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배우가 거장 감독의 영화에 도전하는 이야기를 그려낸 <대배우>에는 영화에 대한 사랑이 진하게 녹아 있다. 굵직한 한국 영화들에서 없어서는 안 될 ‘천만요정’이었던 오달수가 여기선 주인공이고, 박찬욱 감독을 오마주한 ‘깐느박’(이경영), 설경구와 송강호와 최민식에서 한 글자씩 따왔다는 ‘설강식’(윤제문) 등 충무로의 영화인들을 떠올리게 하는 인물들이 속속 등장한다. <대배우>를 연출한 석민우 감독의 이력을 보면, 그 애정의 근원을 알 것 같다. <올드보이>(2003) 연출부로 시작해 <친절한 금자씨>(2005), <박쥐>(2009) 등 박찬욱 감독의 영화 조감독을 맡아왔던 그는 첫 장편으로 무명배우의 이야기를 택했고, 감독으로 입봉하는 과정에서의 자신의 절실함을 투영해내며 영화를 완성했다. 오랜 조감독의 세월을 거쳐 첫 작품 <대배우>를 세상에 내놓은 석민우 감독의 소회를 들어봤다.
-조감독 생활을 오래 했는데, 첫 장편 데뷔를 하는 기분은 어떤가.
=조감독을 계속 하다보니 내 작품을 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더라. 그렇지만 조감독을 오래 한다고 감독의 기회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고, 조감독을 잘한다고 해서 감독을 잘하는 것도 아니다. 이러다간 감독 데뷔를 못하겠다 싶어 조감독을 그만두고 두편을 준비했는데 엎어지고, 세 번째 작품에서 데뷔하게 됐다. 이거마저 엎어지면 그만둬야 하나 생각을 하던 터라 작품에 절실함이 잘 묻어나온 것 같다.
-<친절한 금자씨>부터 <박쥐>까지 박찬욱 감독의 영화 4편의 조감독을 맡아왔다.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선배인 이계벽 감독이 조감독한 <올드보이> 연출부 막내로 들어간 것을 인연으로 <쓰리, 몬스터>(2004)까지 연출부를 했다. 그런데 조감독과 연출부 형들이 감독 준비를 한다고 나가서 연출부에 나만 남은 거다. 그들이 나를 추천해 <친절한 금자씨> 때 조감독으로 급속 승진했다. (웃음) 박찬욱 감독님은 함께 작품을 해본 적 있는 사람을 조감독으로 쓰는 편이라. 감독님과 호흡이 잘 맞아 이후로도 물 흐르듯 함께 작업하게 됐다.
-첫 장편 <대배우>는 무명배우를 주인공으로 한다.
=<박쥐> 때, 박 감독님이 새로운 배우를 찾아보자고 했었다. 대학로 극단들을 뒤져 30, 40대 배우들을 찾아다녔는데, 떨어진 분 중 한분이 전화를 해서 정중하고 간절하게 이 영화, 이 역할이 꼭 하고 싶다고 하더라. 그런 전화를 많이 받는데 그분은 이상하리만큼 여운이 오래갔다. 영화 소재를 찾을 때, 그 기억이 떠올랐다. 그분이 영화에 캐스팅됐다면 어땠을까 하는 가정으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쓰면서는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더라. 감독 입봉을 해야겠고 영화를 포기하긴 싫은데 가장의 책임감도 만만찮고. 스스로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대배우>는 결국 절실함에 대한 이야기다.
-배우 오달수가 주연을 맡은 것이 이 영화의 한수다.
=’성필’이란 역할은 연극배우가 20년간 연기를 한 페이소스가 얼굴에 녹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내공을 표현할 수 있는 건 오달수 선배밖에 없었다. <올드보이>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 팬이 됐다. 연기를 자신만의 스타일로 너무나 재미있게 해서, 슬레이트를 치면서 웃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을 정도다. (웃음) 그때부터 오달수 선배가 주인공인 영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시나리오부터 그를 생각하며 썼다. 오달수 선배에게 시나리오를 건넸을 때 너무 긴장됐는데, 예전에 <박쥐> 때 술자리에서 내 작품에 출연해주기로 했던 약속을 기억하고 계시더라.
