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터/액트리스]
[액터/액트리스] 허물어지지 않는 기품 - 이드리스 엘바
2016-08-30
글 : 이예지
<옵세스>

초록 외계인의 특수분장에도 가려지지 않는 기품이라니. <스타트렉 비욘드>의 메인 빌런, 크롤은 구시대 전쟁영웅이었으나 평화를 얻은 뒤 버려지자 비뚤어져서 살의를 키운 캐릭터다. 초록 분장보다도 보기 흉한 건 그의 ‘어버이연합’스러운 사고방식에 ‘중2병’스러운 인정욕구의 결합일 터인데, 그럼에도 근본 없는 괴물처럼 보이지 않는 건 오로지 배우 이드리스 엘바의 공이다. 외계인 분장이 걷어지고 마침내 발타자르 에디슨 함장의 모습이 드러날 때, 그는 괴물 뒤에 자리한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며 만면에 감정을 싣는다. 떡 벌어진 어깨에 두툼한 손과 발을 지닌 190cm의 거구이지만, 그윽하고 선한 눈에서는 풍부한 감정들이 쏟아져나온다. 악당임에도 잠시 캐릭터에 대한 혼란에 빠지게 되는 대목이다.

탄탄한 몸과 섬세한 얼굴, 보기만 해도 든든한 이 영국 출신 미남자는 단단한 위압감과 품위를 지녔다. 추운 겨울에 넉넉한 모직코트를 휘감고, 두터운 양장본 서적을 품에 그러안았을 때 느껴지는 것과 비슷한 안정감이랄까. 마치 타고난 것처럼 보이는 중후한 남성미와 신사다운 기품으로 그는 차기 007 후보로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소니픽처스 해킹 사건 당시, 소니의 공동회장인 에이미 파스칼이 컬럼비아픽처스의 전 부사장 엘리자베스 캔틸런에게 “이드리스가 반드시 다음 본드가 되어야 한다”고 한 메일이 공개돼 더욱 힘을 실었다. 그러나 007 원작자인 앤서니 호로비츠는 이드리스 엘바가 제임스 본드를 맡기엔 “too street”하다고 표현해 찬물을 끼얹었다.

33영국식 악센트에 중후한 인상까지 도무지 ‘스트리트’(거리의, 거칠고 세련되지 않은)한 구석을 찾을 수 없는 이드리스 엘바이기에 그 말은 인종 차별적 발언으로 비판받았고, 원작자는 사과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드리스 엘바는 단 몇줄의 문장으로 그의 품위를 드러내 보였다. “웃읍시다. 그건 에너지도 들지 않고 누굴 다치게 하지도 않아요. 바로 그 ‘스트리트’에서 배운 겁니다.”

의외의 사실이지만, 관습적인 은유로 말하자면 이드리스 엘바는 ‘스트리트’ 출신이 맞다. 스스로를 종종 ‘이스트런던보이’라고 말하는 엘바는 런던 동부, 캐닝타운 출신이다. 시에라리온 출신 아버지와 가나 출신 어머니를 둔 그는 국고 지원금을 받아 국립 청소년 극단에 입단했지만 생활은 어려웠다. 타이어 기술자, 점원, 용접공, 클럽 DJ로 일하며 각종 TV드라마의 오디션에 지원한 그는 1994년 <스페이스 프리싱크트>에서 ‘핫 딜리버리’를 외치며 싱긋 웃는 우주의 피자배달부 역을 맡아 데뷔했다. 주로 흑인에게 정형화된 단역들을 맡았던 그는 가능성을 찾아 미국 뉴욕으로 향했지만, 브루클린 생활도 만만치 않았다. 월세를 내지 못해 차에서 생활하며 오디션 공고를 뒤지던 그는 덴젤 워싱턴과 웨슬리 스나입스의 사진을 보며 “할 수 있다. 그들이 있는 곳에 나도 갈 수 있어”라고 되뇌었다. 그에게 연기 인생을 열어준 건 <HBO> 드라마 <더 와이어>였다. 갱단의 2인자인 스트링어 벨은 정치자금을 끌어오고 부동산을 사들이는 야망을 지닌 인물이다. 엘바는 “나는 사기로 돈을 버는 곳에서 자랐다. 스트링어 벨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세계 안에 있는 인물이었다”고 회상했고, 신인답지 않은 노련한 연기는 대중에게 그의 얼굴을 각인시켰다.

