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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기억을 통해 희망 말하기 - <삼례> 이현정 감독
2016-06-30
글 : 김수빈 (객원기자)
사진 : 최성열

이현정 감독은 데뷔작 다큐멘터리 <원시림>(2012)을 시작으로 특정 지역이 품은 에너지를 포착해 영상화하는 데 장기를 발휘 해왔다. 토속적이고 신화적인 에너지가 넘실대는 두 번째 영화 <용문>(2013)을 건너 감독이 새롭게 주목한 영화적 공간은 전라북도 삼례다. 전주와 익산이라는 큰 도시 사이에 낀 이 읍단위 지역에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거대한 무인텔과 원초적 형태의 5일장이 무심히 공존할 뿐. 이현정 감독은 이 낯설고도 익숙한 시골 풍경에서 혁명과 수탈로 들끓었던 근현대사의 한 토막을 발견한다. 그러고는 삼례라는 미지의 세계에 당도한 영화감독과 오랜 세월 삼례를 지켜온 소녀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생과 현생을 잇고 현실과 환상을 교차시키며 지역이 품은 역사와 기운을 스크린에 담아낸다. <삼례>는 전주국제영화제장편영화 지원 프로그램인 ‘전주시네마프로젝트 2015’에 선정된 작품으로 올해 제26회 미국 시네퀘스트영화제경쟁부문, 제 34회 우루과이국제영화제에 초청된 바 있다.

-미디어 설치미술 전시를 위해 전북 삼례를 찾았다가 영화의 영감을 받았다고 들었다.

=오기 전까진 삼례가 어디에 있는 곳인지도 몰랐다. (웃음) 처음 와보는 곳이라 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보게 됐고 자연스레 삼례가 가진 요소 하나하나에 주목하게 됐다. 삼례는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던 곳이자 일제시대엔 수탈의 공간이었고 지금은 잊힌 공간이다. 여러모로 한국적인 의미가 풍부한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삼례의 낡은 공간들이 곧 개발된다고 하기에 다급한 마음에 하루빨리 영화로 기록해야겠다 싶었다.

-극중 영화감독 승우처럼 삼례에 머무르면서 시나리오를 썼나.

=삼례에서 시나리오를 쓰고 서울로 돌아와 동학을 비롯한 역사에 관해 공부해서 덧붙였다. 영화 초반 영화감독 승우(이선호)가 삼례에서 겪는 것들은 내가 똑같이 겪은 거다. 캄캄한 밤길을 혼자 걷는데 검은 차가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따라오던 것도 마찬가지다. 영화에선 그 장면을 통해 위협감을 주고 싶었다. 낯선 공간을 나아간다는 건 호기심도 생기지만 두려움이 동시에 드는 일이다. <삼례>에 접근하는 심정이 그랬다.

-전작들에 이어 초현실적인 표현방식이 동원된다. 내러티브에 얽매이지 않는다.

=평소 영화라는 매체만이 주는, ‘영화적’인 요소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한다. 그러다보니 시나리오 쓸 때부터 큰 화면으로 봤을 때와 5.1 채널 사운드로 들었을 때 관객이 온전히 영화 속에 들어갈 수 있는 요소들을 염두에 둔다. 내러티브에 너무 힘을 쏟으면 그런 걸 덜 생각하게 된다.

-<삼례>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나.

=이 영화에서 희인(김보라)이 승우의 환상이었나 아닌가, 시나리오의 시작 지점이 어딘가는 중요한 게 아니다. 영화의 다양한 지점이 여러 겹으로 되어 있다. 관객이 영화를 보고 나서 느끼는 알 수 없는 파동과 여운 속에 희망이 있길 바랐다. 직설적인 이야기는 언제나 끝이 있지만 이 영화는 이미지도 이야기 구조도 순환적이다. 그게 희망적이라고 봤다. 미국에서도 9•11 테러가 일어난 공간은 무너졌지만 그 공간에서 사람들이 각자의 기억을 통해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나.

-전작 <용문>에서 주인공 용은 토속적인 정기로 가득한 그 지역과 똑 닮아 있다. 반면 <삼례>의 두 주인공은 현지인이든 이방인이든 지역색이 크게 묻어있지 않다.

