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집>의 태석(재희) 이래 최고의 영화적 은신술 아닐까? <마이 리틀 자이언트>의 거인은 새벽 런던 거리를 사람들 눈을 피해 돌아다닌다. 키가 7m인데 눈에 띄지 않는다니 대체 가능한 일인가 싶지만, 스필버그 감독과 배우 마크 라일런스, 그리고 애니메이터들은 영화 도입부 거인이 귀가하는 과정을 통해 비결을 아름답게 보여준다. 거인은 일단 빠르고 조용한 바람처럼 움직인다. 위기가 오면 키 큰 나무들 사이에 끼어들고, 동상인 척 가장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필살기는 실루엣을 조작할 수 있는 망토. 망토를 이용해 거인은 벽의 일부가 되고, 밤의 어둠 속으로 녹아들어간다. 그림자로 변해 존재를 지우는 셈이니 <빈 집>의 태석이 보여준 신공과 비슷한 데가 있다.
08/05
착한 아이 콤플렉스 따위 저만치 내다버린 로알드 달의 이야기들은 아무래도 스티븐 스필버그보다 팀 버튼 계열의 감독에게 어울리는 원작으로 보인다. 하지만 <E.T.>(1982)와 같은 해에 세상에 나온 후기작 <내 친구 꼬마 거인>(The BFG)은 처음부터 스필버그가 충분히 손 내밀 만한 이야기다. 마음 고운 거인과 현명한 여왕이 등장하고 깔끔한 해피엔딩까지 완벽하다. 그런데 <E.T.>의 시나리오작가 멜리사 매터슨(1950~2015)이 각색한 영화 <마이 리틀 자이언트>는 예상을 앞지른다. 이 전체 관람가 가족영화는 스필버그의 어떤 전작보다 센티멘털리즘을 세심히 통제하며, 나아가 로알드 달의 원작 <내 친구 꼬마 거인>보다 더 담담한 피날레에 도달한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스파이 브릿지> 등 기념할 만한 오프닝을 다수 연출한 스필버그답게 <마이 리틀 자이언트>의 도입부도 유려하다. 런던의 고아원에서 다른 원생들과 한 침실을 쓰며 살아가는 소피(루비 반힐)는 새벽 3시가 오면 건물의 당당한 주인이 된다. 아이들을 보호하는 방법이라곤 문을 꽁꽁 걸어 잠그는 법밖에 모르는 원장까지 잠들고 고양이만 깨어 있는 시각, 소피는 우편물을 정리하고 건물을 둘러보고 창 밑에서 소란 피우는 취객 아저씨들까지 따끔하게 타이른다. 그리고 이불 속에서 손전등으로 찰스 디킨스의 <니콜라스 니클비>를 읽는다(<니콜라스 니클비>는 원작에서는 거인이 글을 깨우친 책으로 나오지만 영화에서는 소녀를 통해 거인의 손에 들어가는 것으로 바뀌었다). 감독의 전작 <칼라 퍼플>(1985)의 주인공 역시 디킨스의 소설로 글을 깨우친 바 있다. 가족이 없다는 사실도, 심한 불면증도 소녀를 의기소침하게 만들진 않는 기색이다. 다만, 스필버그는 인형의 집 침실을 들여다보는 소피의 얼굴을 찍어, 소녀가 독방을 소망하고 있음을 암시한다(이 숏은 나중에 거인이 꾸며준 작은 방에 소녀가 들어가는 장면과 흐뭇한 짝을 이룬다). 거인의 등장은 길모퉁이에서 튀어나오는 거대한 손부터다. 감독은 엎어진 쓰레기통을 굳이 일으켜세우는 그의 손가락만으로 성격의 힌트를 준다. 곧이어 동일한 손이 창으로 불쑥 들어와 담요째 소피를 집어가는 숏은, 글자 그대로 아름다운 악몽이다. 오랜만에 극장에서 순수하게 소름이 끼친 순간이었다. 고양이로부터 시작해 훨씬 큰 인간 소피로, 다시 소피보다 예닐곱배 큰 거인으로 은연중에 줌아웃해가는 이 영화의 도입부는, ‘리틀’ 자이언트와 소피가 거인 나라에 도착했을 때 더 커다란 아홉 거인들을 만남으로써 완결된다. 그러나 <마이 리틀 자이언트>는 스케일 도표를 관객에게 각인시키는 데에 만족하고, 도입부 이후로는 같은 종족에 속하는 인물끼리의 관계를 그릴 때와 다름없이 접근한다. 사라져가는 소인족의 운명이 테마였던 <마루 밑 아리에티>와 달리 캐릭터의 몸집과 시야 차이에서 나오는 에피소드는 이 영화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다.
