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이용철의 영화비평] 춤추며 살아내기
2016-04-21
글 : 이용철 (영화평론가)
미친 소녀가 피워내는 삶의 기운, <스틸 플라워>

※결말에 대한 묘사가 있는 글임을 밝힌다.

<스틸 플라워>

소녀들이 길을 떠나는 엔딩을 언제나 좋아했다. 그들 앞에 놓인 철길이 불안과 희망으로 설레게 했다. <저주받은 재산>(1966)과 <천국의 나날들>(1978)이 그랬다. 관습에 저항하고 자유를 갈망하던 자들이 죽거나 희생한 길의 끝에서 소녀들만이 미래로 향한다. ‘아비치’의 노래 <날 깨워줘>(2014)의 뮤직비디오에도 길을 떠나는 자매가 나온다. 자매는 보수적인 마을에서 외계인 취급을 받으며 산다. 동생이 푸념한다. “그들은 우리를 싫어하나봐.” 어느 날, 소녀는 동생을 깨워 떠나자고 말한다. 동생이 묻는다. “어디로?” 소녀는 답한다. “우리가 속한 곳으로.” 그들은 어디로 갈까? 그들이 속한 곳이 과연 존재하기는 할까? 어쨌든 떠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성인 남자들이 만든 시스템 속에서 살기에 소녀들은 어울리지 않는다. 소녀들은 맞서는 게 맞다. 피가 너무 뜨거워서, 규칙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기에 타인들로부터 이상한 존재로 취급받는 사람들이 있다. 중세에는 그들이 ‘마녀’라 불렸다지.

어느 새벽, 하담은 떠밀리듯 도시에 도착한다. 소녀는 그곳에서 일주일을 보낼 것이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의 그녀를 보며 뭉크의 여자들을 떠올렸다. 뭉크의 그림에는 대체로 두 스타일의 여자가 등장한다. 가르마를 단정하게 타고 말쑥하게 차려입은 여성이 있는가 하면, 풀어헤친 머리에 퀭한 눈동자를 지닌 나체의 여자가 나온다. 하담은 후자를 닮았다. 그렇다고 해서 죽음이나 성적인 이미지와 연결하려는 건 아니다. 뭉크는 한 편지에서 ‘가장 위대한 색은 검정이다. 검정은 가장 본질적인 색채다. 그것은 순수한 표현을 위한 백지다. 아무것도 그것을 더럽힐 수 없다’라고 쓴 적이 있다. <스틸 플라워>는 길고 검은 머리의 순수한 소녀 하담의 이야기다.

신이 세상을 창조하고 쉰 7일 동안, 하담은 묵을 곳을 정하고 일할 곳을 찾는다. 첫날 그녀는 빈대떡집, 탭댄스 교습소, 방앗간을 스쳐 지나가고 버려진 집들 사이에서 묵을 곳을 정한다. 거주지와 연락처가 딱히 없는 소녀에게 일거리는 호사다. 세탁소에서 힘을 증명해봤지만 관심을 끌지 못했고, 일본 음식점에서는 목소리를 내자마자 쫓겨났으며, 전단 돌리던 아줌마는 일만 시키고 돈을 주지 않았다. 최악은 횟집 사장이다. 그는 며칠 동안 부려먹다 노숙자라는 이유로 하담을 내친다. 이렇듯 닷새 동안 하담의 노동은 매번 배신을 당한다. 그들은 그녀를 믿지 않거나 이용하기만을 원한다. 일을 원했던 그녀에게 돌아오는 건 정신적 모욕과 신체적 상처뿐이다.

영화는 노동의 공간과 귀갓길 사이에 탭댄스 교습소를 배치했다. 첫날 무심코 지나쳤던 하담은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듣고 지하로 내려간다. 밝은 불빛 아래 발을 맞춰 탭댄스를 추는 사람들을 그녀는 물끄러미 바라본다. 길을 걸을 때도 집에 와서도 그녀의 발은 마법에 걸린 것마냥 발동작을 멈추지 않는다. 어느새 탭댄스는 고독한 영혼을 다독이는 춤으로 화한다. <스윙타임>(1936)과 <톱 햇>(1935)에서 연인과 쌍으로 춤추던 프레드 아스테어 대신 <악대차>(1953)에서 쓸쓸하게 탭댄스를 추던 그를 기억해보라. 하담의 삶과 동떨어져 보였던 비일상적 공간인 탭댄스 교습소는 어느새 그녀의 힘겨운 일상 속으로 들어온다. 빈대떡집에서 처음으로 임금을 받은 날 밤, 교습소를 다시 찾은 하담은 번 돈 전부를 놓고 허름한 탭슈즈 하나를 들고 나온다. 그리고 신어본다. 여섯쨋날 밤이었다.

