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기적인 그녀>의 촬영을 끝낸 차태현과의 인터뷰중이었다. 시종일관 명랑활달하게 모든 대답을 이어가던 그의 얼굴에서 잠시 낯선 긴장의 표정이 스쳤다. “사실 다른 배우를 보면서 긴장하는 법이 별로 없거든요. 그런데 <공동경비구역 JSA>의 하균이 형(신하균)을 보는데, 순간 떨리는 거예요. 아, 큰일났구나. 저렇게 돼야 되는데, 갑자기 걱정이 밀려오더라고요.” 신하균은 그랬다. 한국영화의 허리를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는 최민식, 설경구, 송강호, 유오성의 바통을 이어받을 다음주자들 사이에서 그의 존재는 위협적일 만큼 강렬한 어떤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신하균에 대한 무형의 기대는 <…JSA> 이후 1년 반 만에 확실한 증거를 탄생시켰다.
신이 쥐어준 송곳을 원수의 목에 내리꽂고, 복수의 칼날로 도려낸 신장을 소금에 찍어 어그적어그적 씹어삼키는 이 남자의 건조한 표정 속엔 해맑게 미소짓던 우리의 미소년은 이미 증발해버렸다. 병으로 죽어가는 누나를 살리기 위해 해서는 아니 될 유괴를 하고, 지지리 운도 없이 아이의 죽음마저 맞게 되는 <복수는 나의 것>의 류는 태초부터 악마성을 지닌 것이 아니라 상황 속에 서서히 그리고 조금씩 파괴되어가는 인간. “제가 표현은 잘 못해도 이해는 잘하는 편이거든요. 감독님과의 대화 속에 충분히 이 영화를 받아들였고 결국 류가 변화하는 부분, 그 어디에도 방점을 찍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언제 어디서부터 변화되었는지, 나도 관객도 모르게…. 사실 굳이 알려하지도, 굳이 계산하려고 하지도 않았어요. 이 영화는 그런 영화가 아니거든요.”
대사도 없는 빈 여백을 어떻게 채워나갈까, 혼자 짊어진 많은 신들은 어떻게 만들어낼까. 외로움도 절반, 즐거움도 절반이었던 촬영장이었다. “대사가 없으니 오히려 기가 많이 뺏겨요. 한순간도 뱉어내지 못하고 머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어휴, 진이 빠지는 연기였죠. 살도 쭉쭉 내렸고… .” 쾌감이 거세된 복수는 처연하다. 자살한 누나를 안고 “어어억… 꺼어억” 울부짖던 류가 장기밀매업자를 찾아내 살해하는 대목에서, 옆구리가 열리고 창자가 쏟아지는 잔혹함에 눈살이 찌푸려지기보다 그 모든 행위들이 왠지 서글퍼지는 것도 그런 이유다.
사랑은 모방이라 홍상수 감독이 말했던가. <복수는 나의 것>에 출연하기까지를 묻는 질문에 신하균은 신년호 배두나와의 인터뷰에서 들었던 똑같은 대답을 날린다. “이런 시나리오가 다른 데 안 가고 저한테 처음 와서 참 다행이에요.” 촬영이 끝난 뒤 사랑을 꽃피운 이들이라지만, 이미 캐스팅 단계부터 무언가 강한 운명의 끈이 서로를 이끌었던 것일까. “여배우들은 아무래도 어렵잖아요. 말 한마디 건네기도 조심스럽고…. 게다가 형들하고만 작업해오다가 나보다 어린 여배우와의 작업이라니 왜 걱정이 없었겠어요. 하지만 그런 우려는 첫촬영부터 깨졌어요. 사람들이 편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배려하는 모습이랄까, 똘똘하게 자기 역할 잘해내는 모습이 기특해보이기도 했어요. 그리고 시나리오에서 잘 보여지지 않았던 영미라는 캐릭터가 영화에서 그만큼 드러난 것도 배두나였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경찰로 가득 찬 엘리베이터 안, 이미 시체가 된 영미는 들것에 누워 세워져 있고, 도피중인 류는 흘러내린 시트 사이로 드러난 죽은 영미의 얼굴을 본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옆구리를 누른 채 시트사이로 몰래 영미의 손을 움켜쥐는 류. ‘비정하기 짝이 없는’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감상적인 이 엘리베이터 신은(어린 연인들을 향한 박찬욱 감독의 배려라고까지 느껴지는) 그 어떤 멜로영화 이상으로 짠한 아픔을 전달한다. “홍콩영화라면 바로 시체 들쳐업고 오토바이 태우고 달려가야 되는데…. 그래, 영미야! 이제 니 복수는 내가 해주마! 하고….” (웃음)
“이제 신하균을 다른 사무실에 고가에 파는 일만 남았다.” 그의 오랜 벗인 장진 감독의 짓궂은 농담은 그의 가치가 어느 정도 고속성장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충무로 제작자들 사이에서 “캐스팅하고 싶은 배우” 1순위에 올라 있는 신하균에겐 <복수는 나의 것> 개봉 즈음에 이미 대부분의 촬영을 마친 차기작 <서프라이즈>를 포함해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가 촬영을 기다리고 있고 광고, 뮤직비디오 등의 제안 또한 끊이질 않는다. “이제 새로운 부담감이 생겨요. 그 전에는 별로 설명하고 말하지 않아도 나를 잘 알고 통하는 사람들과 작업해왔다면, 갈수록 그런 건 기대하기 힘들겠죠? 하지만 추구하는 바가 통하는 상대를 만날 수 있는 상태를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제 몫인 것 같아요.”
물론 5월에 개봉하는 ‘필름있수다’의 상업단편프로젝트 <사방의적>(가제)에선 노개런티로 출연했고, 11월이면 장진을 비롯한 수다의 형들과 함께 연극을 올릴 테지만, 그를 키웠던 항구는 어서 빨리 새로운 항해를 떠나라고 등을 떠밀 것이다. “쭉 이렇게 연기하고 밥벌어먹고 살고 싶어요. 나중에 아기분유도 연기해서 번 돈으로 사고… 하하하.” 그의 소박한듯 의미심장한 바람은 성사될 가능성이 충분해 보인다. 극중 영미의 말을 빌리자면 “백푸로… 확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