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아카데미(이하 아카데미) 장편영화제작연구과정(이하 장편과정) 출신 감독들의 첫 번째 대담(<씨네21> 1069호 ‘젊은 감독들이 이야기하는 한국영화아카데미-김정훈, 백승빈, 조성희, 한승훈’)에 이어, 그 두 번째로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의 안국진 감독, <잉투기>의 엄태화 감독, <파수꾼>의 윤성현 감독, <소셜포비아>의 홍석재 감독을 만났다. 윤성현 감독과 안국진 감독은 대담(<씨네21> 1051호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 안국진, 윤성현, 조성희 감독과의 대화’)을 통해 서로 인연을 맺었고, 엄태화 감독과 홍석재 감독은 최근 연남동에서 함께 작업실을 나눠 쓰며 매일 서로의 작업을 체크하는 사이다. 네 감독 모두 장편과정을 통해 연출한 데뷔작으로 주목받은 감독, 두 번째 작품을 준비 중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아카데미 재학 당시 분위기를 나누며 시작된 이날 대담은 차기작에 대한 감독 공통의 고민을 나누는 의미 있는 자리로 번졌다.
홍석재
한국영화아카데미 28기. 장편영화제작연구과정 7기로 데뷔작 <소셜포비아>(2014) 연출. 차기작 시나리오 작업 중.
윤성현
한국영화아카데미 25기. 장편영화제작연구과정 3기로 데뷔작 <파수꾼>(2011) 연출. <사냥의 시간> 시나리오 작업 중.
안국진
한국영화아카데미 27기. 장편영화제작연구과정 7기로 데뷔작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2015) 연출. <여고괴담> 리부트 시나리오 작업 중.
엄태화
한국영화아카데미 28기. 장편영화제작연구과정 6기로 데뷔작 <잉투기>(2013) 연출. <가려진 시간> 후반작업 중.
-각자 아카데미 입학 당시를 떠올려보자.
=안국진_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한 후 독립영화 워크숍에서 영화를 공부했다. 나는 ‘여기가 아니면 마지막이다’라는 생각으로 들어갔다. 졸업하고 유학을 가야 하나 고민도 컸다. 그때 아는 교수님이 “지금 유학 갔다 오면 리셋이다”라는 말씀을 하시더라. 아카데미를 가면 해외에서 배우는 것보다 더 많은 걸 얻을 수 있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엄태화_ 우리 기수한테는 조성희 감독(25기)의 <짐승의 끝>(2011)과 윤성현 감독(25기)의 <파수꾼>(2010)이 정말 큰 영향을 미쳤다. 우리가 아카데미에 들어갈 즈음 나온 영화이기도 했고, 이곳에 입학하면 그런 영화를 찍을 수 있다는 기대가 정말 커진 때였다.
=홍석재_ 그래서 그런 마음에서 시작한 결과 엄태화 감독이 <숲>(2012)이라는, 평가가 좋은 영화를 찍은 거 아닌가. (웃음)
엄태화_ 나는 학교 졸업하고 연출부 생활을 했다. 그때 내 영화를 너무 찍고 싶은데 당장 제작비도 문제고 고민이 많았다. 아카데미 아니면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를 가야겠다 생각했다. 한예종 먼저 시험봤는데, 영어시험이 장벽이었고, 아카데미는 논술시험에서 걸렸다. 다 포기하고 연출부 생활만 하다가 아카데미 논술시험이 없어졌다기에 다시 지원해서 들어왔다. 그땐 교수님한테 뭘 배워야지 그런 기대보다는 일단 지원받아서 영화를 찍을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이었다.
과제와 패널티의 힘
-허진호, 봉준호, 김태용, 장준환, 최동훈 감독 등이 오래도록 아카데미를 대표해왔다면 장편과정이 거둔 성과는 일종의 세대교체를 가능케 했다. 이제는 영화에 꿈을 둔 이들에게 지금 이 자리에 모인 감독들이 아카데미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예이자 일종의 롤모델로 자리하고 있다.
