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에게 물었다. 난 이제 겨우 서른일곱살이야. 인생의 영화라니, 좀 가혹하지 않나. 영화를 즐겨보진 않지만 앞으로 만날 영화가 족히 100편은 될 것이다. 친구가 대답했다. 아홉살에게도 인생이 있는걸. 그렇지, 그건. 두꺼운 책 하나가 앞에 놓인 기분이었다. 군데군데 해진 곳도 있고, 몇몇 군데는 귀퉁이가 접히기도 한 그런. 꽤나 멋진걸. 그런 생각을 했다. 파올로 소렌티노 감독의 <그레이트 뷰티>가 떠오른 것은 그 때문이었다. 어떤 당위도, 논리적 연계도 없이 떠올랐지만 분명, ‘그 때문’이었다.
집요하게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아무 때, 아무 곳에서나 찾아드는, 회상(回想)이다. 나는 잔디밭, 이라기보다는 잡초들 위에 누워 있고, 살포시 잠이 들었나. 내 생일이었다. 왜 혼자 누워 있을까. 기억이 나질 않는다. 멀리 친구들이 놀며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생일파티에 초대받은 특별한 이들이다. 그중 하나는 내가 좋아하는 여자애다. 그 애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아니 그것만 들린다. 배가 따뜻하다. 그로부터 비롯된 온기가 몸 이곳저곳으로 퍼진다. 감은 두눈이 환하다. 모두 같다. 동일하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 좋구나.
얼마 전 예순다섯이 된 젭 감바르델라에게는 바다가 있다. 십대의 바다다. 그곳에는 눈부신 청춘과 강인하고 싱그러운 생명력 그리고 그의 아름다운 첫사랑이 있다. 그의 침실 천장에서 늘 일렁이고 있는 그 바다가 왜 자꾸 반복해서 몸을 드러내는지 젭은 알 수 없다. 회한도 그리움의 영역도 아니다. 그래서 그는 궁금하다. 이유를 알고 싶다. 나는 그렇게 읽는다. 젭에게는 성공적인 삶이 있다. 단 한권의 소설로 유명 작가가 되었으며, 최상위 사교계에서 활동하는 유명인이다. 원할 때마다 화려한 파티를 열 수 있는 명성과 재력을 가지고 있고, 그의 주변에는 그와 진심 어린 우정을 나누고 싶어 하는 이들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그 바다는 자꾸 그의 천장 위에서 일렁인다. 기억 속 장면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알고 싶다. 저 바다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회한이라고, 쉽게 치부해버릴 수도 있겠지. 화려한 삶 뒤에는 언제나 그런 것이 숨겨져 있을 거라고 짐작하니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 영화는 결국 시간의 중력 바깥으로 나서지 못해 헤매는 성공한 노인의 불우한 방황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게 될 터이다. 나는 이 영화를 그렇게 읽지 않는다. 회한은 답이지 질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젭은 질문한다. 끊임없이. 그의 질문은 단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입니까.
질문은 도처에서 재기된다. 그가 걷는 로마의 새벽에, 성벽에 온몸을 던져 ‘진동’을 얻고자 하는 (어리석은) 행위 예술가에게, 코끼리를 단숨에 사라지게 하는 마술사에게, 상위 1%만 드나들 수 있는 미술관 속에서, 사랑의 감정 속에, 일생을 신께 바쳐 자기희생을 감행한 수녀에게, 어느 날 베란다로 찾아온 홍학 무리의 모습에도.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듯 답은 없다. 그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젭이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바닷가. 그 십대의 바다가 있었던 곳.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십대의 바다는, 그 젊음과 사랑은 오래전 사라져버렸다. 그의 질문과 답은 그가 죽을 때까지 사라질 듯 사라지지 않고, 이를 테면 천장 같은 곳에서 끝없이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누워 있는 잔디밭. 나를 살아 있다고 믿게 만드는 그 봄날의 볕. 앞도 뒤도 없이, 서른일곱의 나에게도 여전히 찾아들고, 운이 좋아 예순다섯을 맞이할 수 있다면, 그때도 찾아올 그것을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평생을 서성이며 쫓아다니게 만들 그 위대한 아름다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