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배우의 도(道)
2016-07-04
글 : 김정원 (자유기고가)

<달마야 놀자> <배우는 배우다> <나의 독재자>

<달마야 놀자>

학교 앞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이었다. 웬 30대 남자가 들어오더니 주인을 찾았다. “안 계신데요.” “그럼 누나한테 저 왔었다고 전해주세요.” 응? 나는 문을 열고 나가려는 남자를 향해 카운터 너머로 몸을 던지며 부르짖었다. “누구시라고 전할까요오오오!” 그냥 안경 끼고 머리 크고 170㎝ 정도 되는 30대 남자가 왔다 갔다고 전하면 주인 언니한테 혼난단 말이에요!

그 순간, 남자의 얼굴에 숱한 상념이 스쳐갔다. 그것은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서글픈 한편으로 나는 지금껏 뭘 하고 살았을까 허무와 자책이 덮쳐오는 동시에 요즘 대학생들은 이토록 무식해도 되는 것인가라는 한탄이었으니…. “○○○입니다.” 아, 배우시구나. 그 복잡다단한 감정을 3초 안에 표현하다니 역시 배우, 영화에서도 방금처럼만 연기했더라면 내가 한눈에 알아봤을 텐데, 라며 그 시절부터 이미 남의 탓만 하고 살던 나였다.

하지만 그건 내 탓이기도 했다. 홍콩 공항 디즈니 스토어에서 (펜 한 자루 안 들고 다니던 주제에) 곰돌이 푸 필통을 탐하고 있던 내게 엄청나게 예쁜 아줌마가 말을 걸었다. “저기요, 우리 애가 고집을 부려서 그러는데, 얘(<몬스터 주식회사>의 부우, 그러니까 갈래머리 꼬마)보다 얘(<니모를 찾아서>의 니모, 그러니까 물고기)가 낫지 않아요?” 아이 엄마가 캐릭터 이름도 모르다니 자격이 없군, 이라고 생각하며 두 캐릭터의 장단점과 그것이 동심에 미치는 영향을 영화기자답게 설명하고 돌아서는 내게 함께 출장 갔던 동료들이 눈을 반짝이며 캐물다. “○○○하고 무슨 얘기했어?” “뭐? 여기 ○○○가 있다고?” “… 방금 너한테 뭐 물어봤잖아.” 어쩐지 예쁘더라니, 탤런트였어.

그렇다, 나는 사람 얼굴을 못 알아본다. 그러고도 10년 가까이 기자 노릇을 해먹다니, 이런데도 나를 고용해준 모든 사장과 편집장에게 감사를.

그냥 나만 불편하다고 생각했던 그 단점을 뉘우친 건 배우 류승수가 쓴 에세이 <나같은 배우 되지마>를 읽으면서였다(배우가 인쇄소로 감리까지 나왔다는 소문이 있어 출간 당시 편집자들이 애틋한 마음을 담아 법인카드로 사서 보던 책이었다). 그 책에서 류승수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배우라고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게 해준 작품이 바로 <달마야 놀자>다.”

<무영검>

아, 그래, 나도 창간하는 잡지에서 일할 때마다 섭외 전화 돌리면서 내가 누구인지 구구절절 설명하느라고 힘들었지(그게 세번). 이제 사람 얼굴 열심히 기억하면서 살자. 아, 근데, 나는 친척 결혼식장에서 반년 만에 만나는 친조카가 나를 보고 열심히 이모라고 외치는데도 저 못생긴 꼬마는 누굴까, 궁금해하면서 그냥 지나갔던 사람이지.

그런데 어떻게 하면 배우의 얼굴을 기억할 수 있을까. 영화 <배우는 배우다>에 나오는 매니저는 비웃는다. 배우는 연기만 잘하면 아름다운 세상이다? 사실 배우에게 외모가 중요하긴 하다. 난생처음 보는 남자배우가 너무 잘생겨서 단체관람 수준으로 <구미호>를 보러 몰려갔던 여고생들은 난생처음 보는 발연기에 충격을 받고 돌아와 그 미남의 앞날을 근심했지만. 그게 정우성. 류승수도 그랬지, 연기는 타고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거라고. 그리고 외모는 타고나는 거야. <영화는 영화다>에서도 그러잖아, 얼굴 뜯어먹고 사는 놈이라고.

미남인지 아닌지 애매모호한 신현준도 에세이 <배우, 연기를 훔쳐라>에서 자기처럼 독특하게 생긴 체대 전공도 배우가 될 수 있다고 설득한다. 신현준은 그 시절 만난 친구와 언젠가 함께 영화를 만들자고 약속했고, 그걸 실현 하긴 했는데, 그 친구가 김영준 감독이고 그 영화가 <비천무>와 <무영검>… 때로 꿈은 꿈으로 남을 때 더욱 아름다운 법.