08/06
<마이 리틀 자이언트>는 제목대로 거인과 소녀에게 배타적으로 집중된 이야기다. 고아원 장면에서 원장과 친구 원생들은 거의 비치지 않고, 런던 밤거리는 쥐 죽은 듯 고요하며, 아홉명의 사람 먹는 거인을 포함한 조연들은 필요한 기능만 딱 수행한다. 두 캐릭터의 몸집 외에 리틀 자이언트를 규정하는 속성은 말투다. 예를 들어 “내 말이 맞니?”(Am I wrong?)라는 질문을, 거인은 “내가 맞는 쪽인다? 틀린 쪽인다?”(Is I right or left?)라고 표현한다. ‘인간콩’을 잡아먹는 육식주의자 동족들을 막지 못했다는 죄의식 외에 책 읽기와 이야기를 사랑하는 이 거인을 가장 속상하게 하는 일은, 학교에서 배운 적이 없어 문법과 발음을 자꾸 틀린다는 거다. 처음에 따박따박 실수를 지적해 거인을 상심시켰던 소피는, 서서히 거인의 유일무이한 화법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급기야 아저씨의 말이 아름답다고 느끼게 된다. 한편 거인은 별의 음악, 꿈의 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최고의 청자다. 요컨대 소피와 리틀 자이언트의 우정은 경청을 통해 맺어진다. 원생들이 말을 안 들으면 그저 문을 닫고 가둬버렸다는 고아원장이나, 소녀를 “거짓말쟁이”라고 불렀던 친구들과는 이루는 데에 실패했던 관계다. 리틀 자이언트는 중간적 존재라서 고독하다. 거인들 틈에서는 지나치게 세련된 괴짜이지만 영화 후반부 방문한 버킹엄 궁전에서는 식탁 매너에 서툰 촌뜨기다. 인간콩들의 나라에 가면 너무 큰 괴물인데 거인 나라에서는 약골이라 놀림받는 꼬마다. 생각해보면 거인의 내 맘대로식 문법과 발음은 대화 상대와 고쳐줄 친구가 없는 독학의 결과이기도 하다(거인은 소피 이전에 사귀었던 인간 소년에게서 ‘BFG’(Big Friendly Giant)라는 애칭을 얻고 영어를 배웠으나 어느 날…). 마크 라일런스는 개그에 가까운 대사에도 불구하고 거인을 우스꽝스럽거나 그로테스크한 캐릭터로 끌고 가지 않는다. 그가 표현하는 거인은 총천연색 환상성에 감싸여 있음에도, 다른 무엇이기에 앞서 고독하고 후회하는 어른이고 포기하지 않는 노인이다. 원작에는 없고 영화에만 들어 있는 반복적 대사는 “뭐라도 해야만 하는구먼”이다. 이 배우의 상냥한 주름과 쓸쓸한 눈빛은 퍼포먼스 캡처의 필터를 뚫고 심금을 건드린다.
선한 거인과 스필버그 감독의 유비(類比)는 거의 불가피할 만큼 눈에 띈다. 거인은 인간을 잡아먹는 동료들의 죄를 나름 대속하고자 공기 중을 떠도는 꿈을 채집해서 잠든 사람들에게 불어넣어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조향사나 제빵사처럼 서로 다른 꿈을 조합해 새로운 꿈을 창조해낸다. 육식 거인들의 괴롭힘을 견디며 동굴 작업실을 지키는 거인의 모습에는, 상업영화와 예술영화 양쪽으로부터 “그런 영화를 뭣하러 만드냐”, “좀더 대단한 것을 만들어라”라는 속삭임을 들으며 “그냥 내가 하는 일을 하도록 내버려둬”라고 대꾸하는 스필버그 본인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그가 만든 스튜디오 이름이 드림웍스였다는 점도 아귀가 맞는다. 거인은 꿈을 통해 오직 행복을 퍼뜨리고 싶어 하지만, 정작 <마이 리틀 자이언트>에서 중요한 것은 악몽들이다. 그리고 스필버그는 본인의 영화 작업은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한 공포에서 원동력을 찾는다고 늘 말해왔다. 홀로코스트, 외계 침입에 의한 절멸, 거인에게 잡아먹히는 아이들. 스필버그가 괴로워하면서도, 아니 괴로웠기에 줄기차게 스크린에 투사해온 악몽들이다. <마이 리틀 자이언트>에서 이 노장은 구원의 불가능성에 대한 두려움도 표명한다. 극중에서 거인이 소피에게 가장 끔찍한 악몽의 예로 드는 것은 “네가 한 일은 돌이킬 수 없고 용서받을 수 없다”고 들려주는 꿈이다.
좋 아 요
인터뷰어의 로망
잡지의 스타 인터뷰가 자주 취하는 형식은 ‘우연한 근거리 관찰기’다. 요컨대 다음과 같은 수순이다. 약속된 카페에 매우 편안한 차림으로 나타난 스타가 “우리, 같이 어디 갈래요?” 하더니 홍보팀을 따돌리고 조수석에 기자를 앉힌채 드라이브를 시작한다. 기자는 당황하지만 스타의 소탈하고 거침없는 모습을 독자에게 전하는 행운을 누린다. <마일스>의 <롤링스톤> 기자 데이브(이완 맥그리거)가 마일스 데이비스(돈 치들)와 겪는 에피소드는, 인터뷰어가 품을 수 있는 로망의 전형적 결정체다. 초인종을 누르자마자 주먹이 대답으로 날아오는 출발은 험악하지만, 인질 신세로 레코드 회사까지 끌려갔다가 특종이 될 만한 온갖 긴요한 정보를 주워듣는다. 나아가 비밀까지 공유한다. 위험한 소동에 휘말린 데이브의 얼굴에는 내내 메모하고 싶어 죽겠다는 조바심이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