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등>은 의심할 여지없이 지금까지 정지우가 만든 장편영화 중 최고작이다. 이는 다소 기이하게 느껴지는데, 이 영화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인권영화 프로젝트의 일부로, 한마디로 공익영화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는 이 핸디캡을 극복한 것일까.
대부분 정상적인 교양인들은 국가 주도 공익영화에 의심을 갖는다. <배달의 기수>, 문화영화 등등의 시대를 거친 옛 세대는 더욱 그럴 것이다. 공익영화를 주도하는 관료들이 요구하는 것은 단순한 사고와 이미 그 프로세스를 거친 메시지의 강요이며 이는 대부분 올바른 예술로 이어지지 않는다. 당연히 이런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도 의심의 대상이 된다. 그들은 국가의지에 굴복했거나 정직하지 않거나 생각이 짧을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나온 국가인권위원회의 인권영화들은 이와는 조금 다른 카테고리에 속한다. 그건 여기서 나온 <시선> 시리즈나 <날아라 펭귄> 같은 영화들의 목표가 다른 공익영화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했듯, 공익영화들은 단순한 사고를 강요한다. ‘음주운전을 하지 말자’는 옳은 말이겠지만 이 죽은 메시지로 어떤 영화가 나올 수 있을까? 하지만 인권영화들의 목표는 영화를 보고 난 관객의 인권 감수성을 높이는 것으로, 이는 훨씬 복잡한 작업이다. 이 작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위에서 떨어지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대신 질문을 던지고 의문을 품게 해야 한다.
이 영화들이 모두 성공적인 것은 아니다. 대부분 단편 옴니버스 영화들이 그렇듯, <시선> 시리즈는 잡다하고 훌륭한 영화들과 평범한 영화, 시시한 영화들이 공존한다. 보면 대충 공식이 보인다. 메시지를 강요하는 계도영화들은 실패한다. 만드는 사람들과 보는 사람들 어느 쪽의 상상력도 자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계도영화를 만든다는 아이디어 자체에 혐오감을 느끼고 이를 아트하우스영화로 만들려는 시도도 실패하는 건 마찬가지다. 주제에 눈높이를 맞추고 정공법으로 접근하는 영화들은 대부분 본전치기에 성공하고 종종 이를 넘어선다. 하지만 진짜로 성공하는 영화들은 이 주제를 영화가 끝날 때까지 살아 숨쉬게 만드는 작품들이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오디션 프로그램의 패널들이나 할 헛소리처럼 들리는데, 앞으로 이를 좀 압축해 설명해보기로 하겠다.
선입견에 빠진 사람들에 대한 정면도전
우선 <4등>의 줄거리를 읊어보기로 하자. 이 영화의 주인공은 준호(유재상)라는 초등학생 소년이다. 억척 엄마(이항나)의 지원을 받아가며 수영을 하고 있는데 경기에서는 늘 4등이다. 수영 꿈나무 엄마에겐 아슬아슬하게 짜증나는 등수이다. 준호의 엄마는 교회 이웃에게서 왕년의 국가대표 선수였다는 코치를 소개받는다. 광수(박해준)라는 이 남자는 새 제자를 데리고 PC방을 돌아다니며 시간을 때우다가 제자의 항의를 받자 애를 본격적으로 굴리기 시작한다. 다음 대회에서 준호는 생애 처음으로 ‘거의 1등’인 은메달을 딴다. 그리고 여기서 그가 ‘애를 굴렸다’는 건 몸에 퍼렇게 멍이 들 정도로 체벌을 가했다는 뜻이다.
