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인생의 고비마다 영화가 있었다
2016-03-24
글 : 이주현
사진 : 백종헌
재일동포 3세 김인우가 일본인 전문 배우로 자리매김하기까지

영화 <동주>(2016) <암살>(2015) <깡철이>(2013) <미스터 고>(2013) <강철대오: 구국의 철가방>(2012) <백자의 사람: 조선의 흙이 되다>(2012) <코리아>(2012) <마이웨이>(2011) <식객: 김치전쟁>(2010) <굿모닝 프레지던트>(2009)

일본 총리, 일본 대사, 일본 관리, 일본 장교, 일본 해설자, 일본 야쿠자, 일본 야구 구단주…. ‘일본인 전문 배우’라는 영역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닌데 배우 김인우는 일본인 전문 배우로 8년을 보냈다. 일본어가 제1언어인 데다 한국어 소통도 가능하고 연기력까지 갖춘 배우로서, 의도치 않게 ‘틈새시장’의 독보적 존재가 되었다. 캐릭터 독식의 비결은 언어가 아닌 연기. 국어를 잘한다고 연기를 잘하는 게 아닌 것처럼 당연한 이치다. <깡철이>에서 살벌한 기운을 풀풀 날렸던 야쿠자 아키토, <암살>에서 독립군의 ‘주유소 거사’를 도왔던 기무라, <동주>에서 시인 윤동주(강하늘)를 취조하던 특고형사, 바로 그 배우에 관한 이야기다.

한국행을 결심하게 만든 영화 두편

일본 미야기현 센다이 출신의 재일동포 3세. 조부모의 고향은 김해. 일본에선 다무라 히로토라는 이름으로 배우 활동을 했지만 김인우가 본명이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건너온 것은 2008년.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새 출발을 감행했다. “한국에 오기 직전, 그때가 인생의 가장 바닥이었다. 다 잃어버렸다. 건강도 잃고 인간관계도 어그러지고 돈도 없어서 카드회사에서 대출받고 살았다. 그때 본 두편의 영화가 나를 구해줬다. 하나는 <파이란>(2001), 또 하나는 <집으로…>(2002). 앞이 안 보일 정도로 펑펑 울었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는데, 어른이 되어도 어머니 생각은 떠나지 않더라. 두 영화를 보고 한국영화에 출연하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한국에) 갈까 말까, 3년을 고민했다. 마흔이 다 됐으니 다 버리고 가는 게 무서웠다.” 당시만 해도 한국어는 그에게 낯선 외국어였다. 하지만 배움에 대한 필요는 오히려 도전의 근거가 되어주었다. “한번뿐인 인생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한국어도 못하는 재일동포가 어디 있나 싶어서” 내처 짐을 쌌다. 그렇게 김인우의 배우 인생 2막이 한국에서 시작된다.

여기서 잠시 플래시백. 비빌 언덕도 없이 새로운 터전을 향했던 적이 과거에도 있었다. 중학생 무렵부터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직접 책임져야 했던 그는 고등학생 때 우연히 노무라 요시타로의 <의혹>(1982)을 보게 된다. 주인공 모모이 가오리의 연기가 “실제인지 연기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충격적”이어서 연이어 8번이나 영화를 봤고, “어떻게 하면 나도 배우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학교에서의 배움도 중요하지만 지금 하고 싶은 것을 하자”는 마음에 학교를 관두고 도쿄로 향했다. 도쿄엔 친척도 없고 지인도 없었다. 하루 16시간씩 아르바이트를 하며 틈나는 대로 연기 연습을 했다. 매니지먼트에서 전화안내 직원으로 잠시 일할 땐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꿈>(1990)에 단역(마을 사람들 중 한명)으로 출연하는 기회도 얻었다. 뮤지컬 배우가 되려 한 것은 아니나 춤을 익히면 연기에 도움이 되겠다 싶어 전문적으로 춤도 배웠다. 조•단역으로 보낸 시간은 길었지만 연극, 영화, TV, 뮤지컬 등 전방위에서 활동하며 쌓은 내공 또한 깊었다.

