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터/액트리스]
[액터/액트리스] 나이 듦 이상의 자유 - <비거 스플래쉬> 레이프 파인즈
2016-08-02
글 : 우혜경 (영화평론가)
<비거 스플래쉬>

출연 2016 <헤일, 시저!> 2015 <007 스펙터> 2015 <비거 스플래쉬> 2014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2013 <인비저블 우먼> 2011 <코리올라누스: 세기의 라이벌> 2008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2005 <해리 포터와 불의 잔> 2005 <콘스탄트 가드너> 2002 <레드 드래곤> 1997 <오스카와 루신다> 1996 <잉글리쉬 페이션트> 1993 <쉰들러 리스트> 1990 <아라비아의 로렌스, 그 후의 이야기> 연출 2013 <인비저블 우먼> 2011 <코리올라누스: 세기의 라이벌>

목소리를 잃어버린 전설의 록스타 마리안(틸다 스윈튼)과 그의 연인 폴(마티아스 쇼에나에츠)이 인적 드문 이탈리아의 작은 섬 판텔레리아의 공항에서 누군가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다. 입국장 문 뒤로 수선을 떨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짜증 섞인 폴의 투정이 지나가면, 마리안을 보고 “당신 맞지? 그런 거지?” 라고 요란스럽게 외치며 한 남자가 등장한다. 덥수룩하게 얼굴을 뒤덮은 수염에 반쯤 벗겨진 머리, 촌스러운 양복 차림의 그, 레이프 파인즈다.

<비거 스플래쉬>에서 레이프 파인즈가 연기하는 해리는 마리안을 스타로 만들어준 음반 프로듀서다. 연인이었던 마리안을 폴에게 넘겼지만, 해리는 아직 마리안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림 같은 섬에서, (해리의 말대로) ‘판타스틱’( fantastic)하고 ‘섹시’(sexy)한 남자친구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집 안 곳곳에서 거침없이 사랑을 나누던 마리안 앞에 뒤늦게 ‘옛사랑’이 찾아온 셈이다. ‘옛’(old)이라는 말이 이보다 더 마침 맞을 수 있을까? 폴보다 더 멋있어도 모자랄 판에 해리의 모습은 애처롭기 짝이 없다. 얼굴에 잔뜩 내려앉은 주름들은 웃을 때마다 도드라지고, 맥없이 풀어헤친 셔츠 밑에 늘어진 살들은 보기 안타까울 지경이다. 이것도 모자라 해리는 롤링스톤스와 작업했던 ‘전설’의 앨범을 꺼내들고 녹음 당시의 에피소드를 신나게 떠들며 ‘추억팔이’에 나선다. 얼마나 이 이야기를 반복했던 걸까? 마리안은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해리의 이야기를 따라 중얼거리기까지 한다.

롤링스톤스의 <Emotional Rescue>에 맞추어 춤을 추는 모습은 두고두고 이야기될 만한 명장면이겠지만, 어딘가 한구석 무디고 둔해 중년 아저씨의 몸짓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어떻게 해도 이렇게 이야기 할 수밖에 없겠다. 해리는, 아니 레이프 파인즈는 ‘나이 들고(old)’ 있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직업은 감독이라고 누가 이야기했던가. <비거 스플래쉬>의 감독 루카 구아다니노는 영화에 ‘나이 들어가는’ 배우 레이프 파인즈를 ‘해리’라는 이름으로 전시한다. 연적이 되어버린 옛 친구(남성미 물씬 풍기는 마티아스 쇼에나에츠가 분한) 폴 앞에서도, 마리안이 그 존재를 알게 된 지 한달밖에 되지 않은 매력적인 딸, 페넬로페(다코타 존슨) 곁에서도, 도드라지는 건 고집스럽게 나이 들어가는 해리, 레이프 파인즈의 모습이다.