그래도 배우는 역시 연기로 기억되는 법이다. <나의 독재자>의 연극배우 성근(설경구)은 연기를 너무 못해서 김일성의 대역 배우로 발탁(근데 왜 그랬는지는 영화를 끝까지 봐도 모르겠다), 일생을 걸고 오직 하나의 연기에 몰두하니, 지나치게 잘할 수 없다면 지나치게 못해버리는 것도 길이 될 수 있다는 삶의 희망을 주는 좋은 영화였습니다(못하는 건 매우 잘할 수 있음). 게다가 명문대 학생들도 1년 이상 학습과 세미나를 통해 익히고 때때로 되풀이한다는 주체사상을 주입식 교육으로 몇달 만에 완벽하게 체화하여 자유자재로 응용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는 주인공을 보여줌으로써 한국의 주입식 교육이 가지는 장점을 극대화하는… 응?

<배우는 배우다>

하지만 노력해도 안 되는 건 안 된다. 하루에 아홉 시간 이상 못 자면 활동에 심각한 지장을 받는 나는 잠을 줄이려고 노력하니 1일 노동 가능 시간이 3시간으로 줄었다, 종일 조느라고.

연기 잘하는 오달수가 연기 못하는 배우 연기를 매우 잘하는 <대배우>는 제목과 다르게 안 되는 놈은 20년을 해도 안 되니까 처자식 고생시키지 말고 정신 차리자는 바람직한 가치관을 역설하는 듯하지만… 그래 놓고 본인은 감독함. 사실 그렇다. 100m를 20초에 달리는 내가 반년간 운동해서 얻은 결과가 19.5초였으니, 그 정성으로 제시간에 학교나 갈걸 그랬지.

배우들이 아무리 노력을 강조한다고 해도 관객에게 첫눈에 들어오는 건 그들의 타고난 조건이다. 외모와 목소리, 분위기, 눈빛 같은 것들. 그리고 하나가 더 있다면 그들의 사생활이다. 오래 전에 한국영화를 대표한다고 할 만한 어느 배우는 인터뷰 도중에 배우가 세금 받아 사는 공인도 아닌데 젊은 애들 사생활을 가지고 왜 그렇게 괴롭히는지 모르겠다고 몹시 화를 냈다. 그 포효 하는 연기가 괜히 나온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동시에… 난 그런 말 한 적도 없는데 나한테 왜 그러세요. 어느 배우의 사생활이 숱한 인터넷 언론과 커뮤니티를 지금은 사라진 <사랑과 전쟁>의 추억으로 수놓고 있는 지금도, 그는 매우 화가 나 있을 것 같다.

눈치껏 대본 보기

뭔가 답답한 배우들이 통(通)하면 좋을 두세 가지 것들

<나의 독재자>

궁하면 통한다

<나의 독재자>의 선배 배우는 잘하겠다고 다짐하는 성근에게 외운 대로만 하자고 한다. 너무 잘하려고 애쓸 것 없다며 다독이는 줄 알았는데, 그냥 있는 그대로 진짜였어. 대사를 그냥 읽기만 하는 것도 못하는데 저 사람을 뭣하러 무대에 세운 걸까. 그런데 외울 수 없다면 눈치껏 하면 된다. 사극을 보면서 나이 많은 배우들은 저 길고도 어렵고 낯선 대사를 어떻게 외우는 걸까 감탄했는데, 드라마 <대장금> 촬영현장에 갔다가 알게 됐다. 아, 외우는 거 아니었구나. 상궁 아주머니들이 치맛자락을 포함한 여기저기에 대본을 감쪽같이 감추더라고, 대본 안 보는 척 시선 처리도 기가 막히고.

<대배우>

모든 길은 통한다

그렇게 <리어왕> 조연 대사도 외우지 못해 설움받던 성근은 안기부에서 지옥 훈련을 받던 끝에 스스로 대사를 쓰는 경지에 이른다. 그리고 놀랍게도 젊어서 외우지 못했던 <리어왕> 대사를 줄줄이 읊기 시작하지, 대강 20년 만에. 성근은 암기력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 연기력이 떨어지는 거였어. <대배우>의 성필도 자꾸 대사 씹으면서 영화현장이 낯설다고 변명하는데, 적응력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 연기력이 떨어지는 거였지.

<레드카펫>

감독과 통한다

아역배우였다가 이제 막 인기를 얻기 시작한 <레드카펫>의 은수(고준희)는 에로영화감독 정우(윤계상)와 사랑에 빠져 소속사 몰래 그의 영화에 출연한다. 본인들은 좋은 영화라고 우기지만 제목은 누가 봐도 짝퉁인 <사관과 간호사>에 스타일은 80년대 문예영화, 꼴리는 영화를 만들자던 사람들이 모여 만든 그 영화사 이름은 꼴. 그런 꼴로 세계 3대 영화제에 진출하긴 하니, 정을 통하여 관객과도 통한 좋은 예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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