<동주>

인물을 살리고 이야기를 넓히고

어학당을 다니는 것으로 한국 생활이 시작되었다. 밀어주고 끌어주는 사람이 없는 상황은 한국도 일본과 다를 바가 없었다. 어학당에서 만난 일본인 친구의 도움으로 무명의 배우들을 소개받았고, 오디션 정보를 어떻게 찾는지, 프로필을 어디에 돌려야 하는지도 차츰 알아나갔다. 한국에서의 첫 출연작은 장진 감독의 <굿모닝 프레지던트>. 일본이 감행한 군사훈련 문제로, 청와대 집무실에서 차지욱 대통령(장동건)과 마주하는 일본 대사 역이었다. 두 번째 영화 <식객: 김치전쟁>에선 김치가 일본 고유의 음식이라고 주장하는 일본 총리로 출연했다. 촬영 두 시간이 지났을 무렵 일본 총리 역을 맡은 배우가 교체되는 바람에 애초 통역관 역이었던 김인우에게 총리 배역이 돌아갔다. 우연이라면 우연이고 실력에 대한 인정이라면 인정이었다. 일본군 장교로 30회차나 출연한 <마이웨이>에선 고생도 많이 하고 편집 또한 많이 당하는 아픔을 겪었고, 화려한 특별출연진을 자랑하는 <미스터 고>에선 요미우리 자이언츠 구단주로 등장해 구단주의 위엄을 드러냈다(일본에선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팬이었지만 정근우 선수의 멋진 플레이에 반해 지금은 한화 이글스의 팬이 되었다고).

<암살>

<미스터 고>에 함께 출연한 배우 김정태의 소개로 <깡철이>의 오디션을 봤다. <깡철이>에 이르러 김인우는 진정한 신스틸러란 무엇인지 확실히 보여준다. 깡패 상곤(김정태)과 휘곤(김성오)을 짧은 토막말과 눈빛으로 제압하는 야쿠자 아키토는 등장부터 퇴장의 순간까지 걸리면 뼈도 못 추리겠다 싶은 섬뜩함을 뿜어낸다. 일본어를 구사하다가 한국어(부산 사투리)를 툭 섞어 뱉는 화법도 예상치 못한 긴장감을 조성하는데, 그건 김인우의 아이디어였다. 최동훈 감독도, 이준익 감독도 <깡철이>에서의 연기를 보고 <암살>과 <동주>에 그를 캐스팅했다고 한다. 작품마다 출연 분량도 달랐고 캐릭터의 온도도 제각각이었만 그는 늘 자신만의 세계를 공고히 구축한 캐릭터를 선보이려 애써왔다. 더불어 본인도 캐릭터도 모두 빛날 수 있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 적극적으로 기회를 만들었다. <암살>에선 조선의 독립을 찬성하는 아네모네 카페의 일본인 바텐더 기무라를 연기했다. 이 역시 애초 그에게 주어진 역할은 아니었다. “처음엔 일본인 관료 역이었다. 임팩트는 있는데 스쳐 지나가는 느낌이 강해서 다른 느낌의 캐릭터를 연기해보고 싶다고 최동훈 감독님께 말했다. 그러자 감독님이 ‘독립군을 돕는 기무라라는 캐릭터가 있는데 분량은 조금밖에 안 된다, 그래도 괜찮으면 한번 이야기를 수정해보자’ 해서 캐릭터에 살을 붙여주셨다.” 아무렴,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특히나 일본인 형사 캐릭터는 전형적으로 그려질 가능성이 다분하다. 하지만 <동주>에서 그는 특고형사를 악질적이기만 한 인물이 아니라 일본 군국주의의 희생양일 수도 있는 오롯한 한 사람으로 표현했다. 후쿠오카 형무소 취조실의 마지막 장면. 소리 높여 대동아공영의 정당성을 설파하고 윤동주와 송몽규(박정민)에게 서명을 강제하던 특고형사는, 수치심으로 괴로워하며 자기고백을 하는 두 인물 앞에서 한순간 흔들린다. 영화는 윤동주와 송몽규의 고백을 교차편집해 보여주고 특고형사의 반응을 비춘다. 그에게 주어진 대사는 없었다. “그 순간을 어떻게 채울까, 생각이 많았다. 그 역시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싶었다. 특고형사를 연기하면서 나름의 전사를 만들었다. 그중 하나가 그에게 만주사변 때 독립군에 의해 사망한 동생이 있을 거라는 설정이었다. 그런 캐릭터라면, 어느 순간 윤동주와 송몽규에게서 자신의 동생이 보였을 것 같았다.” 그의 눈에 언뜻 눈물이 맺히지 않았더라면 그 장면의 여운이 이만큼 길었을까. 이준익 감독이 말하듯 “진영의 논리와 이념의 문제를 뛰어넘는 양심의 문제로까지 이야기가 확장”될 수 있었던 데는 김인우의 몫이 컸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윤동주 시인을 취조하는 일본인 형사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에 거부감은 들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그는 이런 대답을 들려주었다. “그런 역할을 하고 싶었다. 어릴 적부터 일본의 군국주의가 어떤 만행을 저질렀는지 들으면서 애국심을 키워왔으니까, 오히려 군국주의의 만행을 더 깊이 이해하고, 일본인보다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지 않겠나. 일본어가 100% 되니까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에) 나를 이용해달라. (웃음)”

