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커버스타] 끝없는 도전 - <특별수사: 사형수의 편지> 김명민
2016-05-31
글 : 정지혜 (객원기자)
사진 : 최성열

약속 시간 20분 전, 김명민이 나타났다. 왁싱된 청바지에 저지 소재의 티셔츠를 입은 차림이 경쾌하다. 바리톤에 또랑또랑한 목소리, 제법 속도감 있는 걸음까지. 어느새 스튜디오에는 김명민이 만든 공명이 인다. 역사의 무게를 고스란히 짊어진 <불멸의 이순신>(2004)의 이순신 장군, <하얀 거탑>(2007)의 천재 외과의사 장준혁, 외골수인 <베토벤 바이러스>(2008)의 마에스트로 강마에, 허당기가 몸에 밴 <조선명탐정: 사라진 놉의 딸>(2014)의 명탐정, 최근 <육룡이 나르샤>(2015)의 정도전까지. 김명민을 대표하는 확실한 윤곽의 캐릭터들을 순차대로 끄집어내보는 일은 어렵지 않다. 자연스럽게 <특별수사: 사형수의 편지>(2016, 개봉 6월16일)에서 그는 또 얼마나 치열하게 인물을 파고들어 자기식의 캐릭터를 만들어냈을까 궁금해진다. 돌아온 김명민의 대답은 이러했다. “이번 작품은 내가 연기하는 최필재라는 인물이 돋보이기보다는 필재와 주변 사람들간의 합이 살아야 했다.” 본인이 힘을 빼야만 되레 극이 살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영화의 중심에서 이 여러 인물들을 하나의 지점으로 끌어모으는 건 역시나 김명민의 몫이었다. 그가 연기한 전직 형사 필재는 ‘하늘이 내려준 최고의 브로커’라는 평을 듣는다. 변호사 사무실 사무장으로 끗발 날리는 중이다. 형사였을 때나 브로커인 지금이나 안하무인, 뻔뻔하고 능글맞기는 변함이 없다.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게 없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런 필재 앞으로 사형수 권순태(김상호)가 억울함을 호소하며 쓴 눈물의 편지가 도착한다. 생판 모르는 남의 일에 마음이 흔들릴 필재가 아닌데, 이상하다. 권순태의 딸 동현(김향기)을 본 순간 필재는 이들 부녀의 사연에 자꾸만 마음이 동한다. 김명민을 만나 필재의 사연, 그의 심경의 변화에 대해 들어봤다.

-그간 캐릭터에 한껏 몰입해 대표작들을 만들어왔다. 김명민이 선택하는 작품이라면 배우의 역량이 발휘될 여지가 많은 캐릭터일 거라고 짐작된다.

=무엇보다 영화 자체가 재밌어야겠지만 내가 극 안에서 감독님과 함께 만들어갈 여지가 있는 인물이어야 선택하게 된다. 나는 성취감을 얻어가는 것에 의미를 많이 두는 사람이다. 그러다보니 해볼 게 별로 없는 영화는 안 하게 되더라. 아무리 대형 투자, 배급사가 만들고 좋은 감독님이 하신다고 해도 말이다. 굳이 내가 합류하지 않아도 될 영화보다는 내가 만들어갈 재미가 있는 작품이어야 매력이 있다.

