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정글과 법
2016-07-06
글 : 김혜리
<도리를 찾아서>

<니모를 찾아서>가 자식을 구하는 부모 시점의 이야기라면, <도리를 찾아서>는 잃어버린 부모를 찾아가는 ‘아이’쪽 모험담이다. 중요한 것은 이 아이가 특수하다는 점이다. 이미 전편에서 니모의 불균형한 지느러미와 도리의 단기기억상실증을 통해, 장애를 일종의 동기와 개성으로 해석했던 픽사는 속편에서 더 나아간다. <도리를 찾아서>에는 다리가 일곱인 문어(septopus), 고도근시 상어고래, 음파 반사력이 고장난 흰고래, 말 못하는 바다사자와 물새가 주요 캐릭터로 등장한다. 이들은 서로를 독려하고 보완해 시나리오가 부여한 위기를 극복해나간다. 한편 도리의 엄마, 아빠는 특수아동을 양육하는 부모의 훌륭한 귀감이고, 그런 부모에게 도리가 품은 부채감은 이 명랑한 영화에서 가장 아픈 감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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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에는 전형적으로 나쁜 교사나 무책임한 부모가 등장해 아이들의 세계를 휘어잡는 상위의 권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어른들의 객관적인 영향력이 어떠하든, 선(최수인)과 지아(설혜인), 보라(이서연)의 사회는 철저히 자기들끼리의 정치와 외교로 돌아간다. 선생님의 칭찬보다 친구가 돌려준 시선 하나가 하루의 행불행을 좌우하고 엄마의 꾸지람보다 친구의 몇초 침묵이 하늘을 무너뜨린다. 본인들의 인정욕구와 서열화를 감당하기에도 하루가 짧은 것이다. 마음이 찢기는 고통에도 불구하 고 이들은 친구와의 분쟁을 결코 (충분히 선량한) 교사와 부모에게 의뢰하지 않는다. 물론 어른들은 그들을 돕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시절의 잠 못 이루는 밤을 돌아보건대 나 역시 그랬다. 이 문제는 천살 먹은 현자도 도와줄 수 없으며 내가 해결해야만 한다는 불문율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진심을 알리고 진심을 알려달라고 호소하는 무수한 편지와 쪽지, 좋아하는 노래 모음 테이프 선물이 그렇게 만들어졌고 그것들은 친구가 질리지 않을 정도로 고심해서 결정한 적정 빈도로 전달되었다. 이모티콘이 없었던 나의 세대에겐 구구한 방법밖에 없었다.

민규동, 김태용 감독의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와 윤성현 감독의 <파수꾼>이 그랬듯 윤가은 감독은 유년기, 청소년기를 이미 통과한 단계로 돌아보는 대신 고유한 생태계로서 관찰한다. 성인 관객이 이 영화들에서 얻는 회고와 향수가 있다면 어디까지나 부산물이다. 이 ‘자치제’적 세계는 윤가은 감독의 단편에서도 공고하다. <사루비아의 맛>(2009)이 이야기를 시작하고 마지막에 돌아가는 공간은 개교기념일의 학교다. 이때 교실과 운동장은 어른들이 세운 교육의 장소에서 아이들이 점유자로서 사실상 지배하는 공간으로 성격을 변경한다. <손님>(2011)의 고등학생 자경(정연주)은 아빠의 비밀 연애를 알아차리고 상대방 여성의 집으로 쳐들어갔다가 그녀의 어린 남매와 하루를보낸다. 도중에 아빠가 등장하지만 영화는 남자의 목소리만 들려주고 얼굴은 프레임에 들이지 않는다. 요컨대 어린 주인공이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없는 성인들의 세계와 마주치는 상황이 오면, 윤가은 감독은 객관적 상황은 내버려두고 아이의 눈과 얼굴에 드러난 리액션에 집중해 그것을 유일한 영화의 액션으로 만든다. <콩나물>(2013)은 여섯살 수안(김수안)이 시장에 (아무도 시키지 않은) 심부름을 갔다가 겪는 일련의 사건을 따라간다. 길 잃은 수안이 다양한 인물과 조우하며 울고 웃는 동네는 거의 <반지의 제왕>의 중간계 만큼이나 다채롭고 광활하게 느껴진다. 작은 주인공이 감지하는 세상의 스케일을 어떤 식으로든 감독이 필름에 옮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덧붙이자면 윤가은 감독의 소녀들은, 마치 온전한 ‘시민권’의 근거를 마련하려는 듯 부지런히 가족 성원 1인분의 몫을 다한다. <손님>의 자경은 엄마에게 아빠의 바람을 알리지 않고 혼자 해결할 요량이고 <콩나물>의 수안은 조막손으로 제사 준비를 거들고 싶어 안달을 낸다. <우리들>의 선이는 지아와의 관계를 풀기 위해 골머리를 앓으면서도 동생 윤에게 보모 노릇하기를 쉬지 않는다.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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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인가, 실사영화인가? 뮤지컬인가, 아닌가? 원작자 러디어드 키플링의 비전인가, <라이온 킹>의 진화인가? 답은 “적당히 양쪽 다”다. 존 파브로 감독판 <정글북>을 보는 동안 내 머리 위에 돋아난 물음표들은, 디즈니라는 스튜디오의 가히 천재적인 절충 능력에 대한 경탄으로 종합됐다. 새로운 <정글북>은 동물부터 햇빛까지 모조리 픽셀로 그린 정글 속에 인간 배우 한명을 던져놓는다. 포토리얼리스틱 애니메이션이라고 불러도 무방한 이 영화는 1990년대 중반 이후 CG로 ‘그린’ 부분의 비중이 증가해온 할리우드 액션 판타지 장르가 다다른 극점이다. 그러나 나는 <정글북>을 보며, CG로 마감된 여타 히어로물이나 어드벤처의 폭파와 전투 장면을 볼 때와 달리 중량감의 결핍을 개탄하지 않았다. 대신 동물 배우들의 안위를 염려할 필요 없이 야생 캐릭터와의 근접조우를 실컷 즐겼다. 20년 전 <인디펜던스 데이>의 백악관이 가루가 되는 장면에서 사람들이 느꼈다고 증언했던 ‘눈을 믿을 수 없는’ 전율을 나는 <정글북>에서 뒤늦게 체험했다. <정글북> 속 동물들은 이 영화의 또 다른 1967년작 디즈니 핸드드로잉 애니메이션 <정글북>에 비하면 당연히 사실적이고 자연은 꽤 위협적이다. 모글리의 생채기투성이 몸은 털도 가죽도 없는 인간 육체의 상대적 연약함을 절감케 하고 호랑이 쉬어칸이 늑대왕 아킬라를 처단하는 장면은 어린이 관객의 악몽을 걱정하게 만든다. 하지만 극중 동물의 얼굴과 움직임은 자연 다큐멘터리 속 그들의 모습에 비하면 미묘하게 카툰의 속성을 띠고 있다. 그들은 어쨌든 말하는 동물인 것이다. 존 파브로 감독의 렌더링팀은 사실성과 만화적 의인화 사이의 미묘한 선을 구현했다. (예컨대 <라이프 오브 파이>의 호랑이 리처드 파커가 사람의 말을 한다면 우리는 뭔가 잘못됐다고 느낄 것이다.) <정글북>의 동물 의인화 수준은 캐릭터의 기능에 따라 다분히 편의적이다. 가장 거룩한 동물로 묘사된 코끼리와 가장 저열한 종족으로 그려진 (킹 루이를 제외한) 원숭이들은 인간의 말을 하지 않지만 빌 머레이가 연기한 곰 발루와 작은 동물들은 거의 21세기 코미디언풍의 개그를 구사한다. 느닷없는 두 차례 뮤지컬 시퀀스는 영화의 일관성을 적잖이 흔들어놓는다. 그러나 존 파브로 감독은 1967년작의 히트 넘버 세곡을 끝내 포기하지 않는다(구렁이 카아의 노래는 엔딩 크레딧에 흐른다).