<미스터 고>

더 넓은 영역에서 당당히 연기하기 위해

“평생 기억에 남을 작품”이라는 <동주> 이후엔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와 허진호 감독의 <덕혜옹주> 촬영을 끝냈다. 두 작품에서도 일본인 캐릭터로 출연한다. 올해 개봉예정인 국가인권위원회의 인권영화 프로젝트 중 신연식 감독의 단편 <과대망상자들>에선 처음으로 한국인 캐릭터를 연기했다. “신연식 감독님한테 한국인 역할을 하고 싶다 했더니 알겠다고 하더라. 한국어 대사가 한두줄이겠지 생각했는데 당황스럽게도 대사가 정말 많았다. 너무 어려운 말들로 가득했다. 정치적인 말들, 일상생활에서 쓰지 않는 말들. (웃음)” 언어의 문제로 제약받지 않고 연기의 영역에서 당당해지고 싶은 그는 매일매일 한국어 단어를 외우고 발음 연습을 한다. 제대로 된 한국인 캐릭터를 연기하는 게 목표이기에 당연한 노력이란다. 재일동포로서 차별에 노출돼 살아온 시간도 길었고, 무명배우로서의 고생담도 길고 길지만 지금은 한국에서의 생활이 무척 만족스럽다는 그는 “힘들었던 시기에 한편의 영화가 나를 구해줬듯이 나의 연기가 누군가에게 힘이 됐으면 하는 마음이 크다”고 했다. 독과점은 옳지 않지만 김인우의 일본인 캐릭터 독과점은 당분간 지속되어도 좋을 것 같다. 더불어 그의 한국인 캐릭터 도전도 응원한다.

<깡철이>

재능과 노력, 둘 다 빛나는

이준익, 신연식 감독이 말하는 배우 김인우

<동주> 이준익 감독

“송몽규와 윤동주의 역설이 결국엔 가해자인 자신(특고형사)의 모순된 논리를 자각하게 만든다. 그것을 굳이 대사로 치지 않고 감정으로 받아내는 선택도 김인우 배우가 했다. 내가 디렉션을 준 게 아니고. 이 이야기의 본질을 충분히 이해했고, 거기에 충분히 몰입했기 때문에 특고형사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낸 것이다. 조연이라기엔 드라마상에서 감당해야 할 비중도 컸기 때문에 주연배우 크레딧에도 세명의 이름(강하늘, 박정민, 김인우)을 넣었다. 또 <동주>와 <깡철이>를 일대일로 비교해보면 알겠지만 김인우 배우는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다. 그가 가진 배우로서의 잠재력은 훨씬 풍부하고, 그는 그걸 증명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배우다.”

<과대망상자들> 신연식 감독

“<과대망상자들>은 소수에 의해 우리의 삶이 통제당하고 있는 상황을 코미디로 풀어낸 인권영화다. 김인우 배우에게는 음모론자 중 한명인 치과의사 역을 맡겼는데, 영화에서 ‘뇌하수체의 이상으로 천편일률적인 사고를…’ 과 같은 한국인도 쉽게 소화하기 힘든 대사들을 하게 된다. 기왕 한국인 캐릭터에 도전하는 거 독하게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아주 힘든 역에 한번 도전하고 나면 다음번엔 무얼 하든 쉽지 않겠나 싶어서. (웃음) 한국에 오기 전까지는 한국어를 한마디도 못하던 분인데, 아무리 일본에서의 배우 공력이 있다고 해도 이만큼 한국어로 소통하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놀라운 의지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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