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야 마틴
1984년 필리핀 마닐라 출생. 2005년 필리핀대학 졸업 후 방송국, 잡지사 등에서 경력을 쌓았다. <필리핀 인디오에 관한 짧은 필름> <오토히스토리아> 등으로 이름을 알리며 필리핀영화계의 신성으로 떠올랐다. 2009년 필리핀 13인 아티스트 어워드에 선정됐고 파리, 뉴욕, 부에노스아이레스, 멕시코시티에서 그의 회고전이 열리는 등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작가다.
앙투안 티리옹
1981년생. 영화평론가이자 작가, 프로그래머다. 2003년부터 2009년까지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근무했다. 2009, 2010년 르 상카르트(Le Centquatre) 센터 상주 아티스트로 활동했다. 2009년 제임스 베닝 회고전, 2015년 라브 디아즈 회고전을 기획했다. 2009년 라야 마틴과 단편영화 작업을 함께했고, 2015년 광주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두개의 퍼포먼스를 기획 중이다.
라야 마틴은 필리핀을 대표하는 젊은 감독 중 한 사람이다. 하나 그를 단지 신성으로 분류하는 건 충분치 않다. 영화에 순위 따윌 매기는 건 무의미한 짓이란 걸 알면서도, 우리는 놀라움과 마주했을 때 기존의 지식과 대조하며 상대를 가늠할 수밖에 없다. 라야 마틴의 독창성은, 그의 생경한 에너지는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이 등장했을 때의 충격과 견주어도 한치 밀리지 않는다. 허문영 평론가의 평가를 빌리자면 “어떤 유형화와 지도 그리기에도 편입되기를 거부하는 유령의 영화, 그 스스로 유령인 영화”를 만들어온 라야 마틴이 이번엔 영화의 경계를 넘어선 작업을 선보인다. 4월29일부터 5월1일까지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 극장1에서 복합 전시 공연 <언도큐멘타>가 공개될 예정이다.
우선 몇 가지 사실을 미리 밝혀두자면 이 글은 <언도큐멘타>를 보지 못한 상태에서 작성됐다. 심지어 이 공연이 어떤 형태로 펼쳐질지에 대한 정보도 거의 듣지 못했다. 공동감독을 맡은 라야 마틴과 앙투안 티리옹은 이 공연의 전모가 너무 자세하게 전달되는 것을 우려했다. 왜냐하면 <언도큐멘타>는 제목 그대로 ‘도큐멘테이션’(documentation: 활동, 사건 등을 입증하기 위해 모아놓거나 생산된 자료 일체)을 거부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건을 기록하고 시간이 흐른 뒤 그것을 역사라 정의한다. 여기에 의문을 제기해보자. 기록되지 못한 사건은 역사가 아닌가. 기록의 취사선택은 누구의 기준인가. 기록된 거짓은 역사가 될 수 있는가. 재현된 기록을 접하는 현재의 우리는 역사를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1890년 스페인 식민시대를 투사한 <필리핀 인디오에 관한 짧은 필름>(2005)부터 필리핀 혁명당 창설자 보니파쇼를 경유하는 <오토 히스토리아>(2007), 다시 식민지 시대를 꺼내든 <인디펜던시아>(2009)까지, 라야 마틴은 서사 재현에 기대지 않고 역사를 이야기한다. 이제까지의 역사영화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과거와 대화하는 그의 작업이 이제 스크린 바깥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언도큐멘타>는 본질적으로 문자로 옮겨질 수 있는 성질의 공연이 아니다. 이것은 그 순간의 조응이고, 잃어버린 역사의 한 부분이며, 기록되지 않을 퍼포먼스다. 그럼에도 굳이 여기서 <언도큐멘타>를 미리 소개하는 건 당신이 혹여 알지 못한다는, 또는 낯설다는 이유로 그 순간을 놓칠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선택적으로) 기록된 역사 바깥에서 우리가 응시해야 할 대상은 어디에 있는가. 답은 4월29일 광주에서 만날 수 있다.
-낯선 땅에서 생소한 형태의 작품을 공연한다. 처음에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나고 함께하기로 한 건지 그 과정이 궁금하다.