여기까지가 영화 중반까지의 요약이다. 이 정도면 한국 엘리트 체육의 폐해와 체벌을 비판하는 메시지영화의 정통을 걷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생각보다 훨씬 위험하다. 이는 메시지영화의 정통이기도 하지만 스포츠영화의 정통이기도 하다. 괴짜 코치 밑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은 선수가 드디어 역경을 극복하고 성공한다는. 이 평행선 속에서 관객은 자연스럽게 헛갈린다. 물론 그들은 이 영화가 체벌을 비판하는 영화라는 것을 알고 있다. 포스터에 나와 있고 예고편에도 나와 있으니 놓칠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첫 번째 체벌 장면 이후 첫 시합에서 준호가 4등 이상을 하길 기대한다. 영화가 비판하는 길이 스포츠영화 장르에서는 자연스러운 순서이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위험한 동조를 시작하고 이는 영화 관람에 긴장감을 준다. 관객 중 상당수는 “그래, 체벌을 비판하는 영화군. 하지만 다른 방법이 있어?”라고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그 결과 준호는 갈림길에 선다. 신문기자인 아버지가 생각하는 것처럼 수영 선수의 길을 포기하고 그냥 취미로 만족하거나, 폭력의 대물림을 받아들이며 선수가 되거나. 평범한 영화라면 전자로 갈 것이다. 하지만 <4등>은 다른 길을 찾는다. 그 길은 단순하지만 한국식 엘리트 체육 교육에 대한 선입견에 빠진 사람들에 대한 정면도전이다. 그리고 이는 영화가 택한 양 장르 모두를 어느 정도 파괴하면서도 동시에 받아들이는 작업이다.
죽은 공식을 피해가는 영화
영화는 광수라는 인물을 구축할 때 더욱 재미있어진다. 보통 이런 영화에서 광수는 둘 중 하나다. 생각 없고 평면적인 악당이거나, 그 또한 대물림된 폭력의 희생자거나. 광수는 둘 다 아니다. 다소 길게 묘사된 프롤로그에서 그는 타고난 수영 기대주로, 천재성과 어리석음이 한국적으로 뒤섞인 인물로 묘사된다. 그는 늘 다른 애들보다 잘하기 때문에 체벌의 대상이 아니다. 무리 없이 정도만 걸어도 별 장애 없이 금메달리스트가 될 팔자인데, 그는 아시안게임 때문에 선수촌에 들어가 훈련을 해야 할 시간에 무단이탈해서 ‘동네 형님들’과 도박을 하느라 며칠을 날려버린다. 결국 코치는 늦게 들어온 그에게 빗자루를 휘두르고 참다못한 그는 선수촌에서 나와버린다.
여기서 두 가지 일이 일어난다. 하나는 영화의 메시지에 관한 것이다. 영화는 체벌에 비판적이지만, 정작 첫 번째 체벌의 대상이 되는 인물은 일상적인 체벌과 거리가 먼 상황에서 첫 번째 체벌을 받고, 여기서 관객은 대부분 광수보다는 분노한 코치에 동조한다. 자기가 받는 체벌에 분노하는 광수는 어처구니없고 지질한 인물이다. 체벌 금지라는 원칙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가장 폭력성을 유발하는 인물을 고른 것이다. 이는 시작부터 영화에 엄청난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다른 하나는 그 과정이 성인 광수라는 입체적인 인물을 낳는다는 것이다. 그는 위에서 말한 두개의 카테고리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는 생각 없이 흐름에 휩쓸린 인물이 아니다. 그릇되고 어리석지만 주체적인 길을 걷는 인물이다. 그가 제자들에게 가하는 폭력은 한심했던 젊은 시절 자신에게 가하는 상징적인 처벌로, 이는 탐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복잡한 행동이다.
계도영화는 클리셰를 따른다. 훌륭한 메시지영화는 클리셰에 도전장을 내민다. <4등>이 훌륭한 영화인 것도, 이 작품이 죽은 공식을 끊임없이 피해가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수영장 레일을 거스르며 헤엄치는 준호처럼 자연스럽게 영화의 일부가 된다. 다른 길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영화가 이야기를 만들어가면서 스스로 다른 길을 탐구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이 있을까.
여기서 감독의 전작 <은교>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야겠다. 예술, 나이듦, 육체적 사랑에 대한 이 영화가 원작을 넘어서려는 감독의 시도와 타이틀롤을 맡은 김고은의 생생한 존재감에도 불구하고 깔끔한 평범함에 그칠 수밖에 없었던 건, 자신이 시스템의 꼭대기에 있는 강자라는 것을 끝까지 인식하지 못한 늙은 남자의 신세 한탄과 설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익숙한 사고방식에 안주하는 ‘예술’과 영화가 끝날 때까지 끊임없이 미지의 경로를 헤엄치는 ‘메시지’ 중 어느 쪽이 더 가치가 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