안국진_ 정말 우리 기수는 그런 생각이 컸다. 장편과정의 결실인 <짐승의 끝>을 보고 너무 충격을 받아서 저 정도까지 찍지 않으면 방법이 없는 건가 생각한 거다. 누군가가 이곳의 기준점을 확 높여버린 거다. 치열해지고 경쟁심이 커졌다.
홍석재_ 사실 초면인데, 여기 있다고 하는 말이 아니라 나는 정말 윤성현 감독님의 <파수꾼>을 보고 아카데미에 들어가고 싶었다. (웃음) 장편과정이 들어오기 이전에는 장편영화를 찍는다는게 엄두가 안 났다. 장편과정이 생기고 나서 <파수꾼> 같은, 누가 봐도 좋은 결과물이 나온 거다. ‘여기 가서 어떻게든 장편을 찍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영화하는 이들이 모두 하게 된 거다. ‘아카데미라는 곳은 이런 좋은 영화와 감독을 배출하는 곳 이다’라는 생각으로 기대감이 컸다. 막상 들어와서 보니 시스템이 만들어낸다기보다는 윤성현 감독이 예외적인 거구나, 재능이 뛰어나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웃음)
=윤성현_ <파수꾼> 끝내고 후배들에게 가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여기에 판타지를 갖지 마라.” 봉준호, 김태용, 장준환, 최동훈 같은 아카데미 출신의 유명 감독들을 보고 이곳에 왔다가 절망하는 사람들도 많다. 현실하고는 엄청난 괴리가 있으니까. 나는 그런 선배에 대한 기대보다는 같은 기수 동기들과 작업하면서 만들어내는 것에 아카데미가 가진 의미가 더 크다고 본다. 아카데미도 시스템이다 보니 완벽할 수는 없다. 실망할 수도 있지만 같이 작업하는 동기들을 통해 배워가고 얻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홍석재_ 맞다. 시스템이 우리가 원하는 걸 만들어줄 수는 없다. 좋은 쪽으로 갈 수 있도록 우리가 기대하는 판타지를 해석하고 임할 필요가 있다. 아카데미가 가진 장점은 자기 돈 안 들이고 지원 받고 장비 대여하고 영화를 찍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모인 사람들과 의기투합해 영화를 만들 수 있다. 교수님도 중요하지만 난 입학 동기인 엄태화 감독이나 <들개>(2013)의 김정훈 감독 같은 형들과 생활하면서 그들에게 영향받고 배운 게 더 많다. 태화 형은 정말 우리 기수에서는 너무 유명한 에이스였다.
안국진_ 그럼그럼. ‘제2의 봉준호 감독’이 나왔다고 학교에 소문이 자자했으니까.
홍석재_ 아카데미는 과제에 대해서 시간을 안 지키면 프로젝트 예산이 깎이고 페널티가 세다. 그런데 태화 형은 한번도 그걸 어긴 적이 없다. 대단한 사람이다. 보고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못 배우고 졸업했다. (웃음)
안국진_ 홍석재나 나는 항상 늦었다. 그래서 내가 이번에 늦었으니 다음엔 네가 더 늦어라, 나 좀 가려지게. 서로 그런 이야기도 했다.
홍석재_ 서로 정말 의지를 많이 했다.
엄태화_ 이건 좀 과장인 게, 솔직히 내가 잘 맞춘다기보다는 이 둘이 항상 좀 늦더라. (웃음) 과제를 빨리 낸 건 페널티를 받으면 제작 지원금이 깎이니 그건 안 되겠다 싶어서였다.
윤성현_ 우리 기수는 완전 꼴통이라 규정이 있어도 대체로 쇠귀에 경읽기식이었다. 조성희 감독이 소위 말하는 모범생이었고. 특히 나는 입학할 때부터 워낙 말 안 듣는 걸로 선생님들 사이에 각인이 됐다. 동기들은 그런 내 덕에 용기를 좀 얻기도 했을 거다. ‘윤성현처럼 과제를 안 내도 잘리지 않고 다닐 수 있구나’, 이런 본보기를 제시한 거다. (웃음)
안국진_ 우리 때는 그렇게 맘대로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지금 보니 선배들이 앞에서 이렇게 하니 그 여파로 우리 때는 규정이 더 강화된 거였구나. (웃음)
‘아카데미용 영화’ , 정말 있을까
-장편과정의 괄목할 만한 성과들이 나오기까지, 시스템과 교육과정의 강압적인 분위기를 손꼽는다. 실제 상업영화계로 나와서도 겪을 수 없을 정도로 혹독한 평가와 서로간 경쟁을 부추기는 시스템으로 정평이 나 있는데, 그게 작품 연출에 미친 영향은 어느 정도였나.
