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이지현의 영화비평] <45년 후>가 보여주는 노부부의 삶에 담긴 역설과 부조리
2016-06-08
글 : 이지현 (영화평론가)
<45년 후>

사실주의영화의 두축을 나누며 들뢰즈는 두 가지 경향을 소개했다. 이 두 가지 사실주의 도식에 사용한 예시는 서부극이나 희극 등 비교적 극단적인 경우들이지만, 우리는 좀더 최근의 영화들에 이를 대입할 수 있다. 먼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움직임이 포함된 ‘상황의 법칙’이다. 이 경우 영화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윤리를 설명하며, 특정 규칙이 주인공을 압박하는 상황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간다. 인물은 상황에 의존하고, 그 결과 처음의 상황은 변모하거나 혹은 그대로 유지되거나 한다. 이를 들뢰즈는 ‘S(상황)-A(행동)-S(상황)’의 도식이라 표현했다. 켄 로치의 작품이 이에 속한다. 이어서 두 번째 사실주의 경향은 행동으로부터 상황이 도출되는 영화들이다. 예를 들어 다르덴 형제의 영화들이 그런 경우다. 동일하게 사실주의적이며 사회주의적인 상황을 겨냥하더라도, 켄 로치와 다르덴의 방식은 다르다. 그리고 들뢰즈의 두 번째 도식인 ‘A-S-A’의 구도가 영화를 지배할 때, 상황은 암흑 속에서 모호함을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 따라서 이때 조금은 혼란이 생길 수 있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에서 주인공은 사회로부터 개인을 드러내지 않으며, 영화는 개인적 행동의 돋보기를 통해 주인공이 처한 사회적 맥락을 지표로 나타낸다. 이러한 영화에서 관객은 상황을 미루어 짐작해야 한다. 이 간접적인 어조는 의외로 강력한 힘을 발휘할 때가 있다. 1999년작 <로제타>는 청년실업 문제에 대한 실제적 해법을 내놓았다.

남편의 첫사랑은 유령처럼

앤드루 하이의 <45년 후>(2015)를 보는 내내 사실주의의 법칙들이 머릿속을 오갔다. 결혼에 대한 일반적인 메시지들, 이를테면 영화에 등장하는 ‘후손들의 사진이 걸린 벽’과 같은 평범함이 이들 노부부에겐 없다. 특별한 점이 없다고 하더라도,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이 영화에서 강조되어 드러나지 않는 점은 특별하다. 소위 ‘한국의 상황에서는 일반적으로 보이지 않는’ 노부부의 삶이, 이토록 평범하게 느껴지는지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다. 어쩌면 감독의 전작 <주말>(2011)에서 드러나는 동성커플의 관계와 이번 영화의 공통점일 수도 있다. 생각해보면 앤드루 하이의 영화에서 커플 캐릭터의 설정은 아주 평범하지 않다. 그럼에도 지극히 평범한 양 그려진다. 그들은 자신들의 특별함을 결코 사회적인 시선으로부터 발전시켜 드러내지 않는다. 그의 인물들은 서로를 향한 행동에서부터 사건을 발전시키고, 이 과정에서 사회적 시선을 의식하며 사건을 진행시킨다. 때문에 겉으로 남들이 느끼는 상황과, 실제 처한 상황과의 감도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 <45년 후>의 제프 부부가 이런 경우다. 이들의 특이점은 다른 부부와의 차이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대신 ‘반세기’라는 긴 시간을 지켜온 동반자적 관계라는 측면에서 일반적 커플이 가지는 역설과 부조리를 포함한다. 이토록 생생하게 영화가 케이트와 제프의 관계를 대중에 각인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 그 이면에 숨겨진 사실주의의 관점을 고민하게 된다.

런던 외곽에 사는 세련된 어느 노부인이, 고상하게 자신의 45주년 결혼기념일을 준비하려 한다. 이들 부부의 과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없지만, 감독은 약간의 힌트를 제시하고 있다. 현재 그들에게 자식은 없으며, 케이트는 초등학교 교사였고 남편은 공장에서 일하다 정년퇴직했다. 남편을 보살필 때 케이트는 아들을 돌보듯 세세하게 주의하는데, 이는 어느 정도 직업적인 영향이 있는 듯 보인다. 어쩌면 특별하다고 할 수 있는 둘간의 관계가 두 사람 모두에게 완벽하게 적응된 상태이다. 아마도 두터운 시간의 결과물일 것이다. 과거 냉전 시대에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비장하게 산속으로 여행을 떠나던 제프의 모습은 현재 온데간데없다. 전쟁 이후 몇달이나 스위스의 산속에서 독일과 영국간의 관계에 대한 회피를 모색하던, 혹은 연인과 함께 자신들의 결합을 추구하며 작은 평화의 실천을 향한 목표로 돌진하던 사내의 모습은 여기 없다. 마치 카디야와 함께 빙하 속으로 침강하듯 그의 과거는 사라졌다. 현실은 케이트와 만나면서 조금씩 바뀌었고, 그가 그 사실을 인지한 것은 어느 날 불현듯 도착한 독일어 편지 한통을 받고 나서부터다. 편지 한통은 그의 기억을 흔들어놓았다. 그렇게 과거의 사건이 불쑥 튀어나와 현재의 삶에 침투되며 영화 속 상황들이 변하기 시작한다. 이제 부부의 일상에 남편의 첫사랑은 유령이 되어 잠입해 있다.