-그렇다면 <특별수사: 사형수의 편지>의 최필재 역으로는 무엇을 시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필재의 아버지는 전과자다. 그것이 형사일 때부터 필재에게는 오명이자 불명예였을 거다. 어쩌면 형사일 때 그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사건 해결에 뛰어든 건 그런 불명예를 씻고 싶어서일 테고. 그렇게 혼신을 다해 일했는데 믿었던 동료 형사 양용수(박혁권)의 배신으로 옷을 벗게 됐으니. 필재는 복수심, 적개심 같은 게 엄청나게 쌓여 있는 인물이다. 또 능글능글하고 속물근성도 강하다. 법조계 브로커가 되고 돈의 맛도 알아가면서 더 능구렁이가 됐겠지. 그런 필재가 사형수 권순태의 편지를 받은 이후 조금씩 마음이 움직인다. 그의 딸 동현에게 동병상련을 느낀 거다. 전과자인 아버지를 둔 자식의 입장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는 필재니까. 필재는 이 사회의 어떤 부조리함에 대항해보고 싶었던 것 같다. 이 부조리의 뒤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거대 재벌 대해제철도 있고. 속물 필재가 변해가는 과정에서 뭔가를 해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내 사랑 내 곁에>(2009) 때 루게릭을 앓는 백종우 역을 맡아 실제로 20kg 가까이 감량했듯, 캐릭터의 직업적, 성격적, 행동적인 디테일을 치밀히 분석해 완벽하게 몸에 익히며 연기에 임해왔다. 필재 캐릭터를 위해서는 어떤 준비를 했나.

=사무장이다 보니 직접 그 세계에서 일하는 분들을 만나볼까, 현장 학습을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권종관 감독님이 그럴 필요 없다고 하시더라. ‘필재는 명목상 사무장이지 필재라는 사람을 드러낼 그의 성격은 따로 있다. 오직 우리가 집중해야 할 건 현재 필재를 있게 한 그의 과거와 사연일 뿐이다’라고 하셨다. 그래서 내가 알고 있던 사무장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 선에서 직업적 특성은 파악 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그보다는 필재의 드러나지 않은 과거의 이야기를 나 나름대로 직접 써내려가봤다. 시나리오에도 필재의 과거 장면은 플래시백으로 등장했지만 연기를 해야 하는 나로선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필재에 대한 소설을 쓰는 거다. 그가 태어났을 때 어땠고 살아온 배경은 뭐고 아버지가 전과자가 됐을 때 필재 주변의 반응은 어땠을까 등등. 그래서 지금의 필재가 있겠구나 이해해보는 거다. 이 작업은 내가 배역을 맡게 되면 늘 하는 가장 기본적인 작업이다. 이 과정을 거치느냐 그렇지 않으냐는 연기에 있어 하늘과 땅 차이다.

-무심한 듯 툭툭 내뱉는 말투, 일관된 목소리 톤, 말의 빠른 속도 등이 필재의 무심하고 뻔뻔한 성격을 드러내는 것 같다.

=인물의 성향, 현재 심리 상태 등을 파악해 그것에 맞는 톤을 잡아가려 했다. 필재는 고민하는 타입이 전혀 아니다. 생각이 많은 사람은 어미와 어미 사이에 마가 뜨지만 필재는 생각하기보다는 행동이 먼저다. 자기 식으로 일방통행하기 일쑤고. 시니컬하게 툭툭 내뱉는 듯한 말투도 그렇게 완성됐다. 필재의 심경에 변화가 생겨갈 때 그의 말투에도 변화가 있을 거다.

-사형수 권순태 역의 김상호, 필재가 모시는 변호사 역의 성동일, 필재와 앙숙인 형사로 나오는 박혁권 등 상대 배우들과 호흡을 주고받는 게 꽤 즐거웠다고.

=(성)동일이 형과는 SBS 공채 선후배 사이다보니 알고 지낸 지 벌써 20년이 넘었다. 서로가 바닥을 헤매며 고생하던 시절부터 다 안다. 가식, 겉치레, 허세, 척 같은 걸 할 필요가 전혀 없는 아주 편한 사이다. (성동일이 ‘김명민이 잘해서 이번에 나는 편하게 연기했다’고 하자) 형은 말만 그렇다. ‘임마, 형이 있어서 네가 잘한 거야’라고 했을걸. 하하. (박)혁권씨는 나이는 나보다 한살 많지만 학교 후배다. <하얀 거탑> 때 처음 같이 작업했는데 그땐 장준혁에게 만날 ‘쿠사리’만 먹던 외과 의사였다. 이번에는 아주 제대로 앙앙대며 만났다. 근데도 좋더라. 혁권씨야 워낙 눈 녹듯 자연스럽게 연기하는 스타일인 데다 상대를 받아주는 능력이 뛰어나니. 상호 형은 사실 붙는 신이 별로 없어서 영화 홍보하면서 더 친해졌다. (웃음)

-1995년에 연극 무대에 올랐고 1996년 SBS 공채 6기로 뽑혔다. 어느새 데뷔한 지 21년째다.

