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마녀의 도(道)
2016-08-29
글 : 김정원 (자유기고가)
<마녀 배달부 키키> <마녀사냥꾼> <마녀의 관> 등으로 본 마녀의 도(道)
<마녀 배달부 키키>

국립국어원 발간 표준국어대사전이 정의한 바에 따르면 스승의 날은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되새기고 그 은혜를 기념하기 위하여 정한 날”이다. 하지만 대부분 평범한 한국인에게 스승의 날이란 이런 거다. 지금으로부터 십수년 전에 스승으로부터 당했던 모진 일들을 되새기고 그 원한을 기념하는 날. 올해도 우리는 스승의 날을 맞이해 도란도란 수다를 떨며 이런 진상 만난 자 있으면 나와보라는 배틀을 벌였는데, 그중 으뜸은 이분이었다, 부산 XX고등학교 교련 교사 맘보.

군인 정신 충만한 해병대 출신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라틴의 흥이 넘쳤던(지휘봉과 더불어 엉덩이를 흔들면서 교내를 탐색하던 뒤태가 그냥 맘보였다고) 맘보는 매우 애착을 보이는 대상이 하나 있었으니, 삭발한 학생이었다. 전교생이 군인되는 세상을 꿈꿨달까…. 야간자율학습 감독을 맡은 날이면 맘보는 세상없이 즐거웠다. 애들 머리 마음껏 깎을 수 있거든.

졸거나 딴짓하다가 맘보에게 걸리면 교실 끝에 서서 칠판에 그린 과녁을 향해 분필을 던졌고, 과녁을 맞히지 못하면 맘보가 상비하고 다니던 바리캉으로 그 자리에서 삭발을 당했다. “그래서 고등학교 3년 내내 공부 안 하고 분필 던지기 연습하다가 재수했잖아.” 그런데 말이다, 너네 학교 애들이 몽땅 재수한 건 아닐 텐데 말이다. 우리는 하도 삭발을 당해서 그런지 중년에 들어서고도 여전히 무성한 머리숱을 자랑하는 (머리 밀면 머리숱 많아진다며)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지역을 막론하고 맘보와 같은 사람들을 일컫는 호칭은 이렇다, 남자라면 ‘개’자가 들어가면 되고, 여자라면 대충 마녀 정도. 우리 학교에도 하나 있었다. 애석하게도 맘보에겐 패했지만 좌중으로부터 만만치 않은 호응을 받았던 우리 학교 마녀, 그녀는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국립국어원 발간 표준국어대사전 이르기를 “악마처럼 성질이 악한 여자”라 불리게 되었을까.

그녀는 가사 선생님이라며(가사 선생님이면 가정교육과 나왔겠지 의상학과 나왔겠는가) 학교 교복 디자인의 대업을 맡아 그걸 남보라색, 다시 말해 가지색으로 디자인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진정한 마녀가 되기에 부족했다. 그녀는 분발했다. 분발해서 스타킹을 톤앤드톤으로 맞추고 블라우스색을 연노랑으로 지정했다. 가지색 재킷과 가지색 스타킹에 연노란색 블라우스라면 안색이 백지장 같이 하얀 케이트 블란쳇이 입어도 그냥 가뭄 맞은 가지에 소금 뿌린 것 같을 테지만 그녀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얼굴 하얀 애들이 입으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을 코디인데 너네는…, 쯧.” 아, 네, 선생님 얼굴이 하얗기는 한데 그거 파운데이션 떡칠해서 그런 거잖아요. 우리가 떡칠하면 상담실로 끌고 가서 고문할 거면서.

그 시절 우리는 저런 마녀는 되지 말자고 다짐했다. 저 나이에 시집도 못 가고 레이스 달린 치마나 펄럭이고 다니면서 보글보글 파마한 머리를 풀어헤친 저런 마녀… 가 나네. 응, 나야 나, 심지어 이젠 나이도 동갑. 그러고 보면 <이스트윅의 악녀들>에 나오는 여자들도 마녀가 되면서 머리가 꼬불꼬불해지던데 비싸서 못해본 매직볼륨이라도 해볼까. 그런데 그럴 거면 그 비싼 디지털 펌은 왜 했을까. 맞다, 그 여자들도 셋 다 중년 싱글이었지.

그래서 나는 마녀의 도(道)… 라기보단 스타일을 탐구해보기로 했다. 따라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피해가려고. 안 그래도 설움투성이 노처녀, 마녀 소리는 듣지 말아야지.

