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터/액트리스]
[브라이언 크랜스턴] 머물러 있지 않는 배우
2016-04-12
글 : 윤혜지
<트럼보> 브라이언 크랜스턴
<트럼보>

영화 2016 <겟 어 잡> 2016 <쿵푸팬더3> 2015 <트럼보> 2014 <고질라> 2013 <콜드 컴즈 더 나잇> 2012 <아르고> 2012 <토탈 리콜> 2012 <락 오브 에이지> 2012 <마다가스카3: 이번엔 서커스다!> 2012 <존 카터: 바숨 전쟁의 서막> 2012 <레드 테일즈> 2011 <배트맨: 이어 원> 2011 <로맨틱 크라운> 2011 <드라이브> 2011 <리브> 2011 <디태치먼트> 2011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 2006 <미스 리틀 선샤인> 2004 <일루전> 2004 <씨잉 아더 피플> 1998 <라이언 일병 구하기>

TV시리즈 2008∼13 <브레이킹 배드> 2006∼13 <내가 그녀를 만났을 때> 2012 <30 Rock> 2011 <로봇 치킨> 2006∼8 <패밀리 가이> 2000∼6 <말콤네 좀 말려줘> 2003∼5 <릴로&스티치: 시리즈> 1999~2001 <킹 오브 퀸즈> 1998 <엑스파일> 시즌6 <악마의 질주> 1989 <SOS 해상 구조대>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브레이킹 배드>와 <트럼보>는 인간이 생을 지속할 수 있게 하는 동력이 무엇인지에 대해, 무척 달라 보이지만 결국 연결되고 마는 답을 내놓는다. 그리고 그 해설을 브라이언 크랜스턴이 맡았다. 초기 경력에서 그는 <브레이킹 배드> 이전에도 숱한 TV시리즈와 영화에 출연했지만 그때 주어진 역들은 대개 코믹한 단역이거나 평범한 조역이었다. ‘리 스톤’이라는 가명으로 수편의 TV애니메이션 목소리 연기를 해서 생계를 잇던 때도 있었다. 어느 정도 경력을 쌓고 나선 <말콤네 좀 말려줘>의 사랑스러운 골칫덩이 아빠 역할 덕택에 유쾌한 시트콤 배우로 알려졌다. 역전극의 시작은 200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작가조합이 파업 중이던 2007년, 시나리오작가 빈스 길리건은 일이 없던 상태였다. 그가 ‘할 일도 없는데 캠핑카 끌고 마약이나 만들면서 돌아다니자!’라던 망상을 실행에 옮긴 것이 <브레이킹 배드>의 초기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상황이 좋지 않아 제작 환경이 열악했고 최우선으로 고려된 캐스팅 명단은 의미없는 종잇조각이 됐다. 뜻밖에도 기회는 브라이언 크랜스턴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이듬해 전파를 탄, 우연히 마약왕으로 돌변하는 중년 남자 월터 화이트는 브라이언 크랜스턴의 삶까지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50살 생일에 내려진 암 선고는 월터의 인생을 뒤엎는다. “화학이란 무엇일까. 난 화학을 변화의 학문이라 말하고 싶구나. … 그리고 그것이 삶이란다”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던 기간제 화학 교사는 자신의 말대로 거대한 변화를 맞이한다. 자연의 정확한 규칙과 질서를 연구하던 학자에게 통제가 불가능한 생의 미지수들은 풀기 힘든 난제였을 것이다. 월터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도 운이 나빠 한직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고 먹고살기 위해 퇴근 후엔 세차장 아르바이트까지 해야 했다. 아내는 막 둘째를 가졌으며 하나뿐인 아들은 뇌성마비 환자다. 그리고 자신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화학식을 이용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뿐. 월터는 속절없이 악마와의 거래에 손을 뻗는다. 생계의 절박함과 남겨질 가족에 대한 걱정으로 마약 제조를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를 지배하는 건 다른 사람은 할 수 없는, 오로지 자신만이 해낼 수 있는 일에 대한 성취감이다. 어떤 것도 욕심껏 할 수 없던 중년 남자는 순수하게 자신의 능력으로 삶을 통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한다. 성취감은 곧 도취로 변해 독처럼 그를 잠식해나간다. 과잉일 것 같은 인물의 역사가 현실적인 설득력을 얻은 것은 브라이언 크랜스턴의 다채로운 연기 덕이었다. 평범한 시트콤 배우라 평가받았던 그는 <브레이킹 배드>로 할 수 있는 한의 최고의 연기를 선보였다. 무력한 소시민이 괴물이 되어가는 과정은 드라마부터 스릴러, 블록버스터, 코미디까지 전 장르를 아울러 그려졌다. 브라이언 크랜스턴은 도무지 동의할 수 없는 남자를 연민하게 만들면서도 시청자들이 월터에게 적당한 거리감을 두도록 함으로써, 드라마가 지향하는 방향을 분명히 할 줄도 아는 노련한 배우였다.