안국진_ 그런 분위기 때문에 사실 아카데미에 대한 동경이 컸다. 엄청난 압박 속에서 교육을 받는다는 아카데미의 분위기가 입학 전에는 멋있어 보이더라.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아카데미의 교육을 받으면 뭐가 나오겠지 그런 기대가 있었다. 자기 객관화 과정을 거칠 수 있을 거라는 기대였다.
윤성현_ 사실 그 상황이 좀 <위플래쉬>(2014) 같다고 할 수 있는데, 나는 그 강압적인 분위기가 힘들더라. 학생들이 영화 잘 만들도록 서포트하고 예술적인 걸 고양시켜줘도 부족한 마당에 너희가 이걸 버텨야 상업영화 진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하니. 정신력을 키우자는 의도인 건 알겠는데, 아무리 한귀로 듣고 흘린다고 해도 학교가 가진 그 분위기에 개인의 에너지만으론 맞설 수가 없다. 학교에서 나오고도 한동안은 홍대 근처만 가면 현기증이 났었다. (웃음)
홍석재_ 아카데미 안 갔으면 지금 영화들 찍을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많이 한다. 결과적으로 생각해보니 그 압력들이 있어서 자의건 타의건 밀려서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영화사 집에서 아이템을 개발하고 있는데, 했다가도 안 풀리고 계속 제자리를 맴도는 기분이다. 올해가 가기 전에 뭐든 해야 한다는 마음에, 작업실 사람들끼리 벌금 걸고 마감을 해보기도 했다. 제작사가 있지만 혼자 작업하니 아카데미에서 작업할 때와는 다르다. 그땐 매일 학교 나가고 일년 내내 동기들과 붙어있고, 영화에 대해 토론하고 하다 보니 처음에는 준비가 안 돼있어도 어느 순간 뱉어내게 된다. 그런 방식으로 하다가 혼자만 있으니 불안한 마음이 크다. 나만 그런 건가. 다들 아카데미 아니어도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안국진_ 아카데미 아니었으면 나는 영화감독이 되지 못했을 것 같다. 내 스타일이 현장에서 잘 지내고 적응하는 타입도 아니고. 아카데미 없었으면 영화할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없었을 거다. 고마운데 밉기도 하고 그런 양가적인 감정이 드는 곳이다.
윤성현_ 아마 다들 비슷한 감정일 거다. 나도 아카데미 다니는 동안에는 ‘왜 이렇게 힘들까, 왜 이렇게 강압적인 분위기지’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런데 결국 그 안에서 배운 것도 많고 영화 찍을 기회도 얻었다. 그런 것에 대한 애증이 있다.
엄태화_ 입학하기 전에 나는 연출부 생활을 꽤 오래 해서 상업영화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본 게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비교가 되더라. 아카데미에서 작업하면 무엇보다 물리적인 제약이 크다. 장편 한편을 6천만원에 찍어야 하니 예산이 턱없이 부족하다. 감독이 연출의 영역을 벗어난 부분까지 다 관여해야 하는 거다. 그런데 이번에 상업영화 제작 시스템에서 <가려진 시간>(강동원 주연, 숲에서 실종된 후 성인이 되어 나타난 소년을 그린 판타지 미스터리물)을 연출해보니 정말 프로의 세계는 다르더라. 각자 역할이 다 정해져 있어서 연출자라고 해도 함부로 들어가기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고, 어떤 면에서는 전문가에게 믿고 맡길 수 있으니 편하다는 생각도 했다.