=<용문>을 통해서는 민초들의 이야기를 해학적으로 풀어내고 싶었다. 궁중화가들이 그린 그림이 아니라 어딘가 귀엽고 어정쩡하고 정감 가는, 현대의 민화 같은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토착적인 느낌이 강하다. <삼례>에선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일종의 좌절감을 드러내고 싶었다. 꼭 삼례가 아니어도, 어느 지역의 어떤 사람이건 마찬가지다. 누구나 <그리스인 조르바>의 조르바처럼 행동하지는 못한다. 그런 걸 승우를 통해 그려내고 싶었다. 반면 희인은 자기 감정에 솔직한 인물이다. 아픔도 있지만 무척 꿋꿋한 사람이다. 그래서 희인이란 캐릭터는 좀 초현실적으로 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희인의 전생으로 언급되는 이소사는 동학군을 지휘했던 실존 인물이다. 이 인물에 어떻게 관심을 갖게 되었나.

=삼례는 동학농민운동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남접과 북접이 함께 봉기한 몇 안 되는 지역이다. 동학의 정신이 응축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이소사는 동학농민운동을 이끈 중요한 인물이다. 일본군이 이소사를 고문하면서 짧게 남긴 기록이 그녀에 대한 기록의 전부다. 얼마 전 개봉한<귀향>에도 목숨을 내놓고 앞장서는 여성이 등장한다. 그런 인물들이 존재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건 천지 차이다. 이 사실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들에게는 민중의 어떤 신적인 믿음이 따라붙었다. <삼례>에 종교적인 색채가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소사가 환생한 희인에게는 신적인 존재까지는 아니지만 인간과는 다른 뭔가가 있을 거라는 뉘앙스를 주고 싶었다.

-승우보다 희인이 더 풍부한 사연을 입은 입체적인 인물이다. 또 승우에겐 신앙생활을 강조하는 어머니가 있고, 희인에겐 독특한 기운을 가진 점쟁이 할머니가 있다. 여성 캐릭터들이 두드러지는, 여성성이 강한 영화다.

=자기주도적인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영화를 찍는 방식을 여성적으로 접근하는 데 주목했다. 남자가 효율을 중시한다면 여자는 전반적인 맥락을 중시한다. 여성적인 표현방식을 고민한 끝에 직선적이지 않은 스토리라인을 만들고 파동, 기운, 아우라를 영화의 중심 카테고리로 뒀다.

-강산에의 <…라구요>는 희인의 마음을 대변하는 노래로 쓰인다. 가사를 따져 보자면 실향민을 부모로 둔 자식의 노래인데 이 노래를 선택한 이유가 있나.

=노래의 가사는 강산에 본인의 실제 얘기다. 우리 민족의 아픔이면서 개인의 아픔과 기억이 함께 담긴 노래다. 그 점이 내가 생각하는 <삼례>와 딱 맞아떨어졌다.

-우주를 연상케 하는 그래픽 이미지들은 어떻게 구상하고 만들었나.

=삼례가 지닌 아픔과 기억들을 승화시키려면 우주적인 차원으로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현실의 법을 고쳐봤자 얼마나 고치겠나. 어떤 문제가 잘 해결될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회다. 삼례를 희망적으로 말하고 싶었기에 우주적으로 확산할 수밖에 없었다. 초반부에 등장하는 이미지는 ‘코스믹 아이’(cosmic eye)라고 불리는 성운이다. 테렌스 맬릭 영화에도 많이 나온다. 이미 과학적으로 증명된 자료들을 바탕으로 아티스트와의 협업을 통해 이미지들을 구상했다. 주어진 시간과 여건에서 그래픽을 만드는 게 쉽지 않아서 게임엔진으로 만들었다. 시도해본 적이 없었는데 다행히 잘 나왔다.

-차기작과 향후 활동 계획을 듣고 싶다.

=차기작은 타르와 같이 찐득찐득하고 까만 영화 혹은 맑고 선명한 황금색 영화가 될 거다. 칠흑 같은 영화는 어둡고 진한 톤으로 인간의 극단을 얘기하는 영화라면 황금색 영화는 동심 어린 판타지 같은 이야기다. 정반대의 두 시나리오를 구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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