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가 안방극장으로 들어왔다. 닛카쓰의 로망포르노 작품을 선보인 ‘로뽀클래식 필름 페스티벌’이 지난 5월19일∼6월22일 5주간 5개 도시에서 개최되었다. 영화제는 온라인으로도 이어진다. 오는 7월5일부터 매주 2편의 로망포르노 작품이 IPTV를 통해 서비스된다. SK Btv와 홈초이스 등 디지털 VOD 서비스를 통해 닛카쓰 스튜디오의 고전 로망포르노 클래식을 만날 수 있다.
1970년대 일본, 고도성장기의 번영과 풍요는 B급영화를 통해 그 치부를 예리하게 드러냈다. 저예산 선정영화들의 등장은 시대상의 반영인 동시에 영화계의 불황이 만들어낸 산물이었다. 당시 일본영화는 TV와 치열한 사투를 벌였으며 결과는 완패였다. 사람들은 TV 브라운관 앞으로 몰려들었고 1960년대 초반 영화 관객은 반토막이 났다. 폭력과 섹스, 자극과 선정을 내세운 은밀한 에로티즘의 영역은 TV가 넘볼 수 없는 영화의 신개지였다. 핑크 영화, 로망포르노 같은 일본의 하위 성애영화 장르들이 이 시기 등장한다. 침실 장면을 몇개 넣으면 나머지 부분에 감독 연출권의 재량이 주어졌기에 창작의 자유가 어느 정도 보장되었고 이는 젊은 감독들을 유인할 만큼 매력적이었다. 이 시기 일본 성애영화에서는 역동적이고 혁신적이며 아나키스틱한 작업들이 이루어졌다.
1960년대 무국적 액션영화로 불황을 타개해보려 했던 닛카쓰 영화사는 결국 1971년에 제작 중지라는 위기를 맞는다. 이에 닛카쓰는 저예산 에로티시즘 영화를 양산하는 것으로 영화사의 재건을 시도했다. 폐쇄적 공간, 퇴폐적 탐닉, 무도덕과 패륜이 범람하던 B급영화, 이른바 ‘로망포르노’의 출발이다.
닛카쓰의 로망포르노는 1960년대 이래 일본의 독립 프로덕션에서 제작된 선정영화인 ‘핑크영화’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무명의 여배우를 벗기고, 세트를 활용하지 않은 채 방 안에서 2~3일 만에 촬영되던 핑크영화는 때로 와카마쓰 고지 감독의 경우처럼 극좌적 경향으로 흐르기도 했으며 일본 작가주의 감독의 산실이 되었다. 1970년대 들어서면 이러한 래디컬한 실험영화의 열기가 일본 학생운동의 퇴조와 함께 쇠퇴하게 된다.
닛카쓰의 로망포르노는 핑크영화를 참고하여 그 몇배의 예산을 들여 제작한 상업영화였다. 비록 저예산영화였지만 핑크영화에 비해 꽤 돈을 벌어들여서, 영화 세트도 만들고 훈련받은 배우를 기용하기도 했다. 몇 차례의 베드신을 넣는다는 원칙을 제외하면 감독들에게 창작의 자유도 주어졌기에 때로 탐미적이거나 혁신적인 작품 이 나올 여지도 있었다.
로망포르노는 1970년대에 인기를 끌었고, 에로영화 따위는 만들지 않겠다고 영화사를 떠난 기성 감독들의 자리를 꿰찬 신진 감독들의 활력으로 일본영화의 활성화에 상당히 공헌하였다. 로망포르노의 시대는 이후 홈비디오의 보급으로 인해 저물어갔다. 닛카쓰는 1971년부터 1988년까지 2주간 2편씩 로망포르노를 제작하는 관행을 지속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가 총 1100편이다.
<마지막 연가>와 <수상한 여의사> 등 주요 상영작들
이번에 소개되는 작품은 이들 중 문제작을 선별한 것이다. <마지막 연가>(감독 히가시 요이치, 1981)는 불륜을 따라간 치정극이다. 여대생 토시는 문학가 오다의 시에 맞춘 춤을 추면서 그에 대한 동경의 마음을 키워간다. 이후 유부남인 오다의 여자가 되지만, 불륜 관계 속에서 깊은 외로움을 느낀다. 혼자 보내는 날이 길어지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주위 사람들의 괴롭힘에 점점 황폐해져간다. 어긋난 관계는 회복이 어렵고 사람들은 적절한 타협 없이 결핍을 안고 살아갈 뿐이다. <오키나와 열도>(1969)로 출발해 사회파 감독으로 알려진 히가시 요이치 감독의 작품이다.