그녀의 무대는 근래 깨끗하게 포장된 도로다. 깨끗한 아스팔트 도로 양쪽으로 보도블록을 예쁘게 깔아놓은 길. 노란 가로등이 빛을 비추면 그곳은 아스팔트 구름이 흐르고 보도블록 별이 반짝이는 천국이 된다. 하담은 춤을 춘다. 탭슈즈 신은 발을 쑥스러운 듯이 내려다보다 이리 뛰고 저리 뛰다 지치고 힘이 들 때까지, 남은 힘을 내 집에 다다를 때까지. 내내 침묵하던 영화도 무안한지 기타 연주로 답한다. 춤에만 4분10초, 이것저것 다 더하면 5분을 훌쩍 넘기는 아름다운 시퀀스의 구성은 그러하다. 난 뭉크의 <별이 빛나는 밤>을 생각했다. 청아한 별만이 검은 머리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하담이라는 소녀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영화 또한 그녀의 과거사에 무심하다. 중요한 건 그녀가 어떤 곳을 떠나 여기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속했던 곳에서 탈출하고 싶었거나 배척당했을 것이다. 그런 소녀는 보통 ‘미친 아이’라 불린다. 그 역사가 그녀의 광기 어린 눈에 새겨져 있다. 그것은 사회와 인간과 삶, 그리고 죽음이 그녀에게 남긴 공포의 결과다. 다행히 하담은 죽음의 천사가 아니다. 죽음에 매료되기는커녕 삶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여기의 온갖 부조리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맨다.

같은 처지의 노동자로부터 가장 험악한 꼴을 당한 마지막 밤이 지나고 새벽, 하담은 꼭 일주일 전에 섰던 그곳을 찾는다. 뭉크가 존재만큼이나 불가해하다고 불렀던 바다 앞에 하담은 선다. 징이 박힌 탭슈즈를 신은 하담은 구멍이 뚫린 철판 위에 서고, 철판과 부딪혀 표면장력이 파괴된 거친 바다는 허공 위로 치솟는다. 강렬한 힘의 조우, 그것으로부터 하담은 충분한 삶의 에너지를 얻는다. 소녀는 죽음의 음울함을 떨쳐내고 삶의 기운을 확신한다.

그녀가 탭댄스를 완성하는 곳은 단단한 땅이 아닌, 바다 위로 구멍이 숭숭 뚫린 곳이다. 그녀의 춤은 강할 수밖에 없다. 꽃은 물과 빛이 있으면 살 수 있기에 먹고살 일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소중한 것은 시간이다. 꽃은 짧은 시간에 찬란하게 피어야 한다. 군중 속에서 느꼈던 고독은, 그녀가 마침내 그들과 다른 찬란한 존재로 피어날 것임을 내내 지시하고 있었다. 고독이란 타인과 나눌 수 없는 것임을 알기에 소녀는 홀로 춤을 춘다. 춤을 추던 어느 순간, 소녀는 나를 향해 눈길을 힐끗 돌린다. 미친 사람은 다른 이의 눈길을 피하지만, 하담은 슬쩍 바라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내 먼 바다를 응시한다. 그제야 꽃은 바로 그녀의 눈이었음을 난 깨달았다.

씨앗 같은 존재가 피운 철꽃

영문학자이자 여성학자인 샌드라 길버트와 수전 구바는 명저 <다락방의 미친 여자>에서, 여성 문학에 종종 출현하는 ‘미친 여자’를 화두로 삼았다. 메리 셸리와 에밀리 브론테 등이 썼던 바 남성이 지배하고 억압하는 사회에서 불안과 분노와 상상의 현현이자 작가의 분신으로서 미친 여자와 <스틸 플라워>의 소녀 하담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그녀에게 문자로 된 언어는 없다. 그녀는 야수와 같은 존재다. 그렇다고 해서 우주에서 뚝 떨어진 미아 같지는 않다. 오히려 어딘가에서 이 땅으로 날아온 하나의 ‘씨앗’에 더 가까워 보인다. 온몸으로 저항하는 언어를 배운 씨앗이 피를 토하며 피운 것, 그것이 바로 ‘철꽃’이다. 거기에 도덕이니 윤리니 하는 것을 대입할 필요는 없다. 심지어 그녀는 죄의식으로부터도 자유로워 보인다. 나는 인간이 인간이기에 앞서 이기적이면서도 선한 동물이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그 동물이 꽃을 피웠는데 무엇을 더 바란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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