윤성현_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도 독립영화만 하다가 상업영화 찍는 순간에 세상에 영화 찍기가 이렇게 편할 수가 있나 했다더라. 아카데미에서 작업이 아니더라도 독립영화를 찍는다는 건 감독으로서 책임감이나 관여해야 할 게 너무 많다는 뜻이다. 아무래도 상업영화 진영으로 오면 전문가들과 소통하면서 얻는 작업의 장점이 클 것 같다.
안국진_ 상업영화 제작 시스템에 들어와보니 지옥 같았던 아카데미식 방식이 그립긴 하다. 아카데미에서 교수님들이 워낙 학생들을 내몰고 작품을 혹독하게 평가하니, 그걸 다 곧이곧대로 들으면 정신이 피폐해질 것 같아 대부분 흘려듣는 경향이 생긴다. 그럼에도 나는 그걸 좀 많이 수용하는 편이었다. 주눅 들긴 하지만 어쨌든 한참을 고민하고 버린다. 그러다보면 내가 가진 것에 비해 좋은 결과물이 나왔다. 나는 좀 채찍질이 필요한 스타일인 것 같다. 씨네2000에서 <여고괴담> 리부트를 준비 중인데, 시나리오 쓰는 지금의 분위기를 보면 고3 때 수험 준비로 죽을 것 같다가 대학 가서 목적을 잃은 것 같은 나태한 기분이다. 발전시키는 과정에서는 아무도 나한테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웃음) 오죽하면 전려경 PD님이 이젠 욕 좀 해줘야겠냐고 묻더라
윤성현_ 돌아보면 즐거운 추억이었다. 독립영화를 찍는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영화진흥위원회나 기관의 지원이 많지 않고, 대부분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모으고 부모님이나 주변 친지들에게 돈을 빌려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 아카데미는 재능 있는 사람들이 영화를 찍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시스템이다. 그런 혜택을 보는 사람들이 한국에 얼마나 되겠나. 결국 우리 모두 아카데미의 수혜를 입은 감독들이다.
-장편과정을 통해서 데뷔작을 내놓았고, 비평과 흥행 측면에서도 성과를 거두었다. 첫 데뷔 작품이 거둔 성과만큼 두 번째 작업에 대한 고민도 커지는 시점이다. 소재나 관심사 면에서 아카데미에 재학 중일 때와 상업영화 진영으로 나왔을 때 제약이 생기는 부분들이 있나.
홍석재_ 외부에서는 ‘아카데미용 영화’가 있다고 하는데, 사실 아카데미에서 작업하면 그런 게 없다. 무슨 이야기를 하라거나, 이런 이야기를 꼭 해야 한다는 가이드라인이 없다. 각자가 원하는 아이템을 가지고 와 작업하고 그래서 다양한 결을 가진 아카데미 영화들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그게 아카데미의 장점이라고 본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와 다르게, 시나리오를 작업하다 보면 ‘이게 상업적인 걸까’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당장 나만 재밌어서 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그러다보니 이상해지더라.
안국진_ 아카데미에서 중요한 건 ‘내가 만드는 이야기’다. 조금이라도 더 재밌게, 관객이 더 이해할 수 있게 하지만 주제에 대한 자유는 보장되어 있었다. 장편으로 만들고 극장에서 상영할 수 있는 기회가 왔으니, 어떻게 하면 관객이 더 좋아할까 공감능력을 키워나갔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나도 홍석재 감독과 똑같은 고민에 봉착했다. 아카데미 때도 관객을 생각하면서 시나리오를 썼는데 지금은 그때와 뭔가가 다르다. 더 공학적으로 접근해야 하나, 더 많은 관객을 상정하고 작품을 써야 하나, 이런 고민에 사로잡혀 있다.