=라야 마틴_단편, 장편, 다큐멘터리 장르를 가리지 않고 10년 정도 영화작업을 해왔다. 굳이 영화라는 형태에 국한되지 않고 필리핀 역사에 대한 작품들을 만들어왔다. 역사 앞에서 고뇌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해왔다고 보면 되겠다. <언도큐멘타>는 지난해에 광주의 초청을 받아 시작한 프로젝트다. 크게 보면 역사를 다루는 작품이랄 수 있는데, 낯선 곳에서 역사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게 이상하게 받아들여질지도 모르겠다. 지난해 광주에 왔을 때 1980년 광주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듣고 필리핀에서 있었던 일과 상당한 연관성이 있음을 느꼈다. 엄밀히 말하자면 역사를 이야기하는 작품이라기보다는 역사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참여하는 체험을 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구상한 게 페스티벌에 가까운 공연이다. 앙투안과 처음 만난 것도 필름 페스티벌이었고. 표면적으로는 그 안에 다양한 형태의 퍼포먼스가 들어간다. 그 결과물이 <언도큐멘타>라는 형태의 복합 전시 공연이다.
-프로젝트는 누가 먼저 제안했는가. 서로 같이 하면 좋겠다고 판단한 지점은 무엇인가.
=라야 마틴_굳이 순서를 따지면 내가 먼저 한 셈이지만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나온 아이디어라 제안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나와 앙투안 사이의 대화들이 곧 프로젝트가 되었다. 물론 그 작업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아마도 전시 공연을 하는 동안에도 그럴 것이다.
앙투안 티리옹_10년 가까이 영화비평가로 활동하면서 아시아쪽 필름 페스티벌에 자주 참석하던 중 라야 마틴을 만났다. <인디펜던시아>(2009)를 생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원래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에 관심이 많아서 금방 친해졌다. 비슷한 연령대의 공감대가 있는 영화인들과 함께 작업하고 싶은 마음이 항상 있었다. 마침 광주에서 제안이 왔을 때 ‘잃어버린 필름’이라는 주제로 풀어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내가 미술 전시, 영화제 등의 프로그래밍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진행됐다.
영화제 주변의 파편들을 모으다
-영화제라는 형태가 독특해 보이긴 하는데 솔직히 감이 잘 안 온다. 무엇을 보여준다는 이야기인가.
=라야 마틴_사실 영화제를 가도 막상 영화를 보진 않지 않나. (웃음) 나는 멕시코영화제에 갔을 땐 일주일간 숙소에 틀어박혀 TV만 본 적도 있다. 영화제에 가면, 영화를 보는 시간보다 영화관 바깥에서 동료 감독들을 축하하고 함께 나누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은 게 대부분이다. 그 시간을 통칭해서 우리는 ‘영화제’라고 말한다. 한번은 야밤에 비평가, 감독들과 술을 마시면서 각자 자기가 본 관점에서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는데, 완전히 다른 형태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걸 보며 흥미를 느꼈다. 영화는 한 가지 비전을 제시하지만 관객은 각자 자기만의 관점으로 해석한다. 그때 우리는 전혀 다른 영화‘들’의 탄생을 목격할 수 있다. <언도큐멘타>는 그 과정을 실시간으로 재현한다고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다양한 섹션을 통해 영화 상영 사이의 시간, 경험들을 제공한다.
앙투안 티리옹_아벨 페라라 감독의 영화 상영 후 영화평론가 장 두셰가 진행하는 Q&A를 본 적이 있다. 솔직히 그때 나는 영화 시작한 지 10분 만에 잠들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Q&A는 내가 기억하는 최고의 토론 중 하나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영화를 사랑하기 위해선 영화를 얼마나 많이 보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영화 주변에서 얼마나 오래, 제대로 머무르는지가 더 중요할 때도 있다. 필름 페스티벌에서 생각을 공유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설사 영화를 보지 않아도 그 체험 자체가 의미 있다. <언도큐멘타>는 영화제 주변의 시간들을 통해 그 조각들을 모아보고자 한다.
-왜 제목을 <언도큐멘타>라고 붙였나.