-이경영의 깐느박 연기가 일품인데, 실제 박찬욱 감독의 캐릭터를 참고했나.
=똑같이 묘사하려 한 건 아닌데, 신사적이고 품위 있는 감독 캐릭터를 만들려다보니 실제 박 감독님과 비슷해졌다. “뭐하는 거니”처럼 ‘~니’로 끝나는 말투는 박 감독님 실제 말투와 비슷하다. (웃음) 박 감독님을 모르는 배우가 깐느박 대사를 리딩하면 “뭐하는 거니!” 하고 화를 내더라. 원래 박 감독님은 존경스러울 만큼 화를 내지 않는다. 깐느박을 연기한 이경영 선배도 박 감독님을 잘 알고 있어 자연스럽게 표현됐다. 그외에 “액션하고 3초를 센 후, 대사를 쳐라” 같은 대사도 박 감독님이 많이 하는 이야기다.
-영화 속 영화로 등장하는 <악마의 피>는 <박쥐>를 오마주한 작품이다.
=성필이 도전하는 영화로 어떤 영화를 할지 고민했는데, 실제 거장 감독의 작품을 떠오르게 하는 작품을 하는 게 성필이 왜 그렇게까지 저 영화를 하고 싶어 하는지 잘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박쥐> 시나리오를 다시 보는데, 영화 속 노신부의 상황과 대사가 성필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더라. 눈을 뜨기 위해 피를 갈구하는 노신부만큼 성필도 간절하지 않나. 그래서 <악마의 피>를 만들고 성필이 도전하는 배역으로 ‘리체스 신부’를 설정했다.
-무명배우가 천재성을 드러내며 모든 것을 돌파하는 성공담이 아니라, 열정만으로는 안 되는 세상이라는 걸 담담히 보여주며 한계를 끌어안는 이야기라 인상 깊었다.
=모두가 성공하는 사람들 이야기만 하지 실패하는 사람의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재능은 없지만 노력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판타지에 불과한 희망은 주고 싶지 않았다. 노력해도 안 되는 건 분명히 있다. 그렇다면 잘 실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패하더라도 할 수 있는 데까지 하는 게 중요하다. 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희망도 남아 있으니까.
-박찬욱 감독은 영화를 봤나.
=초고를 보여드릴 때 깐느박 역할에 기분이 나쁘실까봐 걱정했는데,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으시고 오로지 영화적으로만 봐주시더라. 무명배우 얘기라 상업적으로 풀릴지 걱정되는 면도 있지만 재밌다고 하셨다. 1차 편집본을 보시곤 “이 신은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내가 감독이라면 뺄 것 같다”는 식으로 존중하며 말씀하시는 게 역시 멋지더라. (웃음) 그 피드백을 받고 신을 뺐는데 나중에 보니 빼길 잘한 것 같다.
-영화에서 박찬욱 감독과 그의 작품을 오마주했는데, 정작 작품에선 그의 스타일이 보이지 않는다.
=박찬욱 감독과 김지운 감독 작품의 조감독을 했다는 이유로 “너도 작품하면 복수극하겠지” 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웃음) 나도 그런 이야기를 좋아하지만, 그분들을 흉내낼까봐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복수극은 배제했다. 덜 상업적일 수 있더라도 내가 잘할 수 있고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당신만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어떤 것인가. 향후 계획은.
=장르보다 이야기가 먼저다. 남들이 하는 이야기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가 내 취향이다. 최근엔 막연히 실화를 바탕으로 한, 사람 사는 이야기들이 눈에 들어오더라. 일단 두 번째 작품을 하는 감독이 되는 게 목표이고. (웃음) 장기적으론 최근작이 최고작인 감독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