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귀를 기울이면
2016-08-31
글 : 김혜리

형태와 색, 역사, 조명, 액자, 스폰서…. 프레더릭 와이즈먼 감독의 <내셔널 갤러리>는 미술품으로부터 파생될 수 있는 거의 모든 화제를 건드린다. 심지어 ‘보이지 않는 그림’에 대한 이야기들도 포함된다. 3년 반의 작업 끝에 렘브란트의 <말을 탄 프레더릭 리헬의 초상> 밑에서 찾아낸 숨겨진 또 다른 그림에 대해 발표하는 미술품 복원 책임자는, 천진한 흥분을 완전히 감추지 못한다. 그런가 하면, 시각장애 관람객에게 요철로 복제된 카미유 피사로의 <밤의 몽마르트르 대로>를 나눠주고 구도와 소실점을 손가락으로 촉감하도록 유도하는 담당자의 묘사는 너무 생생해 나도 모르게 눈을 감게 만든다.

08/15

<맘마미아!>와 <숲속으로>가 있기 오래전부터 메릴 스트립은 노래 실력이 탁월한 배우였다(10대 초반 전문가 권유로 2년간 오페라 교육을 받은 전력이 있다고 하니, 자질이야 말할 나위도 없다). 태초로 거슬러 올라가면 <실크우드>(1983)에서 자장가 를 흥얼거리며 친구 역의 셰어를 위로하는 애틋한 장면이 있었고, <헐리웃 스토리>(1990)에서 스트립이 독창하는 두 신은 영화를 한뼘쯤 밀어올렸다. 로버트 알트먼 감독의 유작 <프레리 홈 컴패니언>(2006)에서 릴리 톰린과 자매 컨트리 가수로 분한 메릴 스트립의 무대는 너무나 천의무봉한 절창이라 몇번을 돌려 보아도 질리지 않는다. 메릴 스트립의 노래가 알려주는 사실은 대략 다음과 같다. 하나, 그녀는 엄청나게 좋은 귀를 가졌다. 둘, 음악성은 이 배우의 특기가 아니라 연기의 연장이다. 영화 속 메릴 스트립의 노래와 율동은 언제나 퍼포먼스라기보다 액팅에 가깝다. 즉, 노래 한곡을 남부럽지 않게 흡족하게 공연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대사나 표정 연기와 같은 맥락에서 노래의 매너와 감정을 통해 인물의 퍼스낼리티를 표현한다는 의미다. 가무에 능한 많은 배우 가운데에서도 메릴 스트립에게서 유독 돋보이는 이 속성은 어디서 오는 걸까? 예전 인터뷰에서 스트립이 밝힌 음악을 듣는 방식이 힌트가 될 법하다. 어린 시절부터 메릴 스트립은 노래 자체보다 가수의 들숨과 날숨, 거기 실린 감정에 귀 기울이는 습성이 있었다고 한다. 달리 표현하면 음악 너머 노래하는 인간의 상태가 주된 관심사라는 의미다. 이와 같은 접근법은 데뷔 초부터 메릴 스트립을 최고의 테크니션 배우로 공인시킨 감쪽같은 악센트 둔갑에도 적용된다. 메릴 스트립은 <소피의 선택>의 폴란드 억양, <어둠 속의 외침>의 호주 억양,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덴마크 억양을 비롯해 다양하게 분화된 악센트를 작품마다 자동판매기처럼 뽑아내 예찬받는 동시에 과시적이라는 콧방귀를 사왔다. 어쨌거나 그녀는 실존 인물이나 특정 국적을 가진 캐릭터를 연기해야 할 경우, 해당 인물이 몸에 밴 억양을 발화하는 높낮이의 흐름, 습관적으로 강조하는 품사, 사이를 두는 지점에 집중한다. 이는 물론 개인의 욕망과 콤플렉스, 성격에 관련될 터다. 음악을 열렬히 사랑하는 후원자였으나 정작 본인의 음감은 엉망이었던 실존 인물로 분한 <플로렌스>도 예외가 아니다. 메릴 스트립은 영화에 나오는 8∼9곡의 아리아를 제대로 익힌 다음 그것을 정확히 플로렌스 포스터 젠킨스의 방식대로 ‘못’ 부르는 연기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내게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미국과 유럽에서 영화가 개봉했을 즈음 “워낙 노래 잘하는 당신이 최악의 음치 연기를 하느라 어려웠겠죠?”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메릴 스트립이 보인 당황스러움이다(심지어 살짝 마음이 상한 기색도 보인다). 기본적으로 그녀는 플로렌스가 노래를 못한다고 여기지 않고, 음정을 이탈한 소절보다 성공한 부분을 중심으로 인식하기 때문일 것이다. 플로렌스의 입장에 이입한 배우로서 어쩌면 당연한 노릇이다.

