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거자필반(去者必返)
2016-08-10
글 : 김혜리

※<제이슨 본>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제이슨 본>

아테네를 배경으로 한 <제이슨 본>의 첫 액션 세트피스는, 구제금융 찬반을 둘러싼 그리스 국민들의 시위와 뒤섞여 있다. 본은 의도치 않게 진압경찰과 충돌하고 물대포의 방향을 거꾸로 돌리며 전진한다. 군중의 깃발에 가려져 CIA 시야를 간간이 벗어나기도 한다. 세팀의 적을 차례로 격퇴하고 따돌리는 이 시퀀스는 <본 얼티메이텀>의 워털루역 장면과 탕헤르 추격전을 교배한 듯하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본 시리즈가 폴 그린그래스 감독을 처음 스카우트하게 만든 북아일랜드 시위 참사를 그린 영화 <블러디 선데이>의 엔터테인먼트 판본 같아 만감이 교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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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수가! 올여름 할리우드발 대형 속편 <도리를 찾아서>와 <제이슨 본> 사이에는 뜻밖의 평행이론이 성립한다. 두 영화 모두 전편이 세워놓은 기준치가 높고, 스튜디오 또는 감독과 배우의 이름값이 큰 기대를 조성했다. 내용에서도 줄긋기가 가능하다. 두 영화 모두 주인공이 일종의 기억상실증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이야기로, 러닝타임 대부분이 탈출이나 추격 시퀀스의 연쇄로 흘러가고 나머지 시간의 큰 몫은 플래시백에 할애됐다. 게다가 <도리를 찾아서>와 <제이슨 본>은 모두 안쓰럽게도 이미 전편(들)이 훌륭하게 완결시킨 스토리를 연장하려는 시도다. 6월29일 일기에 적은 대로 <도리를 찾아서>는 수준급 가족영화지만 전편 <니모를 찾아서>의 이야기를 넘어서거나 심화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제이슨 본>의 케이스는 조금 더 난감하다.

일단 <제이슨 본>이라는 제목은 선행 3부작을 통해 캐릭터로서 익숙해진 본의 인간적 면모를 더 파고들겠다는 예고처럼 들렸다. 이를테면 CIA 특수요원으로 개조되기 전 민간인 데이비드 웹으로서의 삶을 본격적으로 보여준다거나 하는. 그러나 베일을 벗은 <제이슨 본>은 우리가 이제 알 만큼 알았다고 생각한, 본이 어떻게 잔혹한 CIA 프로그램에 자원하게 됐는지에 대한 ‘핑계’를 하나 더 제시할 뿐이다. 그렇다면 근본으로 돌아가자는 투의 이 제목은, 그냥 초심을 회복하는 리부트 선언으로 읽어야 맞겠다. <제이슨 본>은 전편으로부터 영화로서는 9년, 타임라인으로 치면 12년 만의 이야기다(극중 시간상 3편 <본 얼티메이텀>은 2편 <본 슈프리머시>의 스토리 타임 중간에 이야기를 시작한다). 만드는 사람에게나 보는 사람에게나 이번 영화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본은 왜 돌아와야만 하는가?”다. 영화가 시작되면 여전히 두통에 시달리며 맨주먹 내기 권투 선수로 떠도는 본이 등장한다. 전편의 피날레에서 통쾌하게 헤엄쳐 떠나간 제이슨 본은 충격적이게도 12년 동안 전혀 잘 살지 못했다. 우울한 광경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싸움터를 떠난 본의 삶이 정체(停滯)돼 있다는 사실 자체가 속편의 꼬투리가 될 수는 있다. 전편의 파멜라 랜디(조앤 앨런)를 대체하는 캐릭터인 CIA 사이버 수사팀장 헤더 리(알리시아 비칸데르)는 “임계점에 이르면 무력감을 참지 못하고 조직에 복귀할 것”이라는 심리 관찰 보고서를 근거로 본의 CIA 복직을 내다본다. 정체성을 찾는 청년에서 막다른 골목의 중년으로 변모한 주인공에게 썩 그럴듯한 스토리다. 하지만 폴 그린그래스와 크리스토퍼 라우스의 각본은 이 모티브를 더 발전시키지 않는다. 본을 복귀시키는 나머지 두 계기는 CIA를 떠나 정보 공개 투사로 변신한 니키 파슨즈(줄리아 스타일스)의 손에 들려 영화 속으로 들어온다. 하나는 물론 2007년 이후 변화한 세계의 최대 이슈인- 그러나 영화 소재로는 약간 뒷북인- 디지털 네트워크를 통한 정보기관의 전방위적 사생활 침해 문제다. 니키는 CIA를 해킹해서 빼낸, 암살을 포함한 초법적 사찰 활동의 증거를 줄리언 어산지 같은 사이버 전사(빈첸즈 키퍼)에게 넘겨 정보기관원으로서 끼친 해악을 속죄하고자 한다. 나아가 본에게도 여기 동참하는 것이 인생을 구제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권한다. 한편 그녀가 입수한 데이터 중에는 데이비드 웹을 특수 프로그램에 자원하게끔 추동한 아버지의 죽음이 적국의 테러가 아니라 내부자의 음모였을 가능성을 암시하는 자료가 포함돼 있다. 12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건 회의주의자로 변한 우리의 주인공은 대의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대신, 아버지의 사인에 크게 동요한다. 물론 본은 니키와 같은 의견일 필요가 없다. 공동체와 관련된 일에서 손을 떼고 싶을 수도 있고, 그간 일어난 에드워드 스노든, 위키리크스 사건의 전말에 실망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건 <제이슨 본>은 중요한 어젠다에 대해 인물의 생각과 판단을 알 수 있는 장면을 만들지 못한다. “살아남는 것만이 중요해” 같은 선언적 대사뿐이다. 그러면서도 영화는 새로운 첩보 프로그램 아이언헤드를 둘러싼 CIA와 거대 소셜 미디어 기업의 뒷거래를 가장 중요한 서브플롯으로 끌고 간다. 두 사안의 책임자가 동일 인물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제이슨 본의 개인적 동기와 사찰 프로그램의 이슈는 영화 안에서 제대로 맞물리지 못한다. 그러다보니 결국 라스베이거스의 소셜 미디어 컨퍼런스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제3막에 이르면 본이 정확히 어떤 목표를 위해 그곳에서 위험한 일을 크게 벌이고 있는지, “클라이맥스가 필요해서” 외에는 이유를 떠올리기 힘들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본 시리즈는 이유가 없이는 인물이 움직이지 않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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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은 라스베이거스에 왜 갔을까? 물론 우리는 그가 악역과 독대한 장면에서 답을 본다. 그런데 이 행위 또한 우리가 아는 제이슨 본의 캐릭터를 벗어난다. <본 슈프리머시>에서도 <본 얼티메이텀>에서도 본은, 법을 초월한 정보기관의 전횡을 공론화하기 위해 누군가를 뒤쫓고 위협했다. 당사자를 죽이거나 사죄를 받는 일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 영화의 본은 사뭇 다르다. 12년 전보다 오히려 덜 성숙해 보인다. “이번에는 사감(私感)이다”(This time, it’s personal!)라는 <죠스2>의 카피를 <제이슨 본> 포스터에 얹는다 해도 무방할 것 같다. 본만이 아니다. 전작들에서 CIA 특수요원들은 아무 감정 없이 지령대로 동료에게 총구를 겨눴다. 그리고 상대를 원망하지 않는 얼굴로 쓰러져감으로써 이야기에 멜랑콜리를 더했다. 하지만 이번에 본을 쫓는 동료 요원은 받은 만큼 고통을 돌려주고 싶어 하는 철저한 네메시스다.