=앙투안 티리옹_이 공연, 아니 그냥 영화제라고 부르겠다. <언도큐멘타>는 유실된 필름들로 구성된 일종의 비경쟁 영화제다. ‘전시회는 모던 아트의 기록’이라는 의미에서 이름 붙여진 현대미술 전시회 <도큐멘타>에 경의를 표하는 한편, 그것과는 정반대 영역을 지향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영화의 파편들을 모아 세계 구석구석의 잊힌 이야기를 불러내려 한다.
라야 마틴_쉽게 말해 기록으로서의 ‘도큐멘테이션’(문서화)의 반대라고 생각하면 된다. 대본을 쓰고 영화를 찍고 기록을 남기고 끝내 사라지는 게 아니라 그 과정을 거꾸로 뒤집어보는 거다. 가령 우리가 어떤 행위를 보는 순간 그건 하나의 행위이지만 그걸 찍으면 하나의 기록, 그러니까 ‘도큐멘타’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고자 하는 건 기록물로서의 도큐멘타가 아니라 그 주변에서 이뤄지는 퍼포먼스의 순간을 실황으로 재현하고 이에 참여시키는 작업이다.
-어떤 프로그램과 구성으로 그 순간들을 재현할 생각인지.
=라야 마틴_크게 4가지 섹션이 있다. ‘오늘날의 흐름’ 섹션에선 현재의 이슈를 건드리는 영화들을 보여주거나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재현할 예정이다. ‘무성영화’ 섹션은 세상의 이미지들과 사운드가 관계 맺는 방식에 대해 탐구한다. ‘감독 회고전’ 섹션은 오랜 분투를 통해 족적을 남긴 감독들, 그들이 기존에 선보이지 않았던 영화들의 연작과 그 흔적, 반응들을 모아 이야기한다. 마지막으로 ‘주목할 만한 국가’에서는 전시로 확대하여 국가의 기억과 기록에 대해 질문을 던져보려 한다.
-영화 없는 영화제, 영화 바깥의 영화제라고 불러도 좋을까.
=앙투안 티리옹_정확히는 사라져버린 영화사, 잃어버린 영화들을 다시 불러들이는 영화제다. 다만 필름의 복원과는 조금 다른 개념이다. 우리는 기록물이 가지고 있는 조건과 한계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명확히 규정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이자 배제된 것들을 통해 거꾸로 잊힌 역사를 되짚어보는 작업이다. 가령 아카이브가 기록되어진 역사라고 한다면 그것이 사라졌을 때 어떤 일이 발생할 것인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규범의 자리를 무엇이 대체할 수 있을까. 잃어버린 자료가 우리에게 어떤 말을 걸고 있나. 그것은 무엇을 역사라고 믿는지(혹은 정하는지)의 문제일 수도 있고 역사를 받아들이는 방식에 대한 문제일 수도 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기록이 부재할 때 남겨진 사람들이 그것을 메우고 대체하는 방식이다. 요컨대 공백이 생기기 전에는 공백의 존재조차 알 수 없다. 그래서 공백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자는 것이다.
라야 마틴_우리에게 영감을 안기는 일화가 있다. 1982년 멕시코시티의 국립영상자료원 보관소에 불이 나서 아카이브 소장 자료의 99%를 잃었다. 필름의 재료인 질산염 셀룰로이드는 어떤 조건에서 자연발화하기도 한다. 일찍이 오슨 웰스는 “필름은 자기파괴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겠지만 이 급작스런 부재는 기록된 것과 기록되지 않은 것을 동등한 위치로 만들어준다. 어떤 의미에서 영상자료들은 규범의 테두리 안에서 선택적으로 기록된 것들이다. 이것이 역사의 전부가 될 수 있는 것인가. 역사가 자기 존재에 관한 가장 많은 흔적을 남긴 이들을 통해 말해지는 거라면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은(혹은 여러 정치적 이유로 거부된) 이들의 존재는 어쩔 것인가. 우리는 이들에게 관심을 돌려 보지 못한 것들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숱한 영화제를 예로 들자면 내 개인적인 체험은 상영된 영화가 아니라 영화제 바깥의 거리에 있었다. 하지만 기록으로 남는 영화제는 상영된 영화들에 관한 감상, 논평들일 것이다. <언도큐멘타>는 그런 기록되지 않는 순간들을 위한 영화제다.