일단 마녀는 대부분 검은 옷을 좋아한다(나도 검은 옷 무척 많음, 옷도 사야 하나). 검은 고양이를 데리고 다니는 경우가 많고 심지어 영혼이 몸을 떠나 마녀들의 잔치인 사바트에 놀러갔다가 동이 틀 때까지 돌아가지 못하면 몸은 죽고 영혼은 고양이가 된다고 하는데… 우리 집 고양이는 무슨 이유로 검은색인 거지, 머리에 뿔도 있는데. 아무리 잘라줘도 자꾸 뿔이 돋아서 이러다가 꼬리 달고 삼지창 들고 나타나 사람 말을 하는 건 아니겠지 했지만, 아, 꼬리는 원래 있구나.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마녀 취급을 받는 건 아니다. 검은 고양이와 짝을 이룬 <마녀 배달부 키키>의 키키는 마녀 취급을 받지 않고 그냥… 호구 취급을 받는다. 어디 시골에서 올라온 동네 호구, 아무거나 시켜도 그렇게 열심일 수가 없지. 아아, 그냥 마녀가 될까. 그러잖아도 자꾸 1인분 주문에 2인분 같은 양이라거나 미국산 소고기 가격에 한우 퀄리티 원고를 내놓으라는 고객들한테 시달리고 있는 나로서는 차라리 화형당해버릴까 고민하고 마는 것이었다.

<마녀사냥꾼>

실제로 40명의 여자가 마녀로 고발당해 그중 12명이 화형당한(남은 28명 중 5명은 그전에 벌써 죽었다고) 스페인 나바라 지방의 마을 수가라무르디가 배경인 영화 <마녀사냥꾼>에서 친척 마녀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충고한다. 음란하게 놀고 거짓말하고 마음껏 바람 피우렴, 남자가 (사랑한다고 매달리며) 두눈으로 바라보면 그냥 뽑아버려.

우리 친척들이 이랬으면 8월15일 새벽에 인터넷 접속해서 고속버스 예매했을 텐데. 근데 나는 누가 충고하지 않아도 이미 음란하게 놀…, 아, 이건 오타. 어쨌든 친척도 아니고 계모도 아닌 친엄마가 그러다 혼자 늙어 마귀할멈 된다며 이혼남하고 선보는 자리를 덥석 받아 무는 신세가 대한민국 노처녀의 현주소다. 아니, 이혼남하고 선을 볼 수도 있겠지만 아침밥 안 준다고 이혼한 남자는 좀 그렇잖아. 엄마도 나한테 아침 안 줬으면서.

<마녀의 관>

영화 <마녀의 관>은 마녀가 귀신보다 무서운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귀신은 이유나 있으니 달래주기라도 하겠지만 마녀는 이유도 없이 들러붙어 떨어질 줄을 모른다고. 그런데 이건 어떨까. 아무 이유가 없다면 들러붙지도 않을 거라고. 이게 기사라는 걸까, 남들은 사무실에서 눈치보며 몰래 하는 블로그를 월급 받고 해보자는 걸까, 아니면 삶의 목표이자 보람으로서 이런 잡담 한 길에 매진하자는 걸까. 후배의 기사를 받아들고서 고뇌하는 내 미간에 마녀의 주름이 잡힌다. 내가 노처녀라서 이러는 게 아니야, 이유가 없으면 마녀가 되지 않는다고.

마법보다 강한 돈의 힘

겉보기만이라도 마녀 아닌 척하기 위해 필요한 두세 가지 스킬

<가위>

하얀 옷

어릴 적부터 마녀라는 시골동네 헛소문에 시달렸는데 알고보면 마녀가 맞는 것도 같은 <가위>의 은주(하지원)는 신분 세탁을 하고 어릴 적부터 집착했던 혜진(김규리) 앞에 나타나면서 옷도 세탁한다, 하얀 옷으로. 그러고 나오니까 순식간에 캠퍼스 요정 취급, 아무리 십몇년 만에 만났다지만, 단짝도 몰라보는 메이크오버. 그런 그녀를 알아보는 건 동네 검은 고양이뿐이다. 그래, 마녀라면 역시 검은 고양이지. 근데 은주는 무슨 돈으로 메이크오버하고 등록금 냈을까. 그러잖아도 말이 안 되는 대목이 많았던 것 같은 <가위>가 남긴 또 하나의 미스터리다.

<이스트윅의 악녀들>

좋은 집

<이스트윅의 악녀들>의 악마 대릴(잭 니콜슨)은 고양이 집사 노릇 하는 마녀 팔자와는 다르게 본인이 집사 거느리고 사는 백만장자다. 저택에 살면서 벤츠 모니까 주술 쓸 필요도 없이 동네 최고 싱글 여성 셋을 동시에 한번에 낚아올리는 악마씨(나중에 집사 포함 재산 몽땅 뺏기지만). 똑같이 마법 쓰는 <호커스 포커스>의 마녀들은 오두막에 처박혀서 가마솥 젓고 있으려니 한눈에 마녀라고 알아보겠던데, 마법보다 강한 게 돈의 힘이다.

<마녀>

공부

마녀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영화 제목이 그러니까 일단 마녀라고 치고 보는 <마녀>의 세영(이미소)은 풍지박산이 아니라 풍비박산이 맞는 말이라는것도 아는 박학다식한 마녀다. 그렇게 이 취업난의 시대에 취업 성공, 마녀도 배워야 산다. 하지만 “신입 뽑을 때 정신감정도 해봐야 한다”는 후회를 낳지. 영화 보고 싶을 때 보라고 추천은 못하겠지만 면접 보기 전에 반드시 봐야 할 영화이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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