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교수의 도(道)
2016-08-01
글 : 김정원 (자유기고가)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 <뷰티풀 마인드>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굿 윌 헌팅>

교수는 책상물림이라고만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하나 과소평가였지. 주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 또한 “지가 행보다 앞서는 것이지만 중요성은 오히려 행에 있다” 하셨으니, 이 가르침을 실천에 옮기고자 일군의 교수들이 분연히 일어섰다. 미학과 교수들이 인문대 구역 환경 미화 작업을 시작했던 것이다(이 미학이 그 미학이 맞는지는 논외로 치도록 하자).

문제는 이거였다, 나 하고 싶은 거 하자고 다른 사람을 노예처럼 부려먹기로 교수 뺨치는 직업은 사장밖에 없다는 것. 교수들의 노예주 근성이란 동서고금을 막론하여, 청소부 청년의 재능을 알아보고 몸소 잡역부 사무실까지 행차한 다음 보석과 정신과 진료까지 주선하는 <굿 윌 헌팅>의 착한 교수도 명함 한장 주머니에 챙기기가 귀찮아서 아주 자연스럽게 조교한테 넘기더라고. 너무 자연스러워서 순간 초대형 명함 지갑인 줄 착각했어.

어쨌든 노예를 부려먹으려면 일단 노예가 있어야 한다. 미학과 교수들은 묘목을 옮기고 땅을 파서 나무를 심음으로써 삭막한 회색의 인문대 지구를 녹화(綠化)하고자 조교들을 풀었고, 그 조교들은 다시 대학원생들을 확보했으며, 그 대학원생들은 또다시 학부생 사냥에 나섰으니, 이것은 미(美)를 향한 몇몇 교수의 과욕이 부른 참극. 그 후 겨울이 와서 땅이 얼어붙기까지 미학과 건물 근처에선 학부생들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는 (사실 이것도 환경 미화라면 환경 미화, 담배꽁초와 먹고 버린 우유 팩도 더불어 사라졌지) 슬픈 옛이야기다.

그렇다면 교수란 누구인가.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교수는 대학에서 학문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사람을 뜻한다. 다시 말해 학문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것이 표준적인 교수의 도(道)일진대 산천은 유구하나 도는 간데없어, 내가 대학 시절 이미 많은 교수가 정교수 임용으로 철밥통을 꿰찬 동시에 학문을 접고 인생을 즐기기 시작했다. 허구한 날 단골 술집 자리 몽땅 차지하고 앉아 있는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의 교수들처럼(그러고 보면 이 영화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밤마다 교수들 주접과 진상에 시달리는 단골 술집 주인). 우리 과 대학원생들도 논문 심사할 교수 잡으러 다니다가 단골 룸살롱까지 찾아가서 마담한테 젊은이의 가무를 선보이고 간신히 교수 빼왔다더라.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에서 너무 은밀한 나머지 일개 평범한 관객의 눈으로는 그 매력을 여간해선 발견하기 힘든 염색과 교수 조은숙(문소리)은 피부 고운 20대 여학생들을 뙤약볕 아래 불러놓고 혼자 양산 쓰고 있는데, 그거 들고 있는 사람도 피부 고운 20대 여학생이다. 자연에서 색을 찾는 염색과 교수라더니 자연스러운 노화의 비법 또한 깨우치고 있는 조 교수, 정교수가 되어도 평생 조 교수, 아, 미안. 아무튼 시시때때로 햇볕에 내놓고 말려줘야 피부에 잔주름과 기미가 들어차 20대 얼굴이 30대 되니 조 교수 마음에 비로소 평화가 깃드는 거다.

<옥희의 영화>

하지만 놀아주는 단골 술집 마담과 마음껏 괴롭힐 학생이 있어도 교수는 외롭다. 얼마나 외로운가 하면 <뷰티풀 마인드>의 존 내쉬(러셀 크로)는 상상 속의 친구를 만들어서 함께 놀고 칭찬도 받을 정도다. 그래, 칭찬, 대학원생과 조교 시절 욕만 얻어먹으며 설움을 쌓다가 드디어 갑의 자리에 오른 교수는 칭찬이 고픈 존재. 본인이 교수여서 그런지 교수들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데 일가견이 있는 홍상수 감독은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미대 교수 문호(유지태)에게 학생들의 칭찬 세례를 퍼부어주지만, 그게 전부 꿈. “교수님 정말 멋있어요”, “교수님이 세상에서 제일 똑똑해요” 하는데 그게 전부 일장춘몽, 아니 일장동몽, 깨고 나면 외로움만 북풍처럼 몰아치는 한갓 겨울날의 꿈. 하지만 홍상수 감독은 이제 외롭지 않겠지.