그가 거쳐온 세계에서의 경험은 그에게 마초적 위계에 대한 통찰과 숙련성을 부여한 모양이다. 이후 <루저스> <락큰롤라> 등에서 조직의 하수인 내지 부하 역을, <28주 후>에선 바이러스에 노출된 이들을 몰살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스톤 대령을 맡은 그는 리더부터 부하까지 남성적 위계질서 속 어떤 배역이든 제 옷처럼 능숙하게 소화했다. 그를 셀러브리티로 도약시킨 2011년 마블영화 <토르: 천둥의 신>의 헤임달 역시 질서에 대한 이해에 기반한 캐릭터다. 제자리에서 과묵하고 충직하게 제 역할을 해내는 문지기 헤임달은 여느 왕보다도 위엄이 넘친다. <프로메테우스>의 자넥 선장도 자신이 맡은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는 점에서 한 궤에 있다. 자기 분수를 넘지 않는 그는 오로지 프로메테우스호의 항해만을 생각할 뿐 인간의 탄생 배후엔 관심조차 없지만, 직관적이고 정의롭다. 모두 제 역할을 정확히 알고 있는 데서 비롯되는 품위다. 리더와 권력자 역할도 마찬가지다. <퍼시픽 림>의 스태커 장군은 그가 자기 확신과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라는 배역과 얼마나 적절히 어울리는지 보여준 영화이며, <정글북>의 제왕, 호랑이 쉬어칸은 그가 오로지 목소리만으로도 어떤 위압감을 줄 수 있는지 알려준 배역이다. 말할 것도 없이, <만델라: 자유를 향한 여정>에서는 진정한 지도자의 모습을 연기했다. 외적으로 넬슨 만델라와 닮지 않은 그는 만델라의 억양과 발음까지 모사하며 최대한의 근사치를 만들어냈고, 부러 결함을 더해 아우라와 인간미가 공존하는 그만의 만델라를 구현했다. 어느 위치에 있다 해도 그의 단단한 거구는 시선을 확보하고, 여러 감정을 담아내는 호소력 짙은 눈은 그의 배역에 늘 인간적 온기를 선사한다. 그럼으로써 마지막까지 시선을 떼기 어렵게 만들곤 하는 것도 그의 장기다.

이드리스 엘바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그에게 제22회 미국배우조합상 영화부문 남우조연상을 안겼고, 그가 후보에서 제외돼 ‘화이트 오스카’ 논란을 점화시켰던 <비스트 오브 노 네이션>이다. 소년병 아구의 시선으로 그려낸 반란군 사령관은 이중적이다. 아구의 구원자이자 착취자인 그는 그 위에 누구도 군림하지 못할 것처럼 하늘 같은 사령관이지만, 정작 최고사령관 앞에서는 그 위엄을 잃는다. 부하들 앞에서 최고사령관에게 모멸을 당한 그는 이 ‘모냥 빠지는’ 상황에서 아무렇지 않은 양 굴지만 기묘하게 일그러진 표정을 짓는다. 어느 계급의 배역을 맡아도 꼭 맞는 부속처럼 자신을 위치시켰던 그는 전복되며 양면성을 드러낸다. 그 모순된 얼굴에서 느껴지는 어떤 통달함이란. 직접 체득해낸 것이 아니고서야 그 신의 그런 표정은 나올 수 없을 것이다. 지배자이든 피지배자이든 혹은 둘 다든, 그의 연기가 여유를 잃지 않는 까닭에 대해선 <퍼시픽 림>의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말이 해답이 되어줄 것이다. “이드리스 엘바는 힘이 넘친다. 그러나 그는 속해 있는 그룹의 권위에 빚지지 않는다. 그가 지닌 것은 다만, 자기 자신에게서 독점적으로 비롯된 권위이다.”

