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터/액트리스]
[액터/액트리스] 샬롯 램플링 되기 - <45년 후> 샬롯 램플링
2016-05-03
글 : 이지현 (영화평론가)
<45년 후>

영화 2015 <45년 후> 2013 <영 앤 뷰티풀> 2011 <아이 오브 더 스톰> 2008 <공작부인: 세기의 스캔들> 2005 <레밍> 2004 <하우스 키> 1997 <도브> 1987 <엔젤 하트> 1986 <막스 내 사랑> 1984 < 인생만세> 1982 <심판> 1980 <스타더스트 메모리즈> 1974 <비엔나 호텔의 야간 배달부> 1969 <저주받은 자들>

TV 2015 <브로드처치> 시즌2 2015 <런던 스파이> 2013 <덱스터> 시즌8 1999 <위대한 유산> 1976 <셜록 홈스 인 뉴욕>

상상해보라. 거의 반세기에 이르는, 길고도 평온했던 결혼생활을 축하하는 기념일을 준비하는 여성의 캐릭터를, 그리고 그가 우리가 알고 있는 ‘샬롯 램플링’과 어울리는지를. 단언하기 어려운 질문이 될 것이다. 이제껏 샬롯 램플링이 맡았던 수많은 역할들 중 실망스런 연기를 본 적은 없지만, 그 대부분은 평온한 부르주아 노부인이 아니었다. 일찌감치 여배우로서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존 부어먼의 <자도즈>(1974)에서 그녀는 겁 없고 대담하고 강인한 여인을 보여주었고, 꽤 성공적으로 영화계에 안착하게 만든 릴리아나 카바니 감독의 <비엔나 호텔의 야간 배달부>에서는 나치 고문관과 애정 관계에 빠지는 나치수용소의 생존자 역할을 맡기도 했다. 한마디로 그녀는 강하고, 아이러니했다. 그런 맥락에서 차라리 고다르의 <경멸>(1963)에서 브리지트 바르도처럼, 남편을 향한 의심을 발전시켜 마침내 ‘증오’하게 되었더라면 <45년 후>에서 그녀가 맡은 ‘케이트’ 캐릭터는 좀더 이해하기 쉬운 역이 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샬롯 랭플링은 시작부터 끝까지 흡사 <아무르>(2012)의 에마뉘엘 리바처럼 담담하고 평온하게 버티고 서 있다.

물론 여배우가 묵묵한 담대함을 보인다고 해서 <45년 후>를 평온한 드라마로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이다. 앤드루 하이 감독은 노인 세대를 마냥 조용하고 부드러운 세대로 인식하고 있지 않으며, 그런 면에서 샬롯 램플링과 그녀의 내면적 소용돌이는 공통적으로 이 영화의 동력으로 작용한다. 결혼 45주년을 기념하는 축하파티가 벌어지기 일주일 전, 케이트의 남편 제프에게 편지 한통이 도착한다. 그 편지에는 1960년 스위스를 여행하던 당시 목숨을 잃었던 전 여자친구 카티야의 시체가 이제야 발견되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평온한 일상은 편지 한통으로 파괴된다. 지독한 감기 바이러스처럼 작은 종이 한장이 생활 전체에 균열을 일으킨다. 보이지 않는 흔적, 그 작은 틈이 오랜 세월 쌓았던 견고한 벽을 뚫고 차오른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대단히 신중하지만 또한 끔찍하기도 하다. 가끔 케이트가 보이는 현명한 움직임들은 이내 미끼가 되어 다시 그녀를 위험으로 내몬다. “만일 그녀가 죽지 않았다면, 당신은 그녀와 결혼했을까?”란 질문에 제프는 거침없이 그렇다고 수긍하고, 바로 그 순간, 그녀는 어떻게 반응할지 망설인다. 관객은 케이트에게 눈길을 돌린다. 샬롯이 연기하는 케이트 캐릭터는 이 단호하고 불쾌한 상황에서 대사를 내뱉지 않기로 정한다. 대신, 그녀는 침묵의 시간까지 시시각각 긴장감을 쌓아가는 데 치중한다. 단언컨대 이 작품에서 샬롯 램플링이 맡은 역할은 단순한 연기자 이상의 ‘무언가’를 지녔다. 어쩌면 그녀가 아니었다면 이 심리적 드라마의 굴곡은 훨씬 평이해졌을지도 모른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 참가해 금메달을 수상했던, 영국 육군 대령 출신의 고드프리 램플링은 샬롯이 9살이던 무렵 가족들을 데리고 파리 근교 퐁텐블로로 이사했다. 지방 학교에서 그녀는 자연스럽게 프랑스어를 배웠는데, 그 덕분에 오늘날 프랑스어와 영어 모두를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배우로 성장할 수 있었다. 실상 90년대 이후 필모그래피의 절반 이상은 프랑스인 감독들에 의해 채워지는데, 이는 그 시절 덕분이라 봐야 할 것이다. 한편, 어머니 앤 이자벨은 화가로 활동하였는데, 당시 샬롯과 언니인 사라는 어머니의 예술성을 물려받은 듯 어린 나이부터 예술에 두각을 드러냈다. 10대 시절 가족들은 다시 영국으로 돌아갔고, 자매는 이 시기에 함께 뮤직홀 공연 아르바이트에 참여했다. 샬롯이 본격적으로 연기 수업을 받은 것은 이후 로열 코드 스쿨에서였다. 연기학교를 졸업한 다음엔 리처드 레스터의 <낵 앤 하우 투 겟 잇>(1965)에 조연으로 등장한 적이 있는데, 19살에 투입된 이 첫 영화에서 그녀는 주어진 역할을 부담 없이 소화하는 능력을 보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당시 이 작품에 출연했던 배우가 샬롯 램플링 외에도 제인 버킨과 재클린 비셋 등 소위 ‘스윙잉 런던 걸’이라 불리던 당대의 패션 아이콘들이었다는 점이다. 비록 작은 역할이었더라도 흑백의 프레임 너머로, 젊은 시절 그녀들이 보여준 깊은 눈매와 웃음기 머금은 입술, 아름다운 선의 실루엣이 훗날 그녀들의 전성기를 가늠하게 해준다.