본은 언제나 말수 적은 히어로였지만 이번에는 대사를 다 합쳐 A4 한장은 될지 의문이다. 양이 문제가 아니라 짧은 말로도 인물이 무엇에 분노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적시했던 선행 3부작의 토니 길로이표 대사들이 아쉽다. <제이슨 본>은 지금까지 맷 데이먼이 출연한 네편의 본 영화를 통틀어, 본의 머릿속을 짐작하기 제일 어려운 에피소드다. 사이버 수사팀장인 헤더 리 역시 의뭉스러움이 지나쳐 진의를 끝까지 파악하기 힘들다. 아마 폴 그린그래스와 맷 데이먼은 새로운 <제이슨 본> 3부작을 이미 계획하고 ‘정당방위-복수-속죄’ 사이클을 다시 시작하는 중인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는 인물들의 궤적이 남긴 미진함을 설명하기 어렵다. <본 얼티메이텀>까지 본이 자기가 누군지 완전히 발견하지 못했다면, <제이슨 본>에서는 본이 누구인지 관객쪽에서 잘 모르겠다는 기분이 든다. 속편을 염두에 두지 않고 스스로를 완결지으면서도 캐릭터와 스토리에 풍부한 잠재력을 불어넣은 <본 아이덴티티>는 얼마나 훌륭한 1편이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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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슨 본>과 <도리를 찾아서>와의 마지막 공통점은 영화의 톤을 넘어서는 액션 클라이맥스다. 문어 행크가 트럭 핸들을 잡고 역주행해서 가드레일을 뚫고 점프하는 <도리를 찾아서>의 막판 장면은 픽사 스타일이 아니다. 드림웍스나 블루 스카이 영화의 한 장면 같다. 언제나 메인 스토리가 설정한 만큼의 환상성 수위를 지키고 클라이맥스 소동 중에도 중심 갈등을 끌고 가던 전통으로부터 이탈이다. <제이슨 본>의 라스베이거스 카체이스도 유사한 잔맛을 남긴다. 두 인물의 살아남으려는 몸부림을 보여주는 데에 그치지 않고, 험비가 도로의 차들을 양쪽으로 날려보내고 카지노 실내로 돌진해서야 만족하는 이 시퀀스는 막판에 이르면 스펙터클 자체를 즐기고 있다. 여기에 결여된 것은 <본 슈프리머시>의 모스크바 카체이스나 베를린 시가지 탈주에서 우리가 보았던 제이슨 본의 얼굴, 본능과 테크닉을 총동원해 죄의식으로부터 도망치다가 그래도 끝내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고, 다음에 해야 할 일을 하러 돌아서는 표정이다.

<비거 스플래쉬>

좋 아 요

묵언 연기

틸다 스윈튼은 본인의 작업을 ‘액팅’보다 ‘퍼포먼스’에 가깝다고 말하는 배우다. 양성성의 아이콘으로서 스크린 중앙을 차지한 <올란도>나 알아볼 수 없는 분장으로 앙상블에 스며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설국열차>가 대표적인 예다. 성대질환으로 말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 록스타 마리안으로 분한 <비거 스플래쉬>는 그녀의 최신 실험이다. 대사라는 도구를 반납한 틸다 스윈튼은 눈과 팔다리, 그리고 의상으로 대화와 독백을 대체한다. 중독과 환락의 젊은 날을 뒤로하고 조용한 생활에 안착한 로커 마리안의 얼굴에는, 오욕칠정을 겪고 관용에 도달한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의 뱀파이어나 <올란도>의 불로영생 주인공과 닮은 표정이 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틸다 스윈튼의 클로즈업을 탐닉한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좀처럼 성에 차지 않았는지 이집트풍의 아이라인까지 더했다. 물론, 뭔가 그려보고 싶어지는 얼굴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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