어떤 집단도 아닌 자기 자신 위에 바로 서기. 이드리스 엘바는 똑똑하지만 감정적이고, 인간적 결함이 있으며 자기 자신에 대한 고민을 거듭하는 영국 드라마 <루터>의 루터 경감을 5년간 치열히 연기했다. 그리고 <4월의 어느 날>에서 르완다 내전의 피해자, <만델라: 자유를 향한 여정>에서의 지도자 넬슨 만델라, <비스트 오브 노 네이션>에서 반란군 사령관까지 맡으며 자신이 왔던 역사와, 서 있는 땅을 여러 각도에서의 역할로 재현했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놓지 않는 작품 선택과 지난한 성장과정과 무명 시절을 거치며 ‘스트리트’에서 터득한 통찰들은 그에게 타고난 것보다 더 견고하고, 허물어지지 않는 기품을 만들어준 요인들이 아닐까. 45세, 나이를 먹어가며 더욱 빛을 보고 있는 배우 이드리스 엘바는 앞으로 더 바빠질 예정이다. <토르: 라그나로크>에 헤임달로 다시 한번 활약해야 하고, 스티븐 킹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블록버스터 <다크 타워>에서는 롤랜드라는 이름의 건슬링어 역을 맡았다. 바쁜 와중에도 그는 ‘이스트런던보이’였던 십대 때와 마찬가지로 ‘DJ Big Driis’로 활동하고 있다. 운이 좋다면, 스페인 이비사 섬의 클럽에서 디제잉하는 그를 만나볼 수도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 잊지 않지만, 그에 속박되지도 않는 이드리스 엘바는 언제나 긍지와 품위를 잃지 않을 것이다.

<비스트 오브 노 네이션>

포식자가 포식자를 마주하는 순간

<비스트 오브 노 네이션>의 인물들은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겐 강하다. 자신의 부대에서 하늘처럼 군림했던 사령관 역시 더 큰 포식자 앞에서 한없이 초라해지는 약자일 뿐이다. 최고사령관의 모멸적 처사 앞에 사령관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입을 꾹 닫는다. 태연해 보이지만 일순 허물어질 것만 같은 그의 표정은 권력의 허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권위를 부여해줄 상위의 권력자가 부재하자, 그의 작은 왕국은 갈 곳을 잃고 빠르게 몰락한다. 그는 포식자인 동시에 희생양이며, 기실 인간 사회의 모두가 그러하다. 이드리스 엘바의 강함과 약함, 그 모든 에센스가 이 한 장면에 축약된다. 삶에서 체득한 위계질서와 계급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통달이 선행되어야 가능한 순간의 연기다. 국내 미개봉작이나 넷플릭스에서 감상할 수 있다.

영화 2017 <다크 타워> 2017 <토르: 라그나로크> 2016 <바스티유 데이> 2016 <스타트렉 비욘드> 2016 <도리를 찾아서> 2016 <정글북> 2016 <주토피아> 2015 <비스트 오브 노 네이션> 2015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 2015 <더 건맨> 2014 <노 굿 디드> 2013 <만델라: 자유를 향한 여정> 2013 <토르: 다크 월드> 2013 <퍼시픽 림> 2012 <프로메테우스> 2011 <토르: 천둥의 신> 2010 <레거시> 2010 <루저스> 2009 <옵세스> 2008 <락큰롤라> 2007 <28주 후> 2007 <아메리칸 갱스터> 2005 <4월의 어느 날> 2003 <원러브> 2000 <소티드> 1999 <벨 마망> 드라마 2010~15 <루터> 시즌1~4 2010 <더 빅 시> 2009 <오피스> 2002~4 <더 와이어> 2003 <CSI: 마이애미> 2001 <로앤오더> 1998 <울트라바이올렛> 1997 <무언의 목격자> 1995 <앱솔루틀리 패벌러스> 1994 <스페이스 프리싱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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