<수상한 여의사>(감독 야마시로 신고, 1983)는 산부인과 여의사를 주인공으로 했다. 가네코는 동업자와 함께 산부인과를 운영한다. 그녀들이 운영하는 산부인과는 노인, 게이, 트랜스젠더 등 사회적 약자인 여성들의 피난처다. 어느 날 가네코에게 쫓기는 한 여자가 찾아오고, 그와 함께 불길한 사건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다소 두서없는 스토리 전개와 별도로 영화의 흐름은 신선하고 혁신적이다. 트랜스젠더로 살해당한 토미의 장례식장에서는 국가공안위원장과 방위청 장관의 실상이 폭로된다. 여성들을 괴롭히던 명문가 아들의 결혼식은 선혈이 낭자한 복수극으로 바뀐다. 모피코트를 입고 등장해 ‘나’의 복수가 아니라 ‘우리들’의 복수라고 외치는 가네코의 말 속에서 영화가 지지하는 궁극적인 입장이 드러난다.
<폭행 잭더 리퍼>(감독 하세베 야스하루)는 섹스와 폭력의 치명적 결합을 보여주는 영화다. 빵집 여종업원 유리와 주방보조 켄은 우연히 사람을 죽이게 되고, 이후 서로의 육체를 탐닉하며 궁극의 쾌감을 느낀다. 살인을 통해서만 오르가슴을 느끼게 된 두 남녀는 점점 더 자극적인 쾌락을 찾게 된다. 못생기고 심보도 고약한 여주인공과 소심한 남주인공이 명백히 패륜적 행각을 벌이는 이 영화의 서사에서 우리는 어떠한 죄책감이나 수치심도 읽어낼 수 없다. <보니 앤 클라이드>의 반사회적 버전으로도 보인다. 역겨우리만치 잔혹한 과잉폭력에 골몰하지만, 영화가 품은 정서적 에너지는 엄청나다.
<롯폰기 스캔들>(감독 와타나베 마모루, 1979)은 세련된 하드보일드물이다. 동정 없는 세계를 살아가는 마약상인 주인공은 고독한 단독자다. 극도의 쾌락에 모든 것을 내던지는 여성들을 농락하지만 왜 그가 세상에 대한 어긋난 복수를 하고 있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상류층 여성이나 부잣집 딸들을 마약에 빠져들게 하지만, 정작 자신은 지나친 도취를 피해 한발 물러나 있다. 초창기 스즈키 세이준의 무국적 스타일을 연상시키는 양식의 과시와, 비관적이지만 주관이 뚜렷한 남주인공 캐릭터의 창출이 인상적이다.
더 많은 작품들과 만나게 되길
아직 IPTV로는 볼 수 없지만, 영화제를 통해 인기를 얻어 곧 만나게 될지도 모를 명단도 흥미롭다. 먼저 초창기 닛카쓰 로망포르노의 예술적 경향을 이끌었던 다나카 노보루 감독의 작품들을 눈여겨볼 만하다. <실록 아베 사다>(1975)는 오시마 나기사의 <감각의 제국>의 소재이기도 한 아베 사다의 실화를 사실적으로 파고든 작품이다. <창녀고문지옥>(1973)은 에도시대 유곽을 배경으로, 남성들의 복상사를 유발하기에 ‘저승사자’로 불리는 유녀의 치정과 사랑을 다뤘다. 특히 인형극과 결합된 장면에서 극도의 탐미적인 경향이 빛을 발한다. 구마시로 다쓰미 감독의 <은밀한 게이샤의 세계>(1972)는 소설가 나가이 가후의 원작을 바탕으로 1910년대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의 이면을 들춰내 제국주의적 야망과 퇴폐성을 병행시킨다. 로망포르노 작품들은 도덕과 관습에 구속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여성의 욕망과 야생적 생명력을 영화의 중심에 가져다놓았다. 선공개되는 작품들을 중심으로좀처럼 접하기 어렵던 로망포르노 작품들을 차차 만나게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