교수가 외로운 건 학생들 탓이기도 하다. 역시 홍상수 감독의 영화인 <옥희의 영화>에서 송 교수(문성근)는 폭설이 내린 날 아무도 없는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기다리지만 기껏 수업 들으러 하나 온 게 자기 애인이다(애인이 학생). 나 같으면 얼씨구나 하고 술집이나 여관으로 가겠지만 송 교수는 왠지 기분 나쁨, 어찌나 기분이 나빴던지 산낙지를 씹지도 않고 먹었다가 산 채로 토하는 기적을 이룸. 그러고 보니 아무리 내 돈 내고 듣는 강의라고 나도 참 남 일하는 직장에서 경우 없이 많이도 잤구나. 따뜻한 스팀 옆에 앉아 고개 처박고 어찌나 퍼질러 잤던지 강사가 시험 보는 날 내 얼굴을 처음 봤대, 반가워하더라고.

<뷰티풀 마인드>

절대평가의 태평성대를 지나 상대평가가 일반화된 이후 그런 학생들은 사라졌다고 한다. 교수가 20분이나 늦게 와서 수업도 20분밖에 안 했다고 따지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여학생 같은 애들은 많아도. 하지만 여전히 교수는 무소불위의 권력이어서 대학원생들 사이엔 할 줄 아는 게 무엇이든 무조건 못하는 척하라는 (군대냐) 가르침이 전해지고 있다. 편집 기술이 있던 내 선배는 쓸데없이 예쁜 리포트를 냈다가 교수 환갑잔치 초대장을 디자인하는 걸로도 모자라 2년 뒤엔 그 남편 환갑잔치 초대장까지 디자인하고 있었다. 그 시절에 여자가 두살 연하하고 결혼했을 줄이야.

하지만 교수보다 무섭고도 외로우며 칭찬에 고파 노예를 찾아 헤매는 존재가 있으니, 그건 바로 교수가 되지 못한 박사다. 숱한 세월 교수하고 놀아주고 칭찬해주며 노예 노릇을 했는데 교수가 되지 못한 원한이 짐작이나 가는가. <전설의 고향>에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들이 나오는 건 이유가 있는 거다. 여우도 사람 되기 직전에 남자한테 한눈팔려 헛디딘 구미호가 최고로 무섭다고. 학계만 그런 것도 아니다. 손에 닿을 듯한 권력 부근에서 맴도는 사람들의 발악, 그리고 그들이 좌절한 이후에 보일, 박사 히스테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분노가, 나는 정말 무섭다.

가진 자의 취미생활

이무기가 여의주를 물고 교수로 승천하기 위해 필요한 두세 가지 것들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

영어

모든 박사가 교수인 건 아니지만 모든 교수는 박사라고 믿었다, 어느 교수가 학사모 쓰고 활짝 웃는 걸 보기 전까지는. “저 선생님 이번에 박사 땄대.” “공부 되게 좋아하나 봐? 무슨 박사 학위를 또?” “….” 알고 보니 오랜 세월 석사로 지냈던 그는 자기 분야 최고의 권위자였으나 논문자격시험에서 번번이 영어 과락을 거듭하던 끝에 더럽고 치사하다며 때려치웠지만 환갑을 눈앞에 두고 심기일전, 그 옛날 입시 치르던 정신력으로 영어를 공부해 시험에 통과한 거였다. “그럼 지금까지….” “석사가 박사 논문을 심사했던 거지.” 오직 영어 때문에, 한문은 엄청 잘하는데. 영어 못하면 어떻고 학위 없으면 어떻겠습니까, PDA도 못 알아듣는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의 조은숙 교수도 염색 가르치는 데는 아무 문제 없잖아요? 그냥 존재 자체가 문제여서 그렇지.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자금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금수저 유정(이나영)은 굳이 일하러 나오지 않는 편이 많은 사람 도와줄 것 같은 미대 강사로서, 성질도 더러워 그녀가 취미로 강사 하는 걸 취미로 강사 한다고 말했을 뿐인 동료들에게 있는 대로 신경질을 부리는 사람이다. 뭐, 구태여 정확하게 말하자면 취미라기보단 마냥 놀기 무안해서인 것 같긴 하지만. 로비할 돈이 없어서 교수 자리 놓친 <플란다스의 개>의 고윤주(이성재)가 봤으면 분명 복수했을 텐데.

<킨제이보고서>

지행합일의 정신

행하지 않는 지식은 쓸모가 없나니, 지행합일은 서양 교수들도 앞장서서 실천하는 덕목이다. 미국인들의 성생활을 집대성한 ‘킨제이 보고서’를 쓴 <킨제이보고서>의 킨제이 교수(리암 니슨, 킨제이가 세번이나 반복되다니 일부러 만든 라임 같군요)는 남자인 조교와 섹스를 함으로써 이성애자의 상당수가 양성애자라는 자신의 연구 결과를 손수 입증해 보인다. 이런 지행합일의 정신이라면 나도 공부해서 학계로 갈걸 그랬나 싶지만, 내 전공에서 지행합일을 이뤄봤자 독립운동가의 자손은 삼대가 가난의 구렁텅이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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