들뢰즈의 두 번째 사실주의 도식과 이 영화의 상황은 꽤 잘 맞아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로제타>의 마지막 결론과 비교해보자. 다르덴의 영화에서 로제타의 손에 쥐어진 ‘가스통’을 보고 관객은 그녀가 자살할 것인지, 혹은 다시 평정을 찾고 앞으로 나아갈 것인지에 대한 혼란에 시달린다. 이때의 지표는 반반씩의 가능성을 모두 가리키고 있다. 그럼에도 일말의 낙관주의를 가진 사람들은 로제타가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전사’로 나아가길 택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 면에서 영화는 지극히 사회주의적 드라마이다. 이 영화의 결말과 <45년 후>의 결말은 일말의 유사점이 있다. 마지막 장면, 45년 전 결혼식날 췄던 곡과 동일한 곡인 <Smoke Gets In Your Eyes>를 배경으로 노부부는 함께 같은 공간을 가로지르고 있다. 이때의 공기는 음악의 따스함에 비해 너무 무겁다. 주변 사람들의 축복과 달리, 관객과 여주인공은 힘껏 공기의 비장함을 빨아들이는 중이다. 남자는 버릇처럼, 그리고 진심인 듯 감동의 축사를 늘어놓는다. 그리고 여자는 가식으로 무장한 채 일상을 연기하기 시작한다. 혹은 그렇게 믿으려 한다. 하지만 끝내 감정을 담아 그녀가 남편의 팔을 내려치는 순간, 관객의 귀에 침묵의 비명이 들려온다. 어쩌면 이토록 서늘한 감정의 스릴러는 케이트가 “만약 그녀가 살아 있다면, 당신은 그녀와 결혼했을까요?”라고 질문을 내뱉었을 때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그 질문에 대한 제프의 대답은 “그렇다”였다. 하지만 관객이 보기에 대답의 진위 여부에 대한 해석은 여지를 지니고 있다. 그들은 심하게 다투었고, 현실의 행동은 상황의 뉘앙스를 포괄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예스’와 ‘노’의 선택은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이 드라마에 심리적 서스펜스를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된다. 이후 영화는 모호한 지표 놀이 속에서 부유한다. 관객의 추론은 줄곧 ‘그것이 진심인지 아닌지’, 혹은 ‘그 작은 행동의 차이가 어떤 상황의 변화를 불러올 것인지’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의 현실성과 부조리적 성향은 부각된다. 영화 속 노인 세대는 결코 조용하거나 부드럽지 않으며, 우리 모두처럼 그리고 어느 젊은 층들보다 열렬하게 자신들의 현재를 향유하는 인물들이다. 이들의 현명함은 몸짓의 작은 차이를 통해 서로를 서로에게 연결시키며, 마침내 미끼처럼 스스로를 고뇌 속으로 잡아끌고 간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대단히 신중한 동시에, 엄청나게 끔찍한 작품이다.

결혼의 단맛과 쓴맛

현대극 특유의 철학성으로 <45년 후>를 설명하거나, 아니면 사실주의의 디테일화를 통해 여성 캐릭터 위주의 드라마로 읽거나, 두 경우 모두 우리의 결론은 사실주의 드라마의 ‘벽’에 대한 논의로 취합될 수 있을 것이다. 과거로부터 온 편지는 물리적 시간으로부터 인물들을 자유롭게 만들었고, 그 자유로움이 삶의 부조리에 대한 고뇌로 상황을 몰고 갔다. 그리하여 노년의 삶에 이르러 맞게 된 정체된 시간성으로부터의 탈출은, 인간 모두가 접하는 ‘뼈대로서의 세계’를 고민하게 만든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아이들을 낳고 둘이 하나가 되는 과정을 거치는 수많은 사람들, 이러한 ‘결혼 생활에 대한 행복한 동화’가 이 영화의 결말에 이르러 철저하게 해부된다. 영화가 그리는 결혼에 대한 날카로운 세부를 미처 다 언급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짐작할 수는 있을 것 같다. 그 단맛과 쓴맛, 그리고 경계의 현실성에 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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