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나의 브루클린
2016-05-05
글 : 김혜리
<45년 후>

결혼 45주년 파티를 앞둔 부부에게 스위스에서 편지가 날아온다. 남편 제프(톰 코트니)의 옛 애인 시신이 얼음 속에서 발견됐다는 통보다. “우리 이 일로 (같이) 끊었던 담배 다시 피우는 일은 없도록 합시다.” 아내 케이트(샬롯 램플링)는 성숙하게 대응하지만, 죽은 라이벌은 이기기 어려운 법이다. 우리는 케이트가 이 결혼에서 어머니/보호자 역을 맡고 있음을 서서히 깨닫게 된다. 은퇴한 교사인 그녀는 늘 고쳐주고 타이르는 쪽이다. 한편 제프는 반항하는 10대처럼 보란 듯 담배에 다시 손을 대고 다락방에 틀어박혀 추억을 뒤적인다. 한밤중 다락에 있는 남편을 발견한 케이트는 화가 나 옛 여자의 사진을 내놓으라고 재촉하지만 몸에 밴 ‘계도자’의 품위를 버리진 못한다. 그녀는 사진을 찢지도 남자의 손에 돌려주지도 못한 채 사다리 위에 애매하게 얹어두고 돌아선다. <45년 후>는 이렇게, 뉘앙스의 축적으로 나아가는 드라마다.

04/08

오늘 일기는 어느 때보다 영화로부터 멀리 흘러갈지도 모르겠다. <브루클린>은 유학이든 이주든 삶의 근거지를 한번쯤 옮겨본 사람이라면 감응할 수밖에 없는 영화다. 나도 석사 공부를 위해 영국의 대학 기숙사에서 13개월을 산 적이 있다. 타향에서 평생의 기반을 닦아야 하는 취업 이민자의 입장과, 돌아갈 날이 정해져 있는 유학생의 처지를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브루클린>은 나의 바닥을 휘저어 오랫동안 침전해 있던 기억들을 수면 위로 떠올렸다. 주인공 에일리스(시얼샤 로넌)가 아일랜드를 떠나기도 전에 영화는 추억을 건드렸다. 에일리스는 미국행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절친한 친구 낸시와 댄스파티에 간다. 낸시는 신랑감으로 점찍은 마을 청년에게 춤 신청을 받는 데 성공해 팔짝팔짝 멀어져간다. 여기서 카메라는 홀로 남겨진 에일리스의 말없는 얼굴 위에 10초쯤 머물길 택한다. 멀어져가는 친구를 쳐다보는 에일리스의 눈에는, 상냥한 축복에 이어 자신과는 이미 무관해진 세계 안에 서 있는 자가 느끼는 이질감, 짐작도 안 되는 미래를 향한 두려움이 순서대로 지나간다. (이 영화에서 시얼샤 로넌은 종종 대사가 전혀 필요 없어 보인다.) 나는 생각했다. 출국 전 부러움을 표하고 계획을 묻는 사람들과 함께한 자리를 마치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매번 얼마나 무거웠는지. 지나치게 불안하거나 자신만만해 보이지 않으려고 신경 썼고, 매일 밤 치미는 후회를 억누르기 위해 가지 않으면 안 될 실질적 이유를 속으로 꼽아보아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도착한 첫날은 나쁜 예감이 한꺼번에 실현됐다. 슈트케이스 손잡이가 도중에 부러졌고 장거리 비행 끝에 당도한 소도시 공항은 을씨년스러웠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방금 여권에 도장을 찍어준 직원이 공항 문을 닫더니 나를 앞질러 퇴근했다. 때맞춰 비까지 추적추적 내렸다. 불운의 절정은 기숙사 열쇠를 잘못 받는 바람에 짐도 풀지 못한 채 이불 없이 보낸 첫 밤이었다. 하루 늦게 간신히 숙소를 찾아간 내게, 같은 층 영국 학생은 “아직 없지? 일단 이걸로 써”라며 머그컵을 건넸다. 하늘이 무너져도 차만 마실 수 있다면 어떻게든 살아남을 거라는 투였다. 얼떨결에 끄덕이며 구명대인 양 머그컵을 꼭 받아 쥐었다.