아마 그무렵 샬롯의 언니가 사망하지 않았더라면 런던에서의 활동은 좀더 길어졌을 것이다. 그렇지만 20살이 되던 해, 언니를 잃고 샬롯은 영국을 떠나 이탈리아로 향했다. 이탈리아에서의 활동은 짧았지만, 나름 과도기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루키노 비스콘티의 <저주받은 자들>을 촬영한 것이 그 시기다. 이른바 본격적 세계 무대로 첫발을 내딛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현재 샬롯 램플링의 필모그래피는 ‘전세계적’ 면모를 갖추고 있다. 프랑스뿐 아니라 훌리오 메뎀 같은 스페인 감독, 라스 폰 트리에 같은 덴마크 출신 연출자, 우디 앨런 같은 미국 감독까지 그야말로 다양한 작가들과 지속적으로 작업하였다. 그중 프랑스에서의 활동은 돋보인다. 샬롯은 총 3번의 결혼생활 중 2번을 프랑스에서 보냈는데, 90년대 스크린에서 거의 활동하지 않았던 그녀가 2000년대 프랑스영화계에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은 것은 그 연장선상에서 얻은 수확이었다. 프랑수아 오종과의 작업들, <사랑의 추억>(2000), <스위밍풀>(2003), <엔젤>(2007)에서의 대체 불가한 존재감은 시네필들에게 ‘2000년대 작가영화의 어떤 분위기’로 그녀를 기억되게 했다. 세자르영화제는 그 소중한 귀환에 화답했고, 두 작품은 차례로 2002년과 2004년에 세자르 여우주연상으로 노미네이트됐다. 그리고 장르에 있어 샬롯 램플링은 미셀 블랑의 <썸머 씽스>(2002)와 같은 코미디영화, <레밍>과 같은 스릴러영화, <남쪽을 향하여>(2005)와 같은 작가영화 취향의 작품들, 혹은 <원초적 유혹2>와 같은 할리우드영화에도 모습을 드러내면서 자신을 다각화한다. 한마디로 국경과 장르의 초월이 이 시기 그녀의 최대 장점이 된다. 그런 면에서 <덱스터> 시즌8나 <런던 스파이> 같은 드라마에서 그녀를 발견하는 건 반갑다. 충분히 가늠할 수 있는, 기쁜 일탈이다.

어떤 면에서 샬롯 램플링은 무언가를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영화에 드러내고 있는 배우처럼 보인다. 2015년 <45년 후>로 얻게 된 ‘베를린국제영화제 최우수 여우주연상’ 타이틀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냉랭한 눈빛을 지닌 존재감 있는 여배우가, 이제 기존의 타입화된 옷을 벗고 따스함에 대한 내면적 스펙트럼을 차분히 드러낸다. 영국의 시골에 사는 세련되고 성숙한 늙은이의 캐릭터가 단번에 샬롯 램플링과 연결되는 코드는 아닐지라도, 보란 듯 그녀는 그 거리감을 뛰어넘는다. 어쩔 수 없이 이 배우의 100%에 관해 생각하게 된다. 샬롯 램플링은 분명히 또다시 새로운 탈출을 시도할 것이다. 50년이란 긴 세월은 이제 그녀에게 또 다른 출발점을 만들어줬다. 할리우드가 되었든 유럽풍의 예술영화가 되었든 우리는 기존의 틀을 벗고 그녀를 바라봐야 한다. 관조적 묵상의 끝에서, 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꿈꾸는 아우라를 발견한다. <45년 후>가 바로 그 지표를 제시해준다.

<스위밍풀>

거리를 두는 방법

샬롯 램플링이 90년대의 휴식기를 지나 2000년대 전성기를 맞는 데 있어, 프랑수아 오종의 2003년작 <스위밍풀>이 지닌 영향은 크다. 2000년 이미 <사랑의 추억>을 통해 작업했던 두 사람은 서로에게 확신을 가졌고, 새 작품의 주인공으로 ‘영국인 작가’를 떠올리자마자 오종은 일찌감치 작가 ‘사라 모튼’ 역으로 샬롯 램플링을 내정했다. 처음 대본을 쓰던 당시의 프랑스어 시나리오는 오종이 직접 영어로 번역했다. 하지만 묘한 뉘앙스 차이는 전달되지 않았고, 그 공백을 그녀가 메웠다. 샬롯 램플링과 루디빈 사니에르, 두 여배우의 결합이 가져온 아이러니한 공기의 흐름을 주도하는 자 또한 램플링이다. 사니에르는 촬영 당시 파트너를 일컬어 “아주 가볍게 자신의 캐릭터가 지닌 감정을 해결할 줄 아는 아티스트”라고 소개했다. 그렇듯 영화 내내 사라 모튼은 주도적 시선을 차지했다. 아마도 “흥미를 잃지 않고 거리를 두는 방법”을 그녀는 선천적으로 아는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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