툰애니메이션이라는 스스로의 정체를 드러내고 반영하면서 뒤틀고 조롱하고 경멸한다. 예컨대 경찰서장이 ‘카툰 뮤지컬에나 나오는 이야기’라고 말하면서,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주인공 주디 홉스의 이상적 견해를 뭉개버리는 지점. 카툰 뮤지컬은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동격을 이룰 만큼이나 디즈니 스튜디오의 가장 큰 경쟁력이자 핵심이다(에이젠슈테인의 방문 목적도 결국 음악/사운드와 이미지/영상의 완벽한 결합, 그 비결을 찾으려던 것처럼). 세상은 그렇게 녹록한 것이 아니라는 일침은 세상을 이제껏 쉽고 아름답고 달콤한 것으로 그려냈던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대한 셀프 디스다. 물론 다분히 쇼맨십에 가깝다. 영화가 자기반영을 위한 장치를 도입한 것이 어디 하루이틀 일이던가. 다만 디즈니가, 그것도 애니메이션에서 이런 시도를 하기란 쉽지 않다. 드림웍스가 <슈렉>에서 했던 시도를 이제야 슬금슬금 하니 말이다.

카툰애니메이션이 지닌 본래의 재미는 슬랩스틱과 스쿼시/스트래치(신체가 짜부라지거나 쭉 늘어나는 표현), 추격전에서 찾을 수 있다. 적어도 30년대 초반까지의 디즈니 애니메이션도 이러한 요소들을 꽤나 경쟁적으로, 그리고 탁월히 추구했다. 그러다 실사보다 더 사실적인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쪽으로 스튜디오의 미적 지향점이 바뀌면서 기존의 카툰애니메이션 관습들은 사라졌다. 디즈니 애니메이션도 재미를 점점 잃어갔다.

그전까지만 해도 미키 마우스는 진지한 이슈의 중심에 섰다. 베냐민과 아도르노 사이의 서신 교환을 비롯한 일련의 논쟁들은 과연 미키 마우스가 당시의 자본주의 질서에 얼마나 전복적인 역할을 하는가에 관한 것이었다. 논쟁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스토리에 국한되지 않았고, 오히려 시끌벅적 난장판 속에서 늘어나고 짜부라들고 뒤틀리는 신체, 별다른 이유 없이 쫓고 쫓기는 추격전에서 벌어지는 몸개그, 얼토당토않은 상황과 해프닝의 연속 등등을 집어냈다. 그것들은 실사영화에서는 불가능한 카오스였고, 굳건해 보이는 지배 질서를 한방에 뒤흔들 법한 시도로 읽혔다. 쾌락이 전복의 힘으로 이어지느냐, 다시 기존의 질서 속으로 포섭되고 마느냐가 관건이었지 미키 마우스가 즐거움을 선사한다는 점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다시 말하지만 디즈니가 의심되기 시작하는 건 30년대 중반 이후의 행보에서부터다).

디즈니는 사실주의를 표방하면서 과도한 스쿼시/스트래치를 자제했다. 그런 표현은 애송이 스튜디오들이나 붙들고 있는 꼼수라고 여겼다. <주토피아>는 변형된 방식으로 스쿼시/스트래치를 다룬다. 커다란 동물들의 구역에서 조그만 동물들의 구역으로 건너가는 식으로 말이다. 말하자면 주인공의 신체가 커지고 작아지는 것은 앨리스가 아니라 걸리버를 따른다. 커다란 동물들의 틈바구니에서 주눅이 들어가던 주인공이 사건 해결의 열쇠를 찾아가는 계기/인연을 맺은 곳이 바로 갑작스레 들어선 작은 동물들의 구역이다.

늘어나고 줄어드는 것은 신체나 공간의 스케일에만 국한되지 않고 시간에도 적용된다. 이 작품의 신스틸러로 일컬어지는 나무늘보가 바로 시간을 지배하는 자이다. 하나의 공간에서 서로 다른 속도와 시간이 펼쳐진다. 상충하는 템포와 타이밍이 관객의 호흡마저 조절한다. 나무늘보가 하염없이 늘리는 시간은 슬로모션이다. 현실의 속도를 정지시키고, 그 흐름의 완급을 조절하는 것은 영화 촬영술의 뿌리 중 하나인 시간사진술이 추구한 것이다(이 글의 첫 부분과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나무늘보의 슬로모션, 한없이 더디게 흘러가는 시간, 그래서 육안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웠던 움직임의 원리를 찾는 것, 그리고 다시 원래의 시간과 템포로 되돌려 재생하는 것. 카툰애니메이션의 스쿼시/스트래치가 시간 기계로서의 영화와 결합되는 지점이다. 영화적 실험은 때로는 의외로 쉽고 재밌게 성취될 수 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즐거운 재발견

<주토피아>가 다루는 풍자가 예리하고 정교한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이 글은 의도적으로 그 지점을 피해갔다. <주토피아>의 풍자가 지닌 현실적 타당성 여부는 굳이 영화를 보지 않고 시놉시스 몇줄만 읽고도 공략 포인트를 잡을 수 있다. 하지만 풍자는 현실과의 일대일 대응으로만 접근해서는 안 된다. 풍자에는 모순도 있고 아이러니도 있다. 그 정도는 감안하고 들어가는 게 풍자를 즐기는 관객의 태도였다. 풍자는 대상을 부풀리기도 하고, 단순화시키기도 하면서 즐거움을 증폭시키고자 한다.

최초의 사운드애니메이션(여전히 논쟁이 가능한 지점이긴 하다)인 <증기선 윌리>의 미키 마우스가 한장씩 넘어가면서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장면, 그리고 바로 뒤이어 3D로 휘황찬란하게 설계된 신데렐라 성의 모습, 언제부턴가 디즈니 스튜디오의 작품은 고전적 2D와 첨단 3D의 어색한 공존을 맨 앞에 내걸고 있다. <주토피아>는 3D이면서도 2D 카툰애니메이션이 지니는 매력들을 회복한다.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추구하되 자신들이 이제껏 가장 잘했던 것을 비로소 되찾아낸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21세기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주토피아>를 통해서 본격적으로 자기가 걸어갈 길을 찾아낸 듯싶다. 관객은 다시 즐거움 속에서 논쟁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얼마 만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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