나는 다행히 향수병은 앓지 않았다. 그러나 에일리스가 직장 동료의 잡담을 유연하게 받아치지 못할 때, 아일랜드 억양을 두고 카페 점원이 던진 호의적 농담에 굳어버릴 때, 그녀의 마음속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나처럼 아예 비영어권에서 온 이방인에게 현지인들은 훨씬 큰 참을성을 갖고 대했지만 그건 얼마간 ‘열외’로 간주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루가 저물 즈음이면 진지한 연애 초기와 유사한 피로가 밀려왔다. 온종일 매사에 무리해서 노력한 탓이었다. 의사소통에 단번에 성공하지 못하면 부쩍 위축됐고, 미미한 실수에도 스스로 큰 타격을 받았다. 쪼들리기도 했지만 어색한 상황에 처하게 될까봐 외식도 거의 하지 않았다. 과 친구들로부터 방과 후 계획을 제안받아도, 혹시 내가 짐이 되는 건 아닐까 주저하는 맘이 앞섰다. 결국 외지 생활 초기의 나는 <브루클린>의 에일리스와 똑같이, 옆에 있는 사람들과 말하는 대신 매 순간 속으로 편지를 썼다. 새로운 풍경과 그들이 전혀 모르는 인물들을, 부모님과 친구에게 묘사할 문장을 쉴 새 없이 지었고, 그것들을 모아 일주일에 한번씩 종이에 옮겼다. 표면적으로는 가까운 이들에게 안부를 전한다는 목적이었지만, 내가 그토록 성실히 편지를 쓴 진짜 이유는, 현실에선 미력할지언정 내가 그 모든 혼란스러운 경험의 주인이라고 고집하는 안간힘이었던 것 같다. 여기서 ‘편지’란 단어 그대로 편지다. 당시 이메일에 익숙지 않았던 부모님께 안부를 전하기 위해 일주일마다 생활을 적은 한두 장의 종이를 팩스로 전송했다. 어머니는 그것들을 소중히 간직했지만, 몇년 후 열어본 상자 속 감열지 뭉치는 글씨가 날아간 백지로 변해 있었다. 어쩌면 나는 한 시절을 마음껏 미화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그렇지 않아도 기억이란 불러낼 때마다 원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으로 회상한 버전을 재구성한 결과라고 한다. <브루클린>이 남긴 심상은 분명 나의 외지생활에 대한 추억을 물들일 것이다. 그래서 몇년 후에는 실제로 나의 감상인지 에일리스를 통한 간접경험인지 가리기 힘든 기억의 구역이 생길 것이다. 내가 영화를 훔친 건지 영화가 내 삶을 훔친 건지 모르지만 어느 쪽이든 개의치 않는다. “아일랜드에서 미국으로 편지가 오는 데에 오래 걸리나요?” 에일리스는 대서양을 건너는 배에서 만난 이민 선배 조지나에게 걱정스레 묻는다. “처음엔 오래 걸리다가 나중엔 금방 받게 돼.” 조지나의 대답은 우편 시스템의 효율성보다 체감 시간에 대한 언급처럼 느껴진다. 처음에는 고향에서 오는 서신만이 유일한 낙이겠지만 서서히 달라질 것이라는 예언인 셈이다. 에일리스는 힘든 겨울을 나지만, 공부와 사랑을 통해 자신이 주인공인 세계를 브루클린 사회 안에 한뼘씩 확보해간다. 그것은 고향인 애니스코시도 그녀에게 주지 못한 공간이다. 내 유학생활도 예상보다 긍정적으로 흘러갔다. 기숙사 창으로 보이는 키 작은 나무에 나만의 이름을 붙여주게 됐고, 쌀쌀맞아 보였던 사람들에게서 호의를 발견하면서 내가 도울 일도 찾게 됐다. 도서관에 단골 좌석이 생겼고, 아시아 유학생들을 통해 아시아에서 살아온 스물 몇해보다 다른 아시아 국가의 문화에 대해 더 많은 사실을 배웠다. 과정 막바지, 논문을 위해 런던 도서관으로 짧은 여행을 갔다가 기숙사로 돌아오는 밤기차 안에서, 나는 동행한 일본 친구 S와 문득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집에 다 왔어!” “정말이네? 이제, 진짜 집 같아.” 그리고 우리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내 생각에 13개월의 유학이 준 가장 큰 성취는 학위가 아니라 그 순간이었다. 나는 조금 더 강한 사람이 됐다고, 진심으로 ‘교육’받았다고 느꼈다. 나는 에일리스처럼 더 멀리 모험하지 않고, 예정대로 공부를 마치고 부모님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1년 후 다시 직장이 생기자 곧장 작은 방을 얻어 독립했다.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그저 나는 예전의 ‘집’에 맞지 않는 형상으로 변하고 자라서 돌아왔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나의 집’ (home)을 새로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04/09