당연히 <브레이킹 배드> 이후로 브라이언 크랜스턴의 입지는 크게 달라졌다. 그의 출연료는 동류의 배우들 사이에서 가장 높은 금액으로 책정되었다. 그는 제60회, 제61회, 제62회 에미상에서 <브레이킹 배드> 한 작품으로 3년 연속 드라마부문 남우주연상을 차지했고 마지막 시즌으로 제66회 에미상에서도 드라마부문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브레이킹 배드>가 막바지로 치닫는 동안 브라이언 크랜스턴에게는 할리우드의 러브콜이 쏟아졌다. <토탈 리콜>에선 묵직한 악역이 주어졌고, <아르고>에선 CIA 국장 오도넬 역을 맡아 스릴 넘치는 연기를 보였다. 기준이 다소 모호하지만 <아르고>는 ‘번듯한’ 할리우드영화 중 그가 처음으로 메인 포스터에 이름을 올린 작품이었다. <고질라>의 완고한 핵물리학자 역으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도 늦깎이로 데뷔했다.

천천히 연기 영역을 확장해나가던 브라이언 크랜스턴은 또 하나의 난제와 만난다. 1940년대 미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시나리오작가인 동시에 할리우드 한복판의 공산주의자였던 남자, <트럼보>의 돌턴 트럼보다. <브레이킹 배드>가 내면을 좀먹어가는 어둠을 직선적으로 돌파한 작품이라면, <트럼보>는 여러 자아를 가진 남자를 넓고 깊게 표현해야 했다. 트럼보는 창작 욕구를 지닌 작가, 정치적 신념과 권리를 지키려는 미국 시민, 가정을 지탱해야 하는 위태로운 가장이자 남편이자 아버지인 복잡한 남자다.

언제나 여유와 위트를 잃지 않았던 스타 작가는 연타로 자신을 내리치는 것들과 쉴 틈 없이 싸워 이겨야만 했다. 브라이언 크랜스턴은 트럼보의 운명을 ‘투사’로서 이해했다. “트럼보는 투사예요. 그는 글쓰기를 즐기는 예술가지만 한편으론 요금과 서비스에 불만을 품고 전기 회사에 전화를 거는 사람이기도 했죠. 그건 그가 언제든 싸울 수 있는 사람이었단 뜻이에요.” <트럼보>에서 브라이언 크랜스턴은 복잡하면서도 혼란스럽다. 상식과 정의가 무너져가는 작태에 통탄하고 체념하면서도 작가적 의지로 곤경을 극복하려 한다. 기껏 쌓아온 모든 것들이 난폭하게 발가벗겨지고 무너졌을 때, 아마도 쓴다는 것 자체가 그를 지탱하는 힘이었을 터다.

다수의 전작에서 ‘화이트칼라’ 노동자를 연기할 때 브라이언 크랜스턴은 대개 굳건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었다. 코미디극에선 유연하고 쾌활했다. <트럼보>에서처럼 긴 시간을 꼿꼿이 버텨내본 적이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놀라운 건 오랜 시간 글을 써온 사람에게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들, 가령 굽은 목과 등, 펜과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는 데 익숙해진 손놀림, 꾸준히 찾아드는 허리 통증 등 이 모두를 그가 그대로 몸에 익혀 보여준다는 것이다. 영화가 1940년대에서 1970년대로 이동하는 동안 그의 등과 어깨는 더욱 굽어갔다. 가슴속에 자괴감이 깊게 자리하며 건강하던 몸은 앙상하게 말라갔고 미간의 주름도 깊어졌다. 고된 싸움에 안팎으로 지쳐갔지만 트럼보는 그 뒤 두번, 옛날의 환한 얼굴을 되찾는다. 딸 니콜라(엘르 패닝)와 화해를 할 때 그리고 오명을 씻고 트로피를 되찾은 소감을 남길 때다. 두 경우가 다 자신이 싸워온 목적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냈을 때인 것이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오롯한 자신으로 서기 위해 악마가 되어야 했던 월터 화이트와 자신을 완성하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 외로운 싸움을 시작한 돌턴 트럼보는 결국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인물이다. 제66회 에미상 시상식에서 브라이언 크랜스턴은 다음과 같은 소감을 남겼다. “연기할 수 있는 데에 무척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마지막 숨을 뱉는 순간까지 연기를 하고 싶어요. 특히 나를 이 자리에 있게 해준 빈스 길리건에게 고맙습니다. … 가만히 머물러 있지 마세요. 기회를 잡으세요. 위험을 감수하세요. 열정을 되찾으세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세요. 그것이 당신을 가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줄 겁니다.”

<엑스파일>

문신까지 새긴 우정

브라이언 크랜스턴과 빈스 길리건은 <브레이킹 배드>로 만나기 전 <엑스파일>로 먼저 알고 지냈다. 브라이언 크랜스턴은 <엑스파일> 시즌6의 <악마의 질주> 에피소드에서 빠른 속도로 달리지 않으면 머리가 터져 죽는 남자 패트릭 크럼프를 연기한 바 있다(이유는 정부가 불법으로 크럼프 집 마당에 묻어둔 음향 장비 때문이었고, 멀더와 스컬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크럼프는 결국 죽는다). <악마의 질주> 에피소드를 쓴 작가가 빈스 길리건이고, 십여년이 흘러 둘은 두 사람 모두의 최고작이 된 <브레이킹 배드>로 다시 만나게 된다. 덧붙이자면, <브레이킹 배드>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세 사람, 브라이언 크랜스턴과 빈스 길리건, 에런 폴은 우정의 의미로 손가락 사이에 <브레이킹 배드>의 로고를 문신으로 새겼다고 한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