어느 배우가 세월을 피해갈 수 있으랴. 하지만 올해로 쉰셋, 영화 데뷔 24년을 맞이한 레이프 파인즈는 누구보다 호되게 나잇값을 치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잉글리쉬 페이션트>의 지적이고 우수에 찬 청년은 이제 머리가 벗겨지고 이마에 주름이 가득한 중년이 되었다. 그의 이름을 설명하는 수식어에서 <쉰들러 리스트>의 광기 어린 독일 장교, <퀴즈 쇼>의 야심만만한 퀴즈 쇼 챔피언, <어벤저>의 비밀첩보요원, 그리고 <콘스탄트 가드너>의 일과 사랑, 모두 놓치지 않는 외교관 등의 설명은 어느덧 사라졌다. 한동안 그 자리는 <해리 포터> 시리즈의 볼드모트가 채우기도 했다. “오랜 시간 분장실 의자에 앉아 있는 게 정말 너무 싫었다”며 불만을 토로한 적도 있지만, 영화의 엄청난 흥행과 함께 레이프 파인즈의 명성이 덩달아 올라간 것도 사실이다. 덕분에 모든 역, 모든 장르를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는 다재다능한 배우라는 평가도 덤으로 얻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그의 나이가 눈에 띄기 시작한 건 <007 스카이폴>부터였던 것 같다. 그는 M(주디 덴치)의 뒤를 이어 새로운 M으로 부임한다. 재미있는 것은 레이프 파인즈가 새로운 007로 거론되던 배우였다는 사실이다. “20여년 전 (여러 편의 007 시리즈를 제작했던 프로듀서) 앨버트 브로콜리와 이야기가 있었다. 결국 이야기가 잘되진 않았지만. 당시 그는 피어스 브로스넌에게 더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나 역시 준비가 안 돼 있었고. 만약 내가 했다면 최악의 제임스 본드가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말했던 그에게 돌아온 역할은 (이제) ‘본드’가 아니라 ‘M’이었다. 자신을 만든 M이 떠나고 그 자리에 레이프 파인즈가 들어왔을 때 본드(대니얼 크레이그)만큼 놀란 건 아마도 관객일 것이다. 1989년 <007 살인면허> 이후 처음 등장한 남자 M이어서도 그랬겠지만, 허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던 카리스마 넘치는 주디 덴치의 M과는 다르게 너무나 인간적이었기 때문이다. <007 스카이폴>에서 희미했던 레이프 파인즈-M의 캐릭터는 <007 스펙터>로 넘어오면서 확실히 자리를 잡는다. 그런데 새롭게 창조된 레이프 파인즈-M은 (‘대니얼 크레이그-본드’와 함께) 나이 들어가는 존재, 곧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불안한 존재처럼 보인다.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새로운 국가안보센터장인 C와 M이 복도에서 마주친다. C는 MI6가 폐지되어야 한다고, 그것이 ‘미래’(future)라면서, ‘당신은 아니에요’라고 말한다. 둘의 얼굴이 교차편집된 탓인지 아니면 대사 탓인지, 레이프 파인즈의 얼굴에 가득한 주름이 더 깊게 느껴진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본드를 연기하는 것보다) M을 연기하게 되어 더 행복하다”고 말한다. 2014년, 웨스 앤더슨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보기 전까지 그가 말했던 ‘행복’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레이프 파인즈는 이 영화에서 살인 누명을 쓰고 쫓기는 호텔 지배인 구스타브 역을 맡았다. 웨스 앤더슨 감독이 완성된 시나리오를 들고 와 어떤 역할을 맡으면 좋겠냐고 물었을 때 레이프 파인즈는 “큰 역할”(the big one)이라고 대답했다지만, 영화를 보고 있으면 웨스 앤더슨도, 레이프 파인즈도 구스타브가 그의 역할인지 알았을 것이다. 곱게 빗어넘긴 머리에 잘 정돈된 콧수염, 구김 하나 없이 잘 다려진 턱시도를 입은 레이프 파인즈는 어쩔 수 없이 <쉰들러 리스트>에서 그가 연기했던 나치 장교 아몬 괴트를 떠올리게 한다. 20여년이 지난 후, 레이프 파인즈는 (웨스 앤더슨의 도움을 받아)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통해 20년 전 자신(이 연기했던 인물)을 떠올린다. 지금 그는 과거의 화려함이 추억처럼 남아 있는 곳, 곧 허물어져버릴 도시, 주브로브카 공화국에 서 있다. 죄 없는 이들을 학살하던 아몬 괴트가 이젠 죄 없이 쫓기는 죄수 구스타브가 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자신이 돌보던 불법이민자 청년 제로가 기차 안에서 불심검문에 걸리자 그를 돕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장면은 묘한 감동을 준다. 극중 구스타브의 말처럼 그는 ‘도살장처럼 변해버린 이 세상에 희망을 보여주는 존재’, 20년 전 바로 그의 반대편에 서 있던 쉰들러가 했던 일을 반복하고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20년의 시간은 레이프 파인즈의 얼굴에 주름을 내렸지만, 동시에 그의 연기가 성숙할 수 있는 시간을 선물했다. 그는 이제 “20년 전 내 ‘스킨’(skin)보다 지금의 내 ‘스킨’이 훨씬 편하다”고 말한다. 그가 말한 ‘스킨’은 비단 나이 들어가는 ‘피부’만을 의미한 건 아니었으리라. <비거 스플래쉬>에서 젊은 시절의 세련된 외모를 절반쯤 잃어버린, 하지만 딱 그만큼, 아니 그 이상의 자유를 얻은 해리의 모습은 레이프 파인즈를 고스란히 닮아 있다.

<비거 스플래쉬>

호크니의 그림처럼

마리안의 집, 수영장에 해리가 알몸으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가라앉아 있다. 지중해의 따가운 햇살이 반사된 수영장 물이 반짝거린다.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만 같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이 영화의 제목 ‘비거 스플래쉬’가 데이비드 호크니의 동명의 그림에서 왔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혹시 이 그림이 궁금해 찾아볼 생각이라면, 찾는 김에 호크니의 1967년작 <Portrait of an Artist(Pool with Two Figures)>도 함께 찾아보길 권한다. 이 장면을 연기한 레이프 파인즈가 이 그림에서 얼마나 많은 영감을 얻었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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