홍석재_ 우리 영화를 보러 와서 긴장을 늦추지 않고 끝까지 보게 할 수 있냐, 라는 고민이 있다. 이런 영화를 예매할 것 같은지, 개봉주에 상위권에 드냐, 못 드냐 그런 것부터 고민하게 된다. 예전엔 그런 세계를 아예 상상하지 않고 살았다면 지금은 그 세계에 들어온 것 같다. 요즘은 생각만 하지 말고 직관적으로 찍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태화 형 옆에 있으니 그런 마음이 더 크게 든다. 태화 형은 그 부분에서 나와 많이 다르다. 고민하는 시간에 무작정 시작한다. 반면 나는 직관적이고 충동적으로 매달리기보다 명분과 의미를 찾으려고 하니 평생 진척이 안 되는 거다. 정말 못할 수도 있겠다, 라는 위기감이 점점 커진다. 장기적으로 영화를 만든다면 나 같은 작업 스타일은 할 때마다 힘들고 태화 형은 할 때마다 능숙해질 거라고 본다.
엄태화_ 석재는 나와 영화를 만드는 기준이 다르다. 나는 재밌겠다 싶으면 주제를 던지겠다는 생각 없이 그냥 시작하고 나중에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 고민한다. 반면 석재는 처음 소재를 접할 때부터 그 고민을 한다. 그래서 <소셜포비아>와 <잉투기>가 같은 소재를 다루고 있는데도, <잉투기>가 보여주지 못한 것들을 보여준 것 같다. 석재 같은 경우에는 그런 고민을 별로 안 해도 되는 게, 이미 대중과 그런 지점에서 맞닿는 감각이 있는 것 같다. 수상도 많이 했고, 6천만원 들여 찍은 영화가 25만 관객을 동원하지 않았나. 그래서 내가 옆에서 계속 ‘그냥 써’라고 이야기해준다.
안국진_ 맞다. 그런 감각은 타고난 것 같다.
윤성현_ 두쪽 다 공감이 간다. 나도 지금 준비 중인 <사냥의 시간>(가제)에 앞서 SF영화를 준비 중이었는데, 관객은 크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부분에서 답을 찾으려고 매달렸었다. 가령 조성희 감독의 <늑대소년>(2012)을 만든다면 왜 늑대인지 이유를 계속 찾고 있는 거다. 개념화에 대한 강박 때문에 자꾸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거다. 그런 과정 속에서 고민을 하고 만들어나가고 있다.
안국진_ 나는 너무 어두운 이야기에 매달리다보니 나 자신에 대한 반문을 계속한다. 그렇게까지 어두운 이야기를 할 거면 왜 상업영화를 하냐고. 그런데 관객이 수용할 때까지 한번 해봐야겠구나 생각한다. 더 상업적으로 하려는 강박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는 데 집중하려고 한다. 다만 시나리오를 전려경 PD에게 보여주니 이런 말은 하더라. “인물을 좀더 넣어라. 그래야 상업영화 같지 않냐”고. (웃음) 나는 학생들 조회 장면 이런 건 다 뺐다. 예산 많이 들까봐. 뭐든 다 되니 불안해하지 말라고 하는데, 아카데미에서의 버릇이 남아 있어서….
엄태화_ 나도 그 소리 들었다. 헬기 넣으라고. (웃음)
안국진_ 워낙 예산을 줄이는 데 익숙해 있다보니 그런 현상이 생기는 거다.
엄태화_ 맞다. 근데 그렇게 다 넣어도 된다고 하고 결국은 예산 문제로 다시 빼더라. (웃음)
윤성현_ 예산이 중요한 게 결국 그걸 통해서 ‘공기’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독립영화와 상업영화의 차이가 그게 아닐까. 그게 치명적인 것 같다. 독립영화를 작업하다보면 예산을 효율적으로 하려다보니 그 신이 가지고 있는 공기를 놓치고 가게 된다. 단순히 보여지는 시각적 규모뿐만 아니라, 그 공기 자체가 달라지는 게 문제다.
안국진_ 우린 빼면 뺄수록 그게 실력이라고 생각하고 작업하지 않았나. 감독부터 스탭 모두가 인턴사원처럼 일했다.
윤성현_ 그래서 ‘단돈 몇 천만원으로 제작’ 이런 수식어가 가장 싫다.