<브루클린>은 “엄마, 아빠는 어떻게 만났어요?”라는 자식의 물음에 들려줄 수 있는 아름다운 대답의 한 예다. 원작에도 닉 혼비가 각색한 시나리오에도 후손을 의식한 공치사나 자수성가의 신화화는 없다. 에일리스는 이탈리아계 배관공 청년 토니(에머리 코언)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가까스로 생활이 안정될 무렵 가족에게 닥친 사건으로- <대부>의 마이클 콜레오네가 그랬듯- 고향을 방문하게 되고 거기서 제2의 구애자 짐(돔놀 글리슨)을 만난다. 동향 청년 짐은 흠잡을 데 없지만, 토니는 특별하다. 이탈리아 남자에 대한 선입견을 핸디캡으로 짊어진 이 남성은 에일리스에게 다가가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매너로 점점 나를 안심시켰고, 안도는 감동으로 비약했다. 급기야 에일리스가 짐과 토니 사이에서 흔들리는 대목에 이르자 나는, 실로 오랜만에 한쪽을 편들며 영화 속 삼각관계를 주시했다. 외양부터 환경까지 에일리스와 소위 ‘그림’이 되는 쪽은 짐이다. 토니는 라틴계의 판이한 외모에, 에일리스보다 키가 작으며, 현재 가진 것도 많지 않다. 그러나 토니에겐 연인으로서 반려자로서 황금 같은 미덕이 있다. 이 남자는 결코 사랑을 빙자해 에일리스를 밀어붙이지 않는다. 야간대학이 끝나길 기다려 에일리스를 만난 토니가 “집에 가서 공부하고 자야 하는 거 잘 알아요. 그냥 집까지 같이 가기만 해요”라고 청하는 장면에서 많은 여성 관객이 감격했으리라. 토니는 에일리스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려고 노력하고 그녀의 공부와 일에 관한 수다를 진심으로 재미있게 듣는다. 토니는 에일리스한테 뭐가 유익한지 더 잘 안다는 오만을 부리지 않는다. 또한 한점의 열등감도 없이 육체노동의 보람을 즐기고 인생을 배우자와 공조해 완성하려고 한다. 원작 소설은 이 남자에게 거슬리는 점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에일리스가 느끼는 두려움(‘사실일 리가 없어!’)을 묘사하는데 나도 백배 공감하고 말았다. 토니는 에일리스를 변화시켰고 짐은 토니가 변화시킨 에일리스에게 반한 셈이다. 짐에게 잠시 흔들린 에일리스에게 나는 거의 화가 났으나 오래가진 않았다. 시얼샤 로넌의 연기 덕이다. 악의적인 고발로 말미암아, 마침내 가야할 곳을 깨달은 에일리스의 눈은 분노로 파랗게 빛난다. 그리고 그 분노는 무엇보다 본인의 오판을 향한다.

<브루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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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찬

<브루클린>의 에일리스는 미국에서 맞는 첫 크리스마스를 연고 없는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을 위한 만찬에 일손을 보태며 성당에서 보낸다. 고향을 떠나 온 지 수십년이라 돌아갈 집도 일자리도 없는 노년의 남자들이 모여들어 요리를 먹고 흑맥주를 마신다. 가수였다는 한 노인이 부르는 민요는 장내를 숙연케 한다(무슨 이유에서인지 아일랜드인 중엔 엘프의 목소리를 타고난 사람이 많다). 극히 감상적인 장면이지만 존 크롤리 감독의 연출에 실린 감정은 진부함을 이긴다. 파티가 끝났는데도 지치고 취해 테이블에서 잠들어버린 늙은 남자들을 찍은 숏이 그런 예다. 향수병에 시달리던 에일리스는 이 자리에서 훨씬 해묵고 거대한 피로를 목도한다. 혼자가 아니었고 최악도 아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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