“직접 보면 안다”
-<언도큐멘타> 프로젝트는 결국 라야 마틴의 영화 세계와 연결되는 것 같다. 가령 <인디펜던시아>에서 당신은 필리핀의 역사와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세대가 어떻게 역사를 대면하는지를 보여줬다. 공백을 다른 상상력으로 메우는 게 아니라 그것이 비어 있다는 걸 드러내는 방식으로 말이다.
=라야 마틴_이번엔 잃어버린 영화들을 되살리는 다양한 방법에 대해 고민했다. 한국영상자료원과 협업 중이고 여러 필름과 자료들을 지원받기도 했다. 물론 공백을 채워넣는 건 아니다. 다만 공연과 페스티벌 형태로 공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장을 마련하려 한다. 가령 무성영화에 더빙을 할 수도 있고 대본만을 가지고 와서 사라진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다. 무엇이 사라졌고 왜 사라졌는지 질문해보는 거다.
앙투안 티리옹_역사는 특정한 시점, 주체에 의해 조절되고 만들어지는 것이다. 어떤 프레이밍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어떤 것은 빠지고 어떤 것은 중심이 된다. 우리의 관심사는 역사로부터 거부당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의 역사는 그것이 사실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찍고 남겨지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때문에 우리는 영화 바깥의 영화, 바깥을 향한 영화제를 만들어보고자 한다.
-한편으론 지금 계속 작품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게 민망하고 무의미한 것처럼 느껴진다. 이번 프로젝트가 어떤 지식이나 정보로 환원될 수 없는 대상을 위한 것이라면 말이다.
=라야 마틴_(한참을 침묵하고 고민하다) 지금 이 자리를 설명하는 적절한 감상 같다. 나도 적절한 단어를 찾진 못했다. 설명으로 전달되지 않는 것들로부터 출발한 프로젝트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있었던 일, 그러니까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만 이야기한다는 행위 자체는 실황이다.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바로 그 순간이다.
앙투안 티리옹_각자의 네트워크를 활용해 많은 분들을 페스티벌에 모으려 한다. 유운성 평론가, 한국영상자료원 모은영 프로그래머를 비롯해 감독, 제작자 등 다양한 분야의 게스트들이 함께할 것이다.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 그리고 여러분이 그곳에 참여하는 순간부터 의미가 시작된다. 기록되지 않을, 거기서 반짝 생겨나고 휘발될, 하지만 분명히 존재할 사건들이다. 막상 어떻게 진행될지 그 순간이 되기 전까진 우리도 알 수 없다. 영화 없는, 국경 없는, 나라 없는 영화제다. 어떤 의미에선 이번 프로젝트 진행과정도 마찬가지였다. 각자의 역할을 따로 정해놓을 필요가 없었다. 그저 라야 마틴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는 걸로 충분했다.
-거칠게 묻자면, 역사란 무엇인가.
=앙투안 티리옹_역사는 재현이 아니다. 흉내내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날짜 같은 정보를 외우는 것이 아니라 그 주변 상황을 읽어내려는 창의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학습된) 사실에 대한 확신과 믿음은 종종 다른 것들을 보지 못하게 가린다. 그럴 바엔 당신이 아직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게 더 낫다.
라야 마틴_역사는 현재라고 생각한다. 물론 과거는 현재를 결정하는 기반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행위가 미래를 좌우하기 때문에 결국 과거란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는 중간 다리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영화 감상 그 자체보다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글을 쓰는 등 외적인 행동이 더 능동적으로 ‘영화를 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찍는 건 현재를 과거로 보내는 거지만 이번 영화제의 퍼포먼스는 영화를 현재로 만드는 활동인 셈이다.
-말로만 들으니 알 듯 말 듯하다.
=라야 마틴, 앙투안 티리옹_(웃음) 우리도 정말 설명하기 힘들다. 직접 와서 보면 안다. 겁먹지 말고 와서 보고 이야기를 나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