홍석재_ 사실 돈을 아낀다는 것은 그만큼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빨아서 만든다는 의미 아닌가. 그 예산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는데, 일단 결과가 나오니 학교에서도 계속 요구한다. 비단 아카데미만의 문제가 아니라 독립영화 전반의 딜레마라고 본다. 한국 독립영화 시장이 크지 않다보니 형태적으로 스탭들의 희생을 담보하는 구조다. 어쩌면 이 예산에 작품을 만든다는 걸 자랑할 것이 아니라 수치로 여겨야 할 것 같다.
마이너에서 메이저로의 이행, 고민들
-고민의 시간 끝에 내놓을 다음 작품을 모두가 기다리고 있다.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나.
윤성현_ 사람들은 내가 첫 번째 작품에 대한 압박으로 크게 영향을 받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정말 그런 부담은 1도 없다. 그보다 나 스스로 느끼는 걱정은 이제는 하고 싶은 영화를 하고 싶다는 거다. 저예산일 때는 예산 문제도 있고, 상업영화일 때는 또 나름의 제약도 있지만, 그런 제약에서 벗어나 이야기를 하고 싶다. 여기 모인 우리 모두 80년대 초반생으로 비슷한 나이다. 다들 <E.T.>(1982), <백 투 더 퓨처>(1985), <에이리언>(1979)을 보고 흥분한 세대 아닌가. 김기영 감독 작품 같은 클래식영화가 좋다고 해도 난 20대 중반 되어서 봤다. 그보다 내가 어릴 때 보고 자란 영화에 대한 정체성을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고 싶은 욕심이 있다. 그간 상업영화에 대한 고민도 많이 했고, 지금은 독립영화(서스펜스물 <사냥의 시간>)를 준비하고 있다.
안국진_ 마찬가지다. 냉정하게 말해서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배우 이정현의 승리지 감독 안국진의 승리는 아니라고 본다. 솔직히 이야기하면 지금 내 상태는 작품에 대한 고민을 떠나, 아카데미를 다니며 내 생활을 모두 버려가며 영화하겠다고 쏟아부은 후에 오는 고민들이다. 다른 선배 감독님들 보면 부럽다. 다들 영화도 하고 멋지게 삶도 사는데, 나는 그런 생활이 가능할까 생각이 들더라. 이걸 어떻게 잘 정리해나가며 영화를 업으로 삼을지 해법을 찾아나갈 것이다.
엄태화_ 나도 <잉투기>가 아주 잘된 영화가 아니었기 때문에 주변 반응은 그렇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요즘은 <가려진 시간> 후반작업으로 바쁜데, 지금 고민은 이거다. 홍보 때문에 무대에 나가야 하는데, 그렇게 앞에 나서는 게 무섭다. 동생(배우 엄태구. 개봉을 앞둔 김지운 감독의 <밀정>에 출연한다)이 홍보 활동으로 무대에 나가는 걸 보면서 그런 두려움이 피부로 더 느껴지더라.
홍석재_ 첫 영화가 잘됐으니 부담이 된다, 그런 건 나 역시 없다. 그런데 정말 지금 시나리오가 진전이 잘 안 된다. 관심은 국한되어 있고 마이너한데, 그걸 몇 백만명이 보는 상업영화로 컨버팅할 수 있을 것인가. 한국 관객에게 대중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키워드가 있고, 그런 키워드로 심도 깊은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연출자들이 존재한다면, 나는 그쪽으로 아예 결여된 게 아닌가 하는 이런저런 고민들을 하고 있다. 하위문화에 관심이 있는 내 모습을 긍정하면서 어떻게 잘,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날 수 있을까를 고민 중이다. 거창한 게 아니더라도 현실을 반영할 수 있는 이야기를 찾고 있다.
윤성현_ 누구도 좀비라는 소재로 1천만 관객 영화가 나올 거라곤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관객의 소재에 대한 갈망이 그만큼 크고, 소재가 가진 힘이 크다는 것이 입증되고 있다. 이건 상업적이다, 아니다 예측하는 것 자체가 지금의 관객을 저평가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기존 영화에 대한 강박을 가지거나 스타 캐스팅에 대한 압박을 가지지 말아야겠다 싶다. 새로운 시도들을 많이 하고 싶고, 동시대 감독들도 그랬으면 좋겠다.