=현장 가면 20대인 스탭들이 나더러 “선생님”이라고 한다. 그때마다 내가 조용히 불러서 ‘알아듣게’ 얘기한다. ‘선배님이라고 하든가 그렇게 부르는 게 힘들면 부르지를 말아라’라고. (웃음) 이런 걸 경험할 때마다 ‘참 세월 빠르구나’ 싶다. 현장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다. 듣기에 따라서는 시대에 뒤떨어진 얘기를 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요즘은 작품을 만드는 사람도 배우도 요행을 바라는 게 커진 것 같다. 문제가 생기면 본인에게서 원인을 찾고 바로잡으려 하기보다는 외부환경에서 이유를 찾고. 고치려고는 하지 않는다. <베토벤 바이러스> 때 이재규 PD가 그랬다. ‘클래식 음악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이 얼마 없다. 그만큼 이 드라마는 잘 안 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부끄럽지 않은 작품을 만들어보자.’ 그 말에 나도 합류했던 거다. 요즘은 장인 정신보다는 자극적이고 유행에 민감한 소재들로 한번에 뻥 터뜨리겠다는 생각이 큰 것 같다. ‘흥행 공식에 맞지 않는다’는 말을 하면서 잔잔한 내용이면 아예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기도 하고. 이런 상황이 안타깝다.

-현장의 변화 말고도 배우로서 연기를 대하는 마음가짐에도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변화라는 게 생기지 않았을까 싶은데.

=연기에 임하는 자세만큼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연기를 잘 못하는 것 같으면 여전히 목 마르고 더 잘하고 싶고. 편하게 연기하는 걸 찾기보다는 도전할 만한 게 없을까 보게 된다. 물론 나도 ‘아, 이거 너무 힘든 거 아닌가’ 싶을 때가 왜 없겠나. 아무래도 나이가 있다보니 예전과 달리 몸도 안 따라주고. 편한 것에 안주하는 게 아닌가 싶어 늘 걱정된다. 그때마다 나를 다잡으려 한다.

-자신을 바로세운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물론, 정말 어렵다. 하지만 그걸 안 해서 망가지는 것보다는 다잡는 게 훨씬 쉽다.

-얼마 전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가 종영해 한숨 돌리려나 했는데 곧바로 차기작 소식이 들려왔다.

=배우는 쉬면 죽는다. 몸이 근질근질하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그래서 빨리 일을 해야 한다. 무당이 굿을 못하면 아픈 것과 똑같다. <육룡이 나르샤>에서 만났던 (변)요한이와 같이 영화 <하루>(감독 조선호, 2016)에 출연한다. <특별수사: 사형수의 편지> 개봉하고 나면 6월 중순부터 바로 촬영이다. 인류 구원이라는 큰 포부가 있는 의학 박사 역이다. 봉사 정신도 투철한데 문제는 이런 사람들이 대체로 가정에 소홀하다는 것이다. 못된 아빠 역이다. 박훈정 감독님과는 <VIP>라는 영화를 같이 할 것 같다. 전부터 같이 작업하자고 하다가 이번에야 만났다. <연가시>(2012)의 박정우 감독님의 신작 <판도라>(2015)도 촬영을 끝냈고 추석께 개봉한다. 나를 찾아주는 분들께 감사할 따름이다. 그저 열심히 하는 게 내 일이니 이렇게 또 계속해나 가야지.

스타일리스트 윤슬기 실장·헤어 재클린 원장·메이크업 신재은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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