세심한 절충주의 전략은 자연관에서도 관철된다. 러디어드 키플링의 정글은 기본적으로 약육강식의 세계다. 원작 <정글북>의 늑대 우두머리 아킬라는 쉬어칸의 습격이 아니라 젊은 세대 늑대들에게 먼저 밀려난다. 정글은 절대 우의와 연대의 낙원이 아니다. 첫 번째 원작 <정글북>의 결말에서 모글리는 인간과 자연이 모두 자기를 내쳤다며 경멸과 환멸에 찬 말투로 단독자로 살겠다고 선언한다. 우월한 자의 영광스런 고립으로 해석되는 대목이다. 대신 영화는 모글리를 불필요한 살생을 일삼는 쉬어칸에 대적하는 정글 연대의 중심으로 세운다. 모글리는 인간의 징표인 불을 무기로 취하지만 불똥이 정글에 일으킨 화재를 보고 과감히 횃불을 버린다. 화력을 포기한 소년은 도구를 활용하는 창의력과 동물 친구들의 도움으로 쉬어칸과 맞선다. 즉 자연의 위력과 인간의 태생적 파괴성을 인지하면서도 노력하면 공존이 가능하다고 영화는 설파한다. 이는 물론 대단히 목가적이고 나이브한 판타지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인간 마을로, 동물은 정글로 돌아가야 마땅하다는 애니메이션판의 종족주의적 결론, 왕의 운명을 타고난 자의 지배를 예찬하는 <라이온 킹>의 메시지를 전면적으로 뒤엎는 행보이기도 하다. 아동 관객을 상정한 영화는 불가피하게 모종의 윤리적 입장을 포함하기 마련이다. <정글북>은 21세기 수정주의 국면을 통과 중인 가족영화 왕국 디즈니의 정치적, 미학적, 기술적 현재를 한눈에 보여주는 표본 같다.

<에브리바디 원츠 썸!!>

좋 아 요

졸업은 거절한다

※<에브리바디 원츠 썸!!>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신작 <에브리바디 원츠 썸!!>은 대학에 입학한 야구 특기생들이 선배들이 살고 있는 합숙소에 들어와 개강까지 보내는 나흘 동안의 이야기다. 고등학교의 학기 마지막 하루를 스케치한 감독의 1993년작 앙상블 <멍하고 혼돈스러운>이 떠오르는 설정이다. 나아가 <에브리바디 원츠 썸!!>에는 <멍하고 혼돈스러운>에서 젊은 매튜 매커너헤이가 연기한 우더슨과 꼭 닮은 인물이 있다. 우더슨이 “사회가 강요하는 규칙을 무시해. 그저 계속 살아!(Keep Living!)”라고 외쳤듯, <에브리바디 원츠 썸!!>의 상급생 투수 윌러비(와이어트 러셀)는 내면의 이상함을 적극 수용하라고 권한다. 음악을 잘 들으려면 음정과 음정 사이에 주파수를 맞춰, 듣는 나의 자아를 찾아야 한다고 조언하기도 한다. 그러나 윌러비는 자기 안에서 모든 것을 찾는 생활방식의 쓸쓸한 이면을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친구들은 개강 직전, 이 멋진 선배의 본명이 윌러비가 아니며 캠퍼스에 영원히 머물고 싶어 가짜 신원으로 여러 대학을 전전했음을 알게 된다. 링클레이터의 앵글은 청춘의 가장자리도 놓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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