08/16

못 부르는 노래를 들으면 매우 불안해지는 증세 때문에, 스스로 노래방을 멀리하고 라디오의 청취자 노래 코너도 절대 듣지 않는 나는, <플로렌스>를 관람하며 이상한 체험을 했다. 플로렌스는 어쨌든 음치에다 자기를 과대평가한 허영의 부덕까지 겸비한 나쁜 가수인데도, 나는 귀를 가리긴커녕 그녀의 노래를 어느새 즐기고 있었다. 물론 러닝타임 20분경 그녀의 고양이 비명 같은 고음을 처음 접한 순간에는 모두와 똑같이 실소를 터뜨렸다. 그러나 극중에서 플로렌스의 연습과 공연이 거듭되는 동안 나는 어느덧 속으로 그녀와 더불어 노래하고 있었다. 메릴 스트립이 포착한 플로렌스 노래의 핵심은, 얼토당토않게 악보를 이탈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놀랄 만큼 ‘정답’에 가까이 도달했다가 좌절하기를 반복한다는 점에 있다. 그녀는 매번 거의 성공하려다가 꼴사납게 미끄러진다. 그런 다음 미끄러진 사실도 깨닫지 못한 채 다시 노래를 타고 올라간다. 즉, 플로렌스의 머릿속에는 정확한 선율과 해석이 울려 퍼지고 있지만 성대는 그것을 정확히 옮겨내지 못하고 귀는 내적으로 상상한 소리만 듣는 것이다(실존 인물 플로렌스는 18살 이후 평생 앓은 매독으로 청각 신경도 손상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전해진다). 여기서 떠오르는 영화적 전례가 있다.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에서 가라오케를 초토화시켰다가 열광으로 반전시킨 음치 키미(카메론 디아즈)의 케이스다. 하지만 키미의 노래는 하도 대책이 없다보니 사랑스러움의 경지로 넘어간 경우다. 반면 플로렌스는 음악 애호가답게 원대한 야심을 가지고 있다. 그녀가 선택한 레퍼토리가 보통 노래가 아니라 <라크메> 중 <종의 노래>라든가 <마술피리> 중 <밤의 여왕 아리아> 같은 소프라노 성악곡 중에서도 난이도 극상의 작품들이라는 점은 유의할 만하다. 플로렌스의 자부심과 열정은 진짜배기인 것이다.

마치 걸어다니는 샹들리에마냥 육중한 치장을 하고 시종 뒤뚱거리지만, 이 영화에서 메릴 스트립의 연기는 웃음을 주려는 의도가 전혀 없이 시종일관 진지하고 절박하다. 이 철저한 배우는 엉뚱한 지점에서 날숨을 쉬는 호흡법에서 플로렌스의 잘해내려는 안달복달함을 읽고, 박자를 놓쳐 얼버무리는 딕션에서 “난 몰라!” 하는 어린아이 같은 도피 성향을 감지해낸다. 절제를 놓고 무작정 발산하는 플로렌스의 콜로라투라에 이르면, 스트립은 오직 고음에 이르렀다는 데에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는 인물의 희열을 온전히 이해하고 표출한다. 플로렌스는 노래를 통해 진심으로 최고의 행복을 느끼고 그 행복을 고스란히 객석에 전하는 것이 본인이 세상에 남길 수 있는 가장 큰 공헌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래서 여인의 노래에는 듣는 이의 마음을 끄는 무지(無知)한 기쁨과 집요한 간절함이 있다. 원곡이 의도한 감흥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나름의 진정을 가진 별개의 감흥이 노래에서 발생하는 형국이다. 이 모든 감정을 메릴 스트립의 노래/연기를 통해 전달받은 관객이 플로렌스 포스터 젠킨스의 노래를 순전히 난센스 촌극으로 치부하기는 불가능하다. 스티븐 프리어스 감독은 플로렌스도, 아내의 환상을 보호하려고 무리수를 서슴지 않은 싱클레어도 허영에 찬 유한부인이나 사기꾼이라고 비난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이 아무도 해치지 않았음을 은근히 강조한다. 적어도 나는 넘어갔다. 나는 극중에서 플로렌스의 노래를 듣고 “다시 살아갈 의욕을 얻었다”는 군인의 라디오 사연이 조롱만은 아니었다고 믿는다. 고 데이비드 보위는 플로렌스 포스터 젠킨스의 레코드를 애장했고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대체 어떤 점이 보위를 사로잡았을까? 당장 자세히 짐작할 수 없지만 어쩐지 납득이 된다.

<상냥한 앨리스>

좋 아 요

요양간호사 시리

<빅 히어로>의 베이맥스와 용도는 같지만 생김새는 사뭇 다르다. 네덜란드에서 개발된 앨리스는 신장 60cm의 건강관리 로봇이다. 인조인간을 꺼리는 생래적 감정을 완화시키기 위해 일부러 작게 설계됐다. EBS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상영작 <상냥한 앨리스>는 80살 이상 인구가 4배로 증가할 2020년대를 대비해 발명된 로봇이 세 노인과 치른 베타 테스트 과정을 기록했다. 이 영화를 중편 SF 극영화처럼 보이게 하는 요인은, 기계를 탐탁지 않아 하던 독거 고령자들이 조그만 로봇에게 반응하는 태도다. “기계인 네가 뭘 알겠니?”라며 시선을 돌리는 행동마저 노인이 앨리스를 인격으로 받아들였음을 보여준다. 급기야 할머니들은 앨리스에게 앨범을 보여주고 노래도 불러준다. 성능과 데이터베이스가 미비한 탓에 적당히 침묵하고 느리게 대답하는 앨리스의 언행도 <상냥한 앨리스>를 산뜻하고 스마트한 이야기로 만든다. 섣불리 디스토피아를 예고하지도, 테크노피아